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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24화 (2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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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자신이 도망가면 그 후폭풍을 가이아 제국이 어찌 감당하겠는가.

“어마마마, 제가 도망치면 또다시 전쟁이 시작될 거예요.”

“하지만…….”

“절 아시잖아요. 잘 견디고 돌아올게요.”

“엘레나.”

“어마마마는 그동안 여기서 가이아 제국의 힘을 키워주세요.”

“아가.”

“이렇게라도 황녀로서 도리를 다하고 싶어요.”

엘레나의 말에 엘리자베스도 더이상 말이 없었다.

* * *

햇살이 타는 듯이 높이 솟아올랐다.

오늘은 케이타 제국의 군대가 완전히 철수하는 날이었다.

칼립소는 오랜만에 자신의 애마인 칼의 위에 올라탔다. 주인을 알아보는 듯 칼은 신명 나게 날뛰었다.

칼립소의 몸은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다. 의원도 놀랄 만큼 뛰어난 회복력이었다.

배에 그어진 흉터만 없다면, 검에 찔린 적이 있다는 것조차 알기 힘들 정도였다.

칼립소는 대열을 둘러보았다.

칼립소의 행렬 뒤에는 가이아 제국의 끝도 없는 공물이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은색의 빛나는 마차가 눈에 보였다.

마차를 본 칼립소의 눈매가 흐뭇하게 빛났다.

어찌 되었든 그녀를 얻었다. 그녀의 죄는 차근차근 물으면 그만이다.

지금은 우선 자신의 손안에 은빛 여우가 잡힌 상황이 지독히도 만족스러웠으니까.

오늘 칼립소의 기분은 근래에 보기 드물게 매우 좋았다.

케이타 제국은 축제에 휩싸였다.

승전보를 올리며 돌아오는 칼립소 황제를 국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엘레나는 케이타 제국에 도착하자마자 동쪽 탑에 갇혔다.

“휴.”

다시 돌아온 동쪽 맨 꼭대기 방을 보며 엘레나는 한숨 쉬었다.

‘결국, 잡혔네.’

문득 이곳을 떠날 때가 생각났다.

「잡히지 마시오.」

이곳에서 떠날 때는 다시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적어도 이런 식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잡히고야 말았다. 그것도 더 최악의 상황으로.

노크 소리에 엘레나가 뒤를 돌아보자, 방문이 열리고 시녀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앞으로 시중을 들 줄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시녀의 고개를 빳빳이 들려 있었다.

“앞으로 엘레나…… 님을 모시게 될 거예요.”

엘레나 님?

공주라는 호칭이 사라졌단 것이 정부로 끌려왔다는 것을 실감 나게 했다.

“난 네 손보다는 비비안의 손을 빌리고 싶구나.”

“그건 엘레나 님이 선택하실 사안이 아닙니다.”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끌려온 신세에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알았다.”

“듣자 하니 혼자 옷도 벗고 입을 줄 아신다면서요?”

아무리 정부라 하나 줄리의 말투가 매우 불손했다.

줄리는 대대로 궁전 시녀로 지낸 집안의 장녀로 상급 시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정부로 끌려온 엘레나의 시중을 들라고 명해졌으니, 단단히 마음이 상한 것이다.

엘레나는 불손한 말투에 대해 지적하려다 말을 삼갔다.

지난번 때와 대우가 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황후가 될 사람을 모시는 것과 정부를 대하는 것은 다를 테니.

‘처음, 청혼했을 때 받아들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엘레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그래, 그러니 네가 별로 도와줄 것은 없을 것 같구나.”

“알았어요.”

줄리는 정말 손을 놓겠다는 듯이 뻣뻣하게 서 있었다.

“할 일 없으니 나가보렴.”

엘레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줄리는 밖으로 나갔다.

엘레나는 우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어 옷장에 다가갔다.

이곳 탑은 땅에서 멀리 떨어져서 그런지 벌써부터 마음이 답답해지고, 초조해졌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갑갑한 생활을 하게 될까.’

엘레나는 답답하게 조여오는 드레스를 벗어버렸다.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몸을 침대에 파묻었다.

무엇보다 피곤했다. 그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 * *

그 후로 사흘 동안 엘레나는 동쪽 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출입이 금지되기도 했지만, 딱히 탈출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첫날 바로 끌려 나가 벌이라도 받을 줄 알았다. 아니면 정부로 끌려왔으니 굴욕적으로 몸을 바쳐야 할 줄 알았다.

그렇게 하루 종일 전전긍긍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둘째 날까지 그대로 지나가자, 엘레나는 비로소 갇혀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매일 오는 사람은 줄리가 전부였다.

그녀는 아침마다 내키지 않은 얼굴로 트레이에 음식을 가져왔다. 가져오는 것은 그저 딱딱한 빵 한덩이에 물이 전부였다.

장소만 바뀌고 고문만 없다 뿐이지 생활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평생 여기서 갇혀 지내는 건 아니겠지?.’

엘레나는 한숨을 쉬었다.

자그마한 창문으로 하늘이 겨우 보일 뿐, 답답한 것은 여전바뀌지 않았다.

땅에서도 멀어져 있고, 고작 빵 한덩이만 먹으니 입맛도 점점 없어지면서, 그저 무기력해졌다.

그날 밤도 그렇게 잠들었다.

사흘 내내 갇혀있으니, 잠도 쉽게 오지 않았으나 힘이 없어 웅크리고 누워있던 차였다.

문밖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엘레나의 눈이 반짝 떠졌다.

끼익 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열렸다. 줄리와는 확연히 다른 서늘한 기운이 열린 문 사이로 느껴졌다.

‘칼립소!’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엘레나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눈을 다시 꼭 감았다.

‘설마 자는 사람을 깨우진 않겠지?’

최대한 움직임을 멈추고 엘레나는 고른 숨소리를 내기 위해 애썼다.

자신의 바로 등 뒤까지 칼립소가 온 것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안 가는 거야.’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도 칼립소에겐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누워있는 자세도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간 건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근육이 뻣뻣이 긴장되고, 눈가도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움직이고 싶어서 참기가 어려웠다.

‘그냥 뒤척이는 척이라도 할까.’

엘레나는 잠에 빠진 듯 이불을 움켜쥐며 살짝 몸을 틀었다.

반대쪽으로 몸을 틀려는 순간, 엘레나의 손목이 칼립소에게 잡혔다.

“그만 일어나지.”

그 말에 엘레나의 눈이 반짝 떠졌다.

칼립소가 자연스럽게 침대 옆에 앉았다.

“아까부터 깨어 있었던 거 같은데.”

엘레나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았다.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방 안.

엘레나는 어쩔 수 없이 칼립소를 바라봤다.

고작 한 사람이 더 들어왔을 뿐인데 방이 말도 못 하게 좁아 보였다.

“나한테 할 말 없나?”

칼립소는 엘레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한동안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를 보면 분노로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이 냉정을 찾았을 때,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고작 사흘이 한계였다.

그저 보고만 가야지 하던 생각이, 은빛 머리카락을 보니 만져보고 싶었고, 달빛에 비친 하얗고 조그만 얼굴을 보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엘레나는 칼립소의 시선을 의식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어찌 되었건 그때 일은 미안하게 생각해요.”

“어찌 되었건?”

칼립소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이 올라갔다.

“그 말은 마치 당신은 별 책임이 없다는 듯이 들리는데.”

엘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변명은 질색이었기에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엘레나는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앞의 말은 실언했어요. 미안해요.”

깔끔하게 사과하자 칼립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낫군. 하지만 말 한마디로 해결될 일은 아니지.”

엘레나는 칼립소의 눈을 피했다.

“미안한 만큼 바뀐 태도도 기대하지.”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그런 시시한 거 말고.”

“그럼, 뭘 어떻게 하면 되죠?”

“당신이 왜 끌려왔는지 제대로 모르나 본데…….”

“알아요.”

“그러면 뭘 해야 하지?”

엘레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해 줘요.”

“매일 꽃단장하고 날 기다려.”

단호한 말이 엘레나의 귀에 그대로 꽂혔다.

“이곳에서요?”

반문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이 칼립소가 말을 이었다.

“외출은 꿈도 꾸지 말고. 검 잡을 일은 더더욱 없어. 근육은 말랑거리게, 피부는 매끄럽게, 태도는 상냥하게. 매일 밤 날 기다리는 거. 그게 당신이 할 일이야.”

“원하는 거 그게 아니잖아요.”

“내가 원하는 걸 당신이 아나?”

“차라리 지금 자요.”

엘레나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렇게 피 말리며 기다리는 것은 질색이었다. 해치울 거면 빨리 해치우는 게 나았다.

“여전히 참 쉽군.”

칼립소의 눈이 이글이글 빛났다.

“꼭 그렇게 말해야 되겠어?”

“정부로 데려온 건 그 이유잖아요?”

칼립소가 잠시 한숨을 쉬었다.

“합방 날짜는 따로 잡을 거야.”

욱하듯 말한 칼립소가 서둘러 방을 나갔다.

‘왜 저러는 거지? 합방 날짜는 왜 또 번거롭게 따로 잡는다는 거야?’

엘레나는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정말 아이 때문인가.

그렇다면 엘레나는 칼립소의 행동이 이해 갔다.

가이아 제국에서도 황제의 아이를 생산할 때는 절차가 복잡했다.

가장 기운이 높은 달이 뜨는 날을 찾아, 길일을 지정한 후에 동침했다.

‘맘대로 하든가 말든가.’

잠깐이지만 칼립소와 상대를 하고 나니 몹시 피곤했다. 엘레나는 다시 침대 속에 파묻혀 스르르 잠들었다.

반면 밖으로 나온 칼립소는 쉽게 떠나지 못했다.

「차라리 지금 자요.」

어떻게 그렇게 사무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왜 자신은 또 전전긍긍하며 들어가지도 못하고 동쪽탑 주위를 맴돌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온몸에 짜증이 솟았다.

‘이럴 거면 왜 이렇게 금방 나왔지?’

그것도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기에도 자존심이 상했다.

‘너무 정부 취급했나? 의식도 치러주지 않아서 그런가?’

하지만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거기다가 협정을 맺을 때 지은 죄를 생각하면 당장 목을 베도 시원치 않았다.

그런데도 동쪽 탑의 초라한 방을 보니 심사가 뒤틀렸다.

‘가이아 제국에서 의식을 올리자고 할 때 하고 올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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