28
칼립소가 접시를 치운 공간에 엘레나가 걸터앉았다.
“그렇게 나오면 내가 못 할 거 같아?”
칼립소가 으르렁거리며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순식간의 그의 얼굴이 거의 그녀의 코앞까지 들어왔다.
그의 입술이 확 다가오자, 엘레나는 피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억센 손이 뒷목을 거칠게 잡았다.
“정부면 정부답게.”
칼립소의 입술이 이제 거의 닿을 듯했다.
“얌전히 벌려.”
거친 입맞춤이었다.
조금의 반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사정없이 입술을 부딪쳤다.
엘레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텼다.
하지만 버티기 힘들 정도로 칼립소의 입술은 너무 뜨거웠고, 뒷목의 악력은 점점 세졌다.
“읏.”
엘레나가 조금의 신음을 흘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뾰족한 혀가 침투했다. 그리고 안에서 집요하게 휘젓기 시작했다.
밀어내면 휘감듯이, 또 밀어내면 삼킬 듯이 조여왔다. 속살이 비벼지고 엉키는 느낌에 미묘한 열기가 타올랐다.
분함인지 흥분인지 뭔지 모르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농밀하고 짙은 소리가 귓가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하아, 하.”
엘레나는 거세게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을 겨우 가다듬자, 이번에는 칼립소의 입술이 부드럽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대하듯 속도를 늦춰 차분하게 그녀를 삼켰다.
깃털처럼 간지럽게, 실크처럼 부드럽게 그녀 안에서 노닐었다.
‘아.’
엘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이 저절로 감겼다.
서서히 몰려드는 열기가 낯설었다.
자신도 모르게 배 속이 조여들고, 늘어진 손은 어느새 그의 목을 감게 되었다.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몸 전체가 거대한 젤리가 된 것처럼 흐느적거렸다.
그 느낌을 알아챈 듯이 그의 혀가 또 한 번 그녀 안을 부드럽게 유영했다.
움직일 수가 없다. 이미 몸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의지할 곳이라곤 그의 목이 전부인 듯 매달리는 형국이 되었다.
“젠장, 미치겠군.”
그녀의 심정을 대신 말하듯,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휘감았다.
“더 이상은 못 참겠어.”
엘레나가 흐릿한 눈으로 칼립소를 응시했다.
열기 어린 붉은 눈이 일렁이다 못해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이 느낌이 현실감이 없었다.
“침대로 가지.”
잠시 멍하던 엘레나가 그의 말을 되뇌었다.
‘침대로 가자고?’
그제야 엘레나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지금, 이 상황.
그와 내가 키스를 하고 있었구나.
엘레나의 눈을 동그랗게 뜨자, 칼립소가 귓가에 속삭였다.
“더 이상은 한계야.”
낮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자극받은 귓불이 바르르 떨렸다.
강한 팔로 번쩍 몸이 들리는 순간, 엘레나도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놔요!”
“왜 그러지?”
칼립소가 품 안에서 바동거리는 그녀를 보고 불퉁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침실엔 안 가요.”
그 말에 칼립소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또 거부하겠다고?”
“그냥 여기서 해요.”
칼립소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여기서?”
“그래요.”
“꼭 그래야 해?”
“정부면 정부답게 굴어야죠.”
엘레나가 스스로를 낮추는 말을 하자, 칼립소는 정말 화가 났다.
“도대체!”
칼립소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 분위기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지?”
“이 분위기가 무슨 분위기인데요?”
엘레나는 아까의 열기를 지우듯이 입술을 문질렀다. 칼립소는 그 동작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 칼립소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젠장!”
답답하다는 듯 칼립소가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거칠게 넘겼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해?”
“뭘 말이에요?”
“몰라서 물어?”
칼립소가 엘레나를 정면으로 쳐다봤다.
“당신을 진짜 정부 취급했으면 이렇게 안 해.”
“그럼 내가 뭔데요?”
문서에까지 ‘정부’라고 명시하고 온갖 치욕을 주며 데려왔으면서 이제 와서 아니라고?
그럼 자신은 무엇이란 말인가.
칼립소는 잠시 말이 없었다.
본인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엘레나의 주변을 서성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설마…….”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가 그대로 내리꽂혔다.
“나와 연애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자신의 입으로 내뱉고도 민망한 말이었다.
하지만 칼립소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그럼 안 되나?”
“진심이에요?”
엘레나는 기가 막혔다.
“그렇다면?”
삐딱한 자세로 쳐다보지만 칼립소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연애를 하고 싶으면 협박이 아니라 구애를 해야죠.”
“구애?”
이번엔 칼립소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더니 으르렁거리며 죽일 듯이 노려봤다.
“웃기지 마.”
“됐어요. 어차피 받아줄 생각도 없으니까.”
“왜?”
구애할 생각이 없다면서도 칼립소는 진심으로 열이 받아 되물었다. 반면 엘레나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거야 당연히 폐하는 내 취향이 아니까요.”
그러자 칼립소의 입술이 비웃듯이 일그러졌다.
“그래. 당신 취향은 잘 알지. 그 유약한 머저리가 아닌가?”
칼립소가 엘레나의 턱을 잡았다.
“잊지 않아. 당신과 짜고 내 배에 검을 박았지. 그렇지 않아도 찾고 있어. 찾아내면 갈가리 찢어 죽일 거니까.”
말을 마친 칼립소가 엘레나의 턱을 신경질 난다는 듯이 놓았다.
그 거센 반동에 엘레나의 고개가 휘청였다.
“아깐 그 사건은 자비롭게 용서했다면서요?”
“그건 당신에 한해서지. 그 머저리놈까지는 아니야.”
칼립소는 차분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잠시 후 칼립소가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지. 당신도 그만 쉬어.”
칼립소가 나간 후에 엘레나는 비로소 숨을 몰아쉬었다.
‘미쳤어.’
엘레나는 자신의 뺨을 탁탁 때렸다.
다행히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와의 입맞춤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침대로 가자는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갈 뻔했다.
만약 그대로 침대에 들어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전쟁에서 패해 끌려왔지만 자존심마저 잃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칼립소는 그마저도 허락지 않았다. 그 앞에서 자존심을 내놓고 웃으면서 굴복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지.’
꺾으면 부러질지언정, 스스로 숙이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게 가이아 황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 * *
칼립소는 쿵쿵 소리를 내며 집무실을 돌아다녔다.
시간이 지나도 아까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꿀에 빠진 것처럼 달콤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마지막에는 그런 반응이라니!
‘이곳에서도 계속 안토니안을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생각이 들자, 머리끝까지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마치 자신을 갖고 노는 듯한 여우의 태도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본능이 시키는 대로 몸부터 취해볼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강제로 그녀를 갖고 싶진 않았다.
칼립소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생각해봐도 저렇게 생각해봐도 해결 방법은 보이지 않은 채 답답하기만 했다.
그날, 온종일 사나운 기운을 뿜어내며 칼립소는 업무를 처리했다.
주변의 신하들 역시 칼립소의 눈치를 보느라 경직되어 있었다.
게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엘레나의 동태를 묻는 통에 시녀들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궁전 전체에는 전시 중과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보다 못한 데릭이 칼립소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폐하, 엘레나 님을 다시 탑에 가둘까요?”
“아니.”
칼립소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지금 처소에 그대로 둬. 단 경호는 충실히 하고.”
데릭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포로에게 경호라니. 탈출하지 못하게 감시하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러면 철저히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데릭.”
“예, 폐하.”
칼립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경호라고 말했어. 감시가 아니라.”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데릭이 고개를 숙여 답했다.
“그리고 폐하, 바로스 왕자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바로스가?”
칼립소가 반갑게 일어섰다.
바로스는 헤브론국의 왕자로, 칼립소와 어릴 때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칼립소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린 칼립소가 왕위를 이어받았을 때, 큰 도움을 주기도 했었던 소중한 친우였다.
“어서 들어오라고 해.”
“예, 폐하.”
데릭이 물러간 후, 바로스가 들어왔다.
“바로스, 잘 지냈나?”
“오랜만이야. 칼립소.”
칼립소는 반가운 얼굴로 바로스를 맞았다.
“여전하군.”
칼립소와 달리 바로스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미남이었다.
실제로도 바람둥이로 유명하여 그가 한 번 다녀갔다 하면 케이타 제국의 여인들이 밤잠을 못 잔다는 설도 있었다.
“이번엔 또 어떤 여인을 울리고 가려고 왔나?”
“울리다니? 난 여인들을 웃게 하는 재주밖에 없는데.”
바로스의 농담에 칼립소는 웃다가 갑자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여인의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 건가?”
“오호라.”
바로스가 눈을 반짝 빛냈다.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
“무슨 소문?”
“자네가 여우에게 홀려 나라를 말아먹을 뻔했다는 소문이 바다 건너편까지 들리던데?”
바로스가 흥미로운 얼굴로 칼립소를 바라봤다.
“쓸데없는 소리.”
“가이아의 황녀라면 나도 전에 본 적이 있는데.”
“엘레나와 친분이 있다고?”
“가이아 제국과 헤브론국은 오랜 친우 관계니까.”
“이번 전쟁에 구원병도 보내지 않았으면서.”
칼립소가 불만스러운 어조로 바로스에게 되물었다.
“자네가 나섰는데 당연하지 않은가. 설마…….”
바로스가 재밌다는 듯이 덧붙였다.
“지금 그 말은 가이아 제국에 구원병 보내지 않은 것을 원망하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