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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23화 (2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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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의 기세에 베리우스 황제가 여전히 덜덜 떨면서도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가 우리에게 청혼한 이유가 있지 않은가?”

칼립소가 말해 보라는 듯이 눈짓했다.

자신도 모르는 마음을 어찌 베리우스 황제가 안단 말인가.

“엘레나의 비밀을 알아서가 아닌가?”

뜻밖의 말에 칼립소는 흥미로운 눈길을 보냈다.

“그녀와 반려가 된다면…….”

“폐하!”

엘리자베스가 베리우스의 말을 막았다.

말을 멈춘 베리우스의 목에 칼립소가 검을 들이댔다.

“계속 말씀해 보시죠. 그 비밀이란 거.”

“아, 아무것도 아니네.”

베리우스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칼립소가 검을 더 바짝 목에 댔다.

“아무것도 아니긴요. 방금까지도 잘만 입을 여시지 않았습니까?”

사나운 기색에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아이 이야기일세. 엘레나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가 태어나면 혹시 치유력을 이어받을 수 있으니.”

“아이라.”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던 칼립소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면 굳이 국혼을 올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칼립소가 묘하게 웃었다.

“그냥 첩으로 주시죠.”

칼립소의 눈은 이제 베리우스 황제 뒤에 있는 엘레나에게 노골적으로 향했다.

“엘레나, 당신 생각은 어떻지?”

칼립소의 말이 무겁게 울렸다.

아까부터 엘레나는 칼립소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고작 피 몇 방울이었을 뿐인데.’

다 죽어가던 사람이 이렇게 펄펄 날며 자신들을 위협할 줄은 몰랐다.

그저 생명을 구하기 위하기 처치였을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죽게 놔둘 것을.’

뒤늦은 후회를 하는 동안 칼립소가 베리우스 황제의 어깨를 밀며 좀 더 안쪽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확실히 잡힌 거 아닌가?”

엘레나가 베리우스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바마마, 제가 가겠습니다.”

엘레나의 말에 베리우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고, 엘리자베스는 울먹였다.

“칼립소 황제, 엘레나를 볼모로 보낼 테니, 그만 군대를 물려주게.”

칼립소는 서늘한 눈길로 베리우스 황제를 바라봤다.

“그거야, 어젯밤 평화협정을 할 때의 이야기고요, 지금은 상황이 변했지요. 베리우스 황제, 이제부터 가이아 제국은 우리가 지배합니다.”

칼립소의 선언에 베리우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앞으로 가이아 제국은 케이타 제국은 군신 관계가 될 것입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 순간 삽시간에 케이타 군사들이 베리우스 황제 일행을 둘러쌌다.

이 상황에서 만약 거부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 보듯 뻔했다.

“……알겠네.”

베리우스 황제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문이 열렸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요?”

“아닐세. 알아들었네. 뭐든 따르도록 하지.”

칼립소의 검집이 베리우스의 어깨 위를 내리쳤다.

“그렇다면 먼저, 그 태도부터 바꿔야 될 것 같습니다.”

베리우스는 창백하게 질렸다.

어느새 몰려온 수많은 신하들의 눈이 베리우스에게 향했다.

“짐에게 예를 갖춰야지.”

칼립소의 타는 듯한 붉은 눈이 베리우스를 향했다.

그러자 베리우스의 무릎이 천천히 바닥으로 꺾였다.

“신…… 신은…….”

베리우스의 입에서 신하라는 말이 나오자, 주변의 신하들이 오열했다.

“폐하! 아니되옵니다!.”

“아니되옵니다!”

“폐하, 항복하지 마소서.”

그렇게 부르짖는 것이 마지막으로 가이아 신하들의 목이 베어졌다.

그러자 더 이상 반대를 외치는 소리가 사라졌고, 그 모습을 본 베리우스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셨다.

주변은 어느새 무거운 정적에 휩싸였다.

이미 성은 케이타 군대에게 완벽하게 지배당했다.

베리우스는 남은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의 목숨은 자신의 손에 달려있었다.

여기서 항전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수많은 목숨들이 사라지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이 있다면 해 보겠다.

하지만, 지금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베리우스는 너무도 안타까웠다. 칼립소 황제가 직접 화친을 청하러 올 때가 마지막 기회였다.

‘그걸 망치다니.’

하지만 자신의 딸이 한 행동이라 그 또한 할 말이 없었다.

위협적인 시선에 베리우스의 머리가 바닥에 닿았다.

그나마 가이아 제국을 보존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신은 천년의 역사를 가진 가이아 제국을 폐하께 의탁하고자 합니다. 머리 숙여 바라옵건대 감히 황제 폐하께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소서.”

베리우스 황제는 자신의 이마를 찧듯이 바닥에 박았다.

바닥은 황제의 이마에 흐른 피로 붉게 젖어갔다.

“하해와 같은 은혜로 굽어 살펴주셔서 저희 신하와 백성들을 보호해 주시옵소서.”

죽음 같은 정적이 밤공기를 짓눌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칼립소의 입이 열렸다.

“원래는 당장 목을 베어야 하나.”

날벼락 같은 목소리에 베리우스 황제가 덜덜 떨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대의 죄를 용서해주지.”

칼립소의 검집이 다시금 베리우스의 어깨에 닿았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베리우스가 다시 한번 머리를 찧듯이 박았다.

베리우스 황제가 완벽한 항복을 선언하자, 칼립소 군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가이아 제국은 케이타 제국을 신하의 나라가 되었다.

베리우스 황제가 굴복하자, 가이아의 본성은 빠르게 재정비되었다.

이전과 달리 협약은 칼립소의 뜻에 맞게 일방적으로 맺어졌다.

[하나. 케이타 제국과 가이아 제국은 군신 관계임을 명시할 것 둘. 매년 사신을 파견하고, 공물을 바칠 것.

셋. 매년 만 명 이상의 수준 높은 기술자와 예술가를 보낼 것.

넷. 케이타 제국이 요청 시 원병을 파병할 것.

다섯. 가이아의 제1황녀를 케이타 제국 황제의 정부로 보낼 것.]

굴욕적인 협약이 체결되자, 칼립소도 가이아 제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엘레나도 협약에 따라 케이타 제국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 * *

엘레나는 멍하니 침실 문을 바라봤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가이아 제국은 항복을 선언하고, 케이타 제국과는 군신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은…….

엘레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부라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만약 자신의 피가 효력을 발휘해, 칼립소가 회복된다면 향후에 다시 전쟁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비겁한 수를 쓴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정정당당하게 겨루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었는가.

기회가 있을 때, 죽게 내버려 두어야 했을까?

그러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칼립소가 죽었다 한들, 케이타 군사들의 공격은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이전의 평화협정을 잘 이끌어 나갔어야 했다.

볼모로 간다 하더라도, 가이아와 케이타 제국 간의 외교 역할을 하면 좋았을 텐데.

엘레나는 안토니안이 원망스러웠다.

그날, 그가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을 때 거절했어야 했다. 전략도 없이 수상한 자리를 마련했을 때, 그 검은 속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다.

“엘레나”

방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엘리자베스였다.

“어마마마.”

“엘레나, 오늘 바로 케이타 제국으로 가야 한다더구나.”

칼립소 황제는 준비 시간 따위는 주지 않았다.

아무리 정부라고 해도 가이아 제국에서는 간단히라도 의식을 올리길 요구하였으나, 그마저 묵살 당하고 말았다.

그저 포로처럼 무작정 보내야 한다니 엘리자베스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엘레나, 괜찮겠니?”

“할 수 없는 일이죠.”

엘레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리우스 황제가 전면적인 항복을 선언하고 협정을 맺자, 케이타 군대는 순순하게 공격을 멈췄다.

궁정 내에서는 너무 쉽게 항복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현명한 판단이었다.

만약 계속 버티고 있었다면 가이아 제국은 처참히 망가졌을 테니.

비록 가이아 제국의 제1황녀를 정부로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엘레나가 비겁한 수를 쓴 것이 알려지면서 가이아 제국의 신하들도 수긍하는 형태가 되었다. 오히려 케이타 황제가 황녀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정부의 치욕을 준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는 치들도 생겼다.

“그러게 왜 그런 일을 해서…….”

엘리자베스는 눈가를 훔쳤다.

“그런데, 아가. 정말 그 일을 네가 한 것이 맞니?”

엘리자베스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케이타 황제와 검으로 겨루었다면 믿었을 것이다.

‘드하야 즙을 몰래 먹이다니. 비겁한 수는 누구보다 싫어하는 아이가 아닌가.’

이번 일은 엘레나의 성격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엘레나는 잠시 어머니의 맑은 눈을 바라보았다.

순간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위로받고 싶은 유혹도 들었다.

하지만, 곧 말을 삼켰다.

지금 와서 안토니안에게 책임을 미룬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싸울 수도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게다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자신의 실책도 있었다.

“엘레나, 솔직히 말해 보렴. 네가 한 짓이 아니지? 그저 오해지? 그렇다면 오늘이라도 어미가 케이타 황제에게 사정을 해 보마. 응?”

대답을 재촉하는 엘리자베스 말에 엘레나는 화제를 돌렸다.

“안토니안은 아직 소식이 없나요?”

“사방으로 찾고 있지만 도통 연락이 없구나.”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비밀통로로 제일 먼저 탈출한 것이 자명했다.

“엘레나.”

“어마마마,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출발하겠어요.”

“안 돼.”

엘리자베스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엘레나, 지금 당장 도망치거라.”

“어마마마.”

“준비는 어느 정도 해두었어. 뒷일은 이 어미에게 맡기고 가. 넌 신탁의 계시를 받은 귀한 아이야. 후일을 도모하는 게 맞아.”

엘리자베스가 엘레나의 손을 꼭 잡았다.

보고 있기만 해도 아까운 귀한 딸을 야만인의 정부로 보낸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엘레나.”

“또다시 도망가고 싶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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