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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25화 (25/100)

25

그때는 너무 화가 나서 그럴 정신도 아니었다.

칼립소가 여러 가지 잡생각으로 자신도 모르게 탑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데 데릭이 다가왔다.

“폐하, 여기서 뭐 하십니까?”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 산책 중이었다. 무슨 일이냐?”

데릭은 뭔가 알겠다는 듯이 동쪽 탑 위를 바라봤다.

“혹시 후회하고 계십니까?”

자신의 속을 환히 들여다보는 말에 칼립소가 멈칫했다.

“뭐를?”

데릭의 시선도 탑으로 향하자, 칼립소가 드물게 말을 흐렸다.

“흐음…… 아무래도…….”

칼립소가 선뜻 말을 잇지 못하자 데릭이 받았다.

“역시 목을 베는 편이 나았겠죠?”

데릭의 말에 칼립소의 눈빛이 번뜩였다.

“송구합니다.”

살의라고 해도 좋을 눈빛에 놀란 데릭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흐흠.”

칼립소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의식은 하는 편이 나았겠지?”

데릭은 놀란 기색을 숨기며 차분하게 말했다.

“폐하, 정부에게는 굳이 예의를 갖춰 줄 필요가 없습니다.”

“흐음.”

칼립소는 뭔가 못마땅한지 입매를 문질렀다.

“꼭 그래야 하나?”

“반드시 그러셔야 합니다.”

이번엔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데릭은 강하게 항변했다.

“지금, 나라 안에서 엘레나 님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패전국에서 온 황녀인데다, 황제를 시해하려고 했던 전력이 있었다.

“그래도 내 첫 여자인데.”

칼립소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그냥 작은 연회라도 하지.”

“알겠습니다. 폐하.”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데릭은 물러갔다.

하지만 그건 결코 작은 연회가 아니었다.

* * *

칼립소가 간 후 엘레나는 밤새 생각에 잠겼다.

「매일 꽃단장하고 날 기다려.」

「외출은 꿈도 꾸지 마. 검 잡을 일은 더더욱 없어. 근육은 말랑거리게, 피부는 매끄럽게, 태도는 상냥하게. 매일 밤 날 기다리는 거. 그게 당신이 할 일이야.」

‘정말 우습게 되었군.’ 엘레나는 팔을 들어보았다.

사흘 동안 검을 못 잡았다고, 팔에는 벌써 힘이 없는 것 같았다.

‘진짜 정부 노릇이나 하라는 건가.’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이 이런 위치에 놓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엘레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답한 마음에 좁은 방 안에서 검술의 기초동작을 시현했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땀에 푹 젖도록 움직였으나 마음속은 여전히 답답했다.

‘설마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하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줄리가 들어왔다.

고개만 까닥하더니 땀에 젖은 엘레나를 수상한 듯 바라보더니, 트레이만 내려놓고 다시 나갔다.

트레이에는 여전히 식어서 딱딱한 빵과 물만이 담겨있었다.

엘레나는 식은 빵이 자신의 처지와 닮은 듯하여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 * *

칼립소가 축제를 선포하자 케이타 제국의 국민들은 환호했다.

그동안 승전은 계속되었지만, 본격적인 축제를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국의 국민들에게 무상으로 음식이 제공되었고, 축제 기간 동안은 휴일로 공포되었다.

그러나 시끌벅적한 소란에도 동쪽 탑은 고요했다. 밖의 소란과 달리 엘레나의 하루는 변함없었다.

오늘 저녁도 줄리는 똑같이 맛없는 식은 빵 한 덩이만 가져왔을 뿐이다.

엘레나가 퍽퍽한 빵을 억지로 삼키는데, 다시 방문이 열렸다.

“엘레나 님.”

다시 돌아온 줄리가 까칠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하라는 명이십니다.”

“준비라니?”

“황실에서 연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엘레나 님도 참석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에요.”

엘레나는 왠지 목이 턱 하니 막히는 것을 느꼈다.

“따라오세요.”

물을 한 모금 마셔 애써 빵을 넘긴 엘레나는 줄리의 안내에 따라 내려갔다.

다행인 것은 오랜만에 땅과 가까워지니 불안한 마음도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첫 순서는 목욕부터였다.

며칠 햇볕을 보지 못했기에 원래도 하얀 엘레나의 피부는 이제 창백하리만큼 하얬다.

목욕이 끝나자, 그녀가 있는 곳으로 케이타 제국의 전통의상인 새하얀 샤오르가 당도했다.

‘하필이면 하얀색이라니.’

그날의 혼례식이 생각나 엘레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가이아 제국 때 입었던 혼례식 드레스보다 한층 화려했다. 자잘하게 박힌 다이아몬드며, 풍성한 진주까지 그 값이 얼마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하얀색 샤오르를 입자, 이번에는 머리 손질을 하러 시녀들이 달라붙었다.

“백반을 뿌리실 필요도 없겠네요.”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을 본 시녀가 부러운 듯 말했다.

지금 케이타 제국에서는 귀족 여인들의 머리에 백반을 뿌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어떤 머리 색깔을 막론하고, 머리 손질이 끝난 후에는 하얀 가루를 덧바르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엘레나는 백반도 필요 없는 천연의 머리 색을 가졌으니 능히 부러움을 받을 만했다.

“거기다 반짝거리기까지 하시잖아요!”

순수한 감탄의 시선이 엘레나의 머리로 쏟아졌다.

머리를 장식해 준 시녀가 물러나자, 줄리가 시녀들 틈에서 속삭였다.

“아름다워 봤자지 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줄리의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긴, 폐하의 마음이 변하시면 언제 목이 베일지도 모르는 처지시긴 하지.”

“여기 온 내내 찬밥 대우였어. 오늘 처음으로 연회에 초대받아놓고는 우쭐대긴.”

들으라는 듯 목소리가 커지자, 엘레나의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가 줄리에게 향했다.

“줄리.”

엘레나는 줄리의 이름을 부르자, 차갑고 위엄있는 목소리에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가이아 제국에서는 시녀가 예의를 지키지 못했을 때는 매질을 하지. 특히 주인에 대한 험담은 중형에 처해. 여기 케이타 제국에서의 국법은 어떻지?”

엘레나의 말에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모른다면, 이따가 폐하께 여쭤봐야겠군.”

그 말에 아까보다 더한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이제 시선은 엘레나가 아닌 줄리에게 모였다. 무표정한 엘레나에 반에 줄리의 얼굴은 보기 싫게 파래지고 있었다.

“엘레나 님.”

줄리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언을 하였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용서는 그렇게 구하는 게 아니야.”

그러자 줄리가 입술을 깨물며 한참을 버텼다.

“안되겠군.”

엘레나가 지나쳐 가려하자, 줄리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럼, 앞으로 행동으로 보여.”

엘레나는 고저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방금 말이 진심인지는 앞으로 너의 태도를 보면 알게 되겠지.”

말을 마친 엘레나는 무릎 꿇은 줄리 옆으로 차갑게 지나갔다.

엘레나가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줄리는 일어나 그녀를 따라갈 수조차 없었다. 치욕감에 그녀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주먹을 꼭 쥐었다.

* * *

연회는 매우 화려했다.

국가적인 축제였고, 참석한 모든 이들이 들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칼립소의 표정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나른한 표정에는 지루함마저 가득했다. 가끔 확인하듯 입구 쪽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대신들이 각종 제후국에서 바친 공물들을 보여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오직 한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림에 화답하듯, 드디어 엘레나가 등장했다.

붉은 융단을 밟으며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모든 이목이 집중됐다. 저도 모르게 일어나서 맞이하려는 칼립소를 데릭이 잡았다.

“폐하, 이곳에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그 말에 칼립소는 살짝 인상을 썼지만,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엘레나가 우아하게 걸어오는 동안, 칼립소의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됐다.

칼립소의 앞에서 엘레나가 발을 멈추자, 그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쪽으로 앉지.”

하지만 엘레나는 앉는 대신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우리 사이에 인사는 무슨. 앉으래도.”

칼립소의 반응에 엘레나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졌다.

‘우리 사이?’

예의를 무시하는 것은 자신이 가이아의 황녀가 아니라 정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겠지.

엘레나는 몸에 기운이 빠졌다.

“한 잔 들지.”

칼립소가 와인을 들었다.

“이건 가이아 제국에서 바친 와인이야. 최상품이라고 하던데.”

그 말에 엘레나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듣던 대로 맛이 좋더군. 물론 전에 맛봤던 것보단 별로지만.”

칼립소의 입술이 묘하게 올라갔다.

“케이타 제국의 승리에 축배를.”

건배를 제안하는 칼립소의 말에 엘레나가 담담하게 답했다.

“가이아 제국의 평화에 축배를!”

그 말에 칼립소가 껄껄 웃었다.

“당신이 얌전히 있는 한, 그리고 가이아 제국이 약속을 지키는 한, 평화는 계속될 거요.”

“다행이군요.”

엘레나는 한 번에 와인을 마셨다.

보통 숙녀들과는 다른 태도에 칼립소가 크게 웃었다.

엘레나 역시 전장을 누빈 장수였다. 승리 후에는 연회를 베풀 때도 많았을 것이다.

엘레나가 잔을 비우자, 칼립소가 빈 잔에 다시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 역시 엘레나가 한 번에 마셨다.

“천천히.”

“말씀하신 대로 와인 맛이 좋아서요.”

“아무리 그래도 안주도 같이 먹어야지.”

칼립소가 청포도를 손에 따서 엘레나의 입술에 넣어 주려 했다. 하지만 그 친밀한 동작에 엘레나는 거부감부터 들었다.

“괜찮아요.”

“먹어.”

강제로라도 먹이겠다는 듯이 칼립소의 강한 손가락이 엘레나의 입술을 억지로 벌렸다.

그러자 엘레나는 청포도를 무는 듯 일부러 그의 손가락을 꽉 깨물었다.

“훗.”

칼립소는 자신의 손가락을 엘레나의 입 안에서 뺐다.

선명하게 난 잇자국은 그녀가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여전히 무례하군요.”

“여전히 자극적이군.”

칼립소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깨물린 자신의 손가락을 그대로 입에 가져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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