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쪽 소리 나게 빨아먹는 그를 보고 엘레나는 왠지 민망해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그와 말을 섞는 것은 좋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 엘레나는 본격적으로 안주를 먹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차갑고 딱딱한 빵에는 이미 질려있었다.
각종 산해진미가 그득한 트레이는 엘레나의 식욕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뚫어질 듯한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엘레나는 차근차근 야무지게 먹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르자, 그제야 엘레나도 주변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다들 취하도록 먹고 마시는 데에 정신없어 보였다.
그리고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아까보다 더 신경 쓰였다.
“이젠 거의 다 먹었나?”
엘레나는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 스스로 와인을 따른 후, 잔을 단숨에 또 비웠다.
오늘 연회가 끝나면, 어떻게 될까.
이런 식의 전초전은 질색이었다.
사내와 함께 하는 밤에 대해서는 떠도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떤 이는 끔찍하다 했고, 어떤 이는 황홀하다 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적의를 품은 척하는 행위가 좋을 리가 만무했다.
‘차라리 취하자.’
엘레나가 또다시 잔을 채우자, 이번에는 칼립소가 잔을 빼앗았다.
“너무 취하면 곤란해.”
“걱정 마요. 이 정도론 안 취하니까.”
다시 와인잔을 가져가려는 엘레나의 손을 칼립소가 잡았다.
“이미 충분한 거 같은데.”
칼립소의 손이 엘레나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이만 들어가지.”
“아직 연회가 끝나지 않았어요.”
“연회는 마음에 드나 보지?”
“지나치게 화려하네요.”
“그래서?”
“너무 화려한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요.”
마지막 말을 삼키며 엘레나는 와인잔을 또 입에 가져댔다.
그 말에 칼립소의 입술이 비스름하게 올라갔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화려하게 했는데.”
칼립소가 엘레나의 와인잔을 뺏어 단숨에 비웠다.
“마음에 안 든다니 실망이군. 굳이 더 있을 필요가 없겠어.”
와인잔을 내려놓는 손길이 거칠었다.
“이제, 일어나지.”
엘레나의 팔을 꽉 움켜쥔 그의 손바닥이 불같이 뜨거웠다.
순간 위압감이 들어 엘레나는 와인병을 집었다.
“아직, 다 마시지 못했어요.”
“그렇게 마시고 싶으면, 가져가지.”
칼립소가 여유 있는 손길로 와인병을 뺏어 들었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다.
엘레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최대한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에스코트하듯 칼립소가 그녀 뒤에 섰다.
“연회를 마치지 못해 아쉽나?”
“그렇다면요?”
그 순간 칼립소의 입술이 엘레나의 귓가에 닿았다.
“아쉬워할 필요 없어. 진짜 연회는 지금부터니까.”
엘레나의 허리가 칼립소에게 잡혔다.
벗어날 수 없도록 꽉 잡은 손길에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 몸이 움츠러들었다.
“따라와.”
거의 엘레나를 끌고 가듯이 칼립소가 서둘러 나가기 시작했다.
아까 연회에서 보여주었던 여유롭던 태도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초조한 것처럼 칼립소의 발걸음이 급했다.
“좀 천천히 가요.”
가뜩이나 거추장스러운 샤오르 덕분에 따라가기가 벅찼던 엘레나가 칼립소의 팔뚝을 잡았다.
딱딱한 팔뚝이 흡사 돌과 같았다.
“왜.”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으나, 그나마 칼립소의 보폭이 줄어들었다.
엘레나는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급하게 와인을 마셔서 그런가.
갑자기 엘레나의 시야가 흔들렸다.
‘이 정도에 취할 리가 없는데.’
엘레나는 최대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다행히 칼립소가 보폭을 줄여 겨우 쫓아갈 수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연회장을 지나 빙글빙글 성안 깊숙이 하염없이 걸어갔다.
“어디 가는 거죠?”
“가보면 알아.”
불친절한 대꾸에 엘레나도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하긴 그의 말대로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안쪽의 화려한 문을 열고, 다시 나온 또 하나의 문 앞에 서자 그제야 칼립소가 엘레나를 돌아보며 미소를 보였다.
“이곳은 마음에 들 거야.”
이번 연회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지금의 별실이었다.
특별히 이곳은 가이아 제국에서 온 예술가들에게 맡겼다.
벽에 거는 그림부터 가구까지 모두 최상품으로 준비했다.
그중의 압권은 침실이었다.
황금 기둥으로 장식된 커다란 침실 주변에는 수많은 촛불들이 반짝이며 타오르고 있었다.
가운데 놓여있는 거대한 하얀 침대 위에 붉은 장미꽃이 아름답게 흩어져 있었다.
칼립소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어서 칭찬을 해 달라는 듯이.
칼립소의 예상대로 엘레나는 홀린 듯이 침대에 다가섰다. 하지만 그 이유는 칼립소의 예상과는 반대였다.
그저 어지러웠다.
침대 옆의 수많은 촛불들이 넘실거리며 그녀의 시야를 방해했다.
그런 엘레나의 속도 모르고 칼립소가 얄밉게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그렇게 돌진하면 곤란한데.”
침대에 거의 눕다시피 한 엘레나의 옆에 앉아 칼립소가 만족한 미소를 드러냈다.
“그렇게 마음에 드나?”
엘레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잘못하다간 타 죽겠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불꽃과 칼립소의 눈빛이 겹쳐 보였다.
타오르는 빛나는 붉은 눈빛과 일렁이는 불꽃이 구분되지 않았다.
‘왜 이러지?’
몇 번 눈을 깜빡였어도 마찬가지였다.
칼립소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니까 시야가 더 흔들렸다.
‘어지러워.’
어느새 엘레나의 뺨이 폭신한 침대 시트에 닿았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칼립소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어지러워서요.”
엘레나는 간신히 기운을 모아 답했다.
그나마도 작게 중얼거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약한 척하지 마. 이 정도에 쓰러질 여자가 아니잖아.”
칼립소의 냉소적인 말이 엘레나의 귓가에 들렸다.
그의 말이 맞다. 이 정도에 쓰러질 자신이 아니었다.
칼립소의 말대로 엘레나도 진정으로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약한 척하는 것 따위는 성미에 맞지도 않았다.
급하게 마셨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먹던 양에 비하면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엘레나, 일어나.”
칼립소의 말이 귓가에 윙윙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들려고 해도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요즘엔 이상하게 체력이 약해졌다.
케이타 제국에 도착하자마자 땅의 기운을 못 받아서 그런가. 그동안 먹을 것이 부실해서 그런가.
간신히 고개를 들려던 엘레나의 고개가 다시 뚝 떨어졌다.
“이러면 곤란해.”
칼립소의 잔뜩 찌푸린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의 손이 엘레나의 턱을 잡아 들었다.
조여대듯 잡는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정신 차려.”
늘어지는 엘레나의 몸을 칼립소가 흔들었다.
“잠들어버리면 가만 안 둬.”
그 흔들림에 따라 엘레나의 몸이 인형처럼 까닥까닥 댔다.
“정신 차리래도.”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먹이를 앞에 두고도 못 먹게 되어 화가 난 맹수와 닮았다.
엘레나는 그 위협에 간신히 눈을 떴다.
“나랑…… 하고 싶다면.”
나머지 온 힘을 모아 엘레나는 힘주어 말했다.
“밥이나 제대로 주라고. 이 망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레나는 정신을 잃고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뭐?”
칼립소는 침대에 쓰러진 엘레나를 보고 황당한 웃음을 지었다.
칼립소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고대하던 첫날밤이었다.
이날을 얼마나 기대하고 기대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침대에 누운 엘레나의 두 눈은 모두 감겨있었다.
“엘레나?”
칼립소가 다급하게 엘레나의 어깨를 두어 번 흔들었지만 이제는 미동조차 없었다.
‘도대체가!’
이 여인은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을 열받게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온몸에 흐르는 뜨거운 피는 분노인지 욕망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칼립소가 성난 기세로 침실 문 밖을 나와 의원을 호출했다.
잠시 후, 의원에게서 영양실조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은 칼립소는 이전보다 한층 험악한 얼굴로 침실 밖을 나왔다.
“동쪽 탑에서 엘레나를 시중들던 시녀가 누구지?”
“줄리입니다.”
“당장 데려오라.”
칼립소의 명에 시녀들이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줄리는 덜덜 떠는 몸으로 그간의 사정을 엎드려 고했다.
그제야 사정을 파악한 칼립소는 화가 치솟았다.
“그래서 계속 식은 빵만 줬다고? 그것도 연명할 정도로만?”
“그게 탑에 가두라고만 하셔서…….”
“모시라 했지 않느냐? 모시는 이를 감히 그리 대우해?”
“패, 패전국에서 온 정부가 아닙니까? 게다가 폐하를 시해하려고도 했고요.”
칼립소는 멈칫했다.
「지금, 엘레나 님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그건 감히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짐의 여자인데 그런 식으로 대우하면 되겠는가? 그건 곧 짐을 욕보이는 것이다.”
줄리를 향한 질책처럼 보였지만 그건 주변인들을 향해 하는 말과도 같았다.
칼립소의 말을 직접 들은 대신들과 시녀들이 자신들이 경고를 받은 양 고개를 숙였다.
“당장 끌고 가라.”
추상과 같은 호령에 줄리가 끌려 나갔다.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그동안 갇혀 지냈을 엘레나를 생각하니 칼립소의 마음이 요동쳤다.
‘내가 왜 이러지?’
「패전국에서 온 정부 아닙니까. 게다가 폐하를 시해하려고도 했고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가.
당연한 일이다. 참 당연한 일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지 몰랐다.
진작 자신이 청혼했을 때 받아주었으면 얼마나 좋았는가.
아니, 최소한 성안에서 그 일만 없었더라도 지금보다는 처지가 훨씬 좋을 것이다.
하지만 칼립소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 덕분에 그녀가 자신 옆에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