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다음 날 새벽, 칼립소는 대련장으로 향했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땀을 흘리는 것이 가장 좋았다.
대련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그는 한 마리의 맹수와 같았다. 순식간에 표적을 향해 찌르고, 돌아서서 다른 표적을 찔렀다.
하지만 아무리 땀을 흘려도 날뛰는 심장을 다스리기엔 부족했다. 그 심장이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지 칼립소는 분명히 알았다.
‘젠장!’
더이상 엘레나가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 결론을 내린 칼립소는 아까보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대련장을 나갔다.
* * *
엘레나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어린 시절, 들판에 풀냄새를 맡으며 뒹굴면서 놀던 날.
귓가에는 꿀벌 소리가 윙윙거리고, 나비들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던 평화로운 날, 어머니와 함께 나와 있었다.
‘좋아.’
엘레나가 뒤척이자, 정말 포근한 손길이 그녀의 머리에 다가왔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기분이 좋아 엘레나의 입매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나타났다.
“엘레나 님.”
‘이 목소리는 어마마마의 목소리가 아닌데.’ 순간적인 깨달음에 엘레나가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놀라지 마세요. 비비안이에요. 오늘부터 다시 엘레나 님의 시중을 맡게 되었어요.”
“어떻게 된 일이지?”
“폐하의 명이세요.”
비비안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는 엘레나의 손을 살짝 만졌다.
“그때보다 많이 마르셨어요.”
“아…….”
이불 속의 자신은 속옷 차림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그자가 벗긴 건 아니겠지?’
엘레나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가 잠시 갈등하고 있을 때, 비비안이 입을 열었다.
“어제 쓰러져 주무시는 것을 보고 제가 샤오르를 벗겨 드렸어요.”
엘레나는 칼립소의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엘레나는 산뜻한 기분으로 말했다.
다행히 무사히 밤은 지나갔다.
취해서 정신없어하는 자신을 보았으니 흥미는 떨어졌을 것이다.
이대로 영영 보지 않는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엘레나 님.”
하지만 부드럽게 미소를 띠고 있던 엘레나의 얼굴은 비비안의 말을 듣는 순간, 일그러졌다.
“아침 식사는 폐하께서 함께하자고 하셨습니다.”
“아침 식사를?”
“네, 얼른 채비를 하셔야 합니다.”
엘레나는 내키지 않는 몸짓으로 비비안이 내민 옷을 받아들었다.
채비를 마친 엘레나는 천천히 식당으로 향했다.
‘왜 아침을 같이 먹겠다는 거야?’
복도에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풍겼지만, 엘레나의 마음은 별로 편하지 않았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보기에도 버겁게 식탁에는 온갖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걸 아침으로 먹는다고?’
엘레나는 한숨이 나왔다.
가이아 제국에서는 아침 식사가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다. 수프와 따뜻한 빵, 갓 구워진 햄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차려진 식사는 마치 저녁 만찬을 방불케 했다.
가운데는 커다란 구운 통돼지 따위가 놓여 있었으며 화려한 접시에는 샐러드가 가득 담겨있었다.
갓 구워낸 따끈따끈한 빵들이 종류별로 놓였고, 각종 치즈와 훈제된 햄들, 소스가 곁들여진 양고기, 소고기와 수북이 쌓인 과일이며 모든 것이 넘쳐났다.
가운데 의자에는 이미 도착한 칼립소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쏘는 듯한 눈빛에 엘레나는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폐하, 일어나셨습니까?”
“앉지.”
칼립소가 오만하게 고개를 까닥했다.
그러자 엘레나도 자리에 앉았다.
넓은 식탁에는 칼립소와 자신 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안 오나요?”
“다른 사람들은 왜 찾지?”
엘레나는 식탁의 음식을 한 번 둘러봤다.
“좀 많은 것 같아서요. 원래 아침을 이렇게 먹나요?”
엘레나는 다소 황당한 어조로 물었다.
“그동안 못 먹고 지낸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푸짐하게 차리라고 했어. 들지.”
엘레나는 자신 앞의 음식을 바라봤다.
‘어젯밤 그냥 잠들어서 그런 건가? 잡아먹기 전에 살찌우는 것도 아니고.’
엘레나는 조용히 한숨이 나왔지만, 일단은 즐기기로 했다.
먼저 눈앞의 따뜻하고 하얀 빵부터 조금 뜯어 먹었다. 그동안 먹었던 딱딱하고 차가운 빵과는 완전히 달랐다. 살살 녹는 식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엔 샐러드를 먹었다. 이토록 신선한 샐러드를 먹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삭하게 씹히는 야채의 맛이 감미로웠다.
“그동안 왜 말하지 않았지?”
“뭘 말이죠?”
칼립소가 한심하다는 듯 엘레나를 바라봤다.
“불편한 것이 있으면 말을 했어야지.”
“날 거기 가둔 것은 폐하의 뜻이 아닌가요?”
정곡을 찌른 말에 칼립소는 할 말이 없었다.
“가두라고 했지, 학대하라고 한 적은 없어.”
엘레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이번에는 고기를 한 점 들었다.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네요.”
“오늘부터 다시 비비안이 당신 시중을 들 거야. 동쪽 탑보다 지금 침실이 마음에 들면 그대로 써도 좋고.”
엘레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칼립소를 바라봤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그건.”
칼립소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다른 곳을 한 번 보다, 내키지 않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자비롭게 당신을 용서해주기로 했기 때문이지.”
“뭐라고요?”
“가이아 제국에서 있었던 일. 내가 다 용서해주겠다고.”
칼립소는 선심을 베풀듯이 말했다.
“…….”
“너무 황송해서 말을 잊었나?”
칼립소가 엘레나에게 몸을 가까이했다.
“진심이에요?”
“난 평생 거짓을 말한 적이 없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칼립소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안심해.”
자신이 그러는 것은 몰라도 다른 사람이 함부로 대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먼저 자신이 태도를 바꾸는 수밖에.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고.”
“정말이에요?”
“그래.”
“무엇이든요?”
“말만 해. 금이든 보석이든 무엇이든.”
한참의 침묵 끝에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날 가이아 제국으로 돌려보내 줘요.”
엘레나가 분명한 어조로 말을 했다.
“그건 안 돼.”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잖아요.”
엘레나가 또렷하게 말하자, 칼립소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얼굴에 손을 가져댔다.
“당신은 이미 내 정부야. 그런데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그의 말에 엘레나가 실소했다.
“그 말은 금이나 보석 따위. 그러니까 딱 정부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말고 폐하 옆에서 아양이나 떨고 있으라는 이야기잖아요.”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내가 원하는 일도 아니죠.”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건 보내달라는 것뿐인가?”
엘레나의 눈이 전투적으로 빛났다.
“그건 안 되나요?”
칼립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엘레나, 괜한 고집부리지 말고.”
“고집이라니요? 난 내 의견을 말했을 뿐이에요. 아니면 의견을 말할 자유도 없는 건가요?”
두 사람의 눈빛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기어이 내가 가이아에서 온 사람들의 목을 차례차례 베어야만 고분고분해질 건가?”
엘레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 미친놈은 아마 자신의 말을 실행에 옮기고도 남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위협당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가이아 제국 국민을 건드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순간 공포감이 밀려왔지만, 엘레나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이가 없군요.”
칼립소가 뚜벅뚜벅 걸어서 이제 완전히 엘레나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엘레나 앞의 접시들을 확 밀쳤다.
쨍그랑 소리가 나며 접시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날카로운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뭐 하는 거예요?”
“아직 주제 파악이 안 되는 거 같아서.”
“그렇다고…….”
산산이 부서진 그릇이 마치 자신의 처지 같았다.
“역시 야만족이란…… 어쩔 수 없군요.”
“그 야만성을 여기서 보여줄까?”
칼립소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잊지 마. 당신은 내 정부야. 정부가 뭐 하는 사람인 줄 알아? 지금 당장 여기서 당신을 눕힌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어.”
살벌한 경고에도 엘레나의 얼굴빛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결전의 앞둔 장수처럼 칼립소의 눈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럼, 그렇게 해요.”
엘레나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말했다.
무거운 정적이 둘 사이를 감돌았다.
칼립소의 눈빛이 날카롭게 찌르는 듯했지만 엘레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기어이 그러길 원하나?”
“원하는 건 내가 아니라 폐하겠죠.”
이제 둘 사이 간격은 더 좁아 들면서 긴장감은 터질 것 같았다.
뭔가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마음에 엘레나는 입을 열었다.
“왜, 막상 하려니 자신 없나요?”
도전적으로 말하는 엘레나를 보고 칼립소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어갔다.
“어떻게 한 번을 꺾이지 않지?”
“처음부터 말했어요. 날 가지려면 그냥 취하라고.”
엘레나의 눈빛이 반항적으로 빛났다.
“길들이려 하지 말고 그냥 꺾어요.”
“엘레나.”
“왜 강제로 취하는 건 싫은가요? 아, 로맨틱한 사람이라고 했죠? 그러니 그건 취향에 맞지 않겠네요.”
엘레나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방실방실 웃으며 두 팔 벌려 맞아야 하나요?”
명백히 비꼬는 말투에 칼립소의 눈빛이 사납게 빛났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마음은 안 꺾여요.”
“…….”
칼립소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하긴, 첫 전장에서부터 목숨을 버리려고 했다.
부러질지언정 길들진 않겠다는 건가.
칼립소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여기서 한다고 해도 아무도 뭐랄 사람이 없다고 했죠? 그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