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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22화 (2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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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는 새끼손가락 흐르는 피를 칼립소의 입술에 갖다 댔다.

흐르는 피가 손가락을 타고 그의 입술로 타고 들어갔다.

엘레나는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봤다.

피가 흘러가는 것을 보던 엘레나는 정성 들여 기도를 올렸다.

그때, 멀리서 다급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황녀 전하!”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급했다.

“황녀 전하! 어서 피하셔야 해요!”

다급한 이자벨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지만, 엘레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급기야 이자벨이 엘레나의 허리를 잡아끌었다.

“시간이 없어요. 가셔야 한다고요!”

“잠시만…….”

“제발요, 전하. 황제 폐하께서도 위험하시다고요.”

“아바마마가?”

그제야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 위로 향하던 엘레나는 미련이 남은 듯 잠시 뒤를 돌아봤지만, 곧 다시 서둘러 계단 위로 빠르게 뛰어갔다.

그러나 곧 정신이 혼미해지는 바람에 걸음을 휘청거렸다.

“전하!”

이자벨이 엘레나의 팔을 서둘러 붙잡았다.

“황녀 전하, 괜찮으세요?”

“어, 괜찮아.”

하지만 괜찮다는 말과는 달리 엘레나의 전신에선 힘이 빠졌다.

다리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잡기조차 힘들었다.

‘고작 조금 피를 흘렸을 뿐인데.’

전장에서는 그보다 더한 상처가 많았다.

“전하, 손가락에서 피가…….”

멈추지 않는 피가 새끼손가락을 타고 계속 흐르고 있었다.

“얼른 지혈해 드릴게요.”

하지만 정신없는 와중에 마땅히 지혈할 천도 소독약도 없었다.

“아니야, 우선 빠져나가자.”

엘레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깟 상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장 중에서는 이보다 더한 상처도 달고 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고작 새끼손가락에 작은 상처가 난 것뿐인데도 온몸이 타는 듯이 아팠다.

찌이익.

“지금 뭐 하는 거야?”

“기분 나쁘시더라도 이거라도 사용하는 게 낫겠어요.”

이자벨은 자신의 속치마 천을 찢어 엘레나의 손을 감쌌다.

하얀 속치마는 어느새 붉게 물들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기분 나쁘다니. 고마워, 이자벨.”

엘레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이자벨의 눈가는 엘레나가 친히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감격으로 촉촉하게 젖었다.

“어서 가자.”

엘레나가 이자벨의 팔을 끌었다.

벌써 아득하게 들리는 비명 소리는 사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애초에 이런 짓을 벌여서는 안 됐어. 바보 같은 안토니안.’

케이타의 군대가 성문을 열고 들어온 이상, 패배는 자명했다.

게다가 자신들의 황제가 이런 비겁한 수에 당했다는 것을 알면 처절한 복수가 시작될 것이다.

주변국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가이아 제국의 위신이 떨어질 테고, 주변국들의 협조를 받기도 힘들 것이다.

생각할수록 암담했다.

‘휴우.’

평소 같으면 검을 들고 앞서 나가 지휘했겠지만, 지금 엘레나는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칼립소의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되는 걸까. 아바마마는 어디 계시지?’

“황녀 전하, 이리 오세요.”

이자벨이 엘레나를 보호하듯 끌어당겼다.

“이쪽 연결통로는 다행히 비어있어요.”

엘레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자신의 팔을 끄는 이자벨에 의지하며 애써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엘레나는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 * *

헥토르는 케이타 제국의 병사들을 이끌고 가이아 본성을 뒤집어 놓았다.

‘어쩐지 그 은빛 여우가 재수 없었어.’

헥토르의 눈은 거의 뒤집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애초에 폐하께서 직접 적진으로 들어가 화친 협약을 하러 가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화친이라니.’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다 이긴 싸움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화친조약을 맺으러 간다는 것은 그 은빛 여우 때문이 분명했다.

‘평소에는 여자한테 관심도 없으시더니. 이런 대형 사고를 치실 줄이야.’

헥토르는 사납게 울부짖으며 병사들을 몰아붙였다.

“어서, 폐하를 찾아라! 어서!”

헥토르는 서둘러 칼립소의 흔적을 찾았다.

「만 하루가 지나도 소식이 없으면, 가이아 본성을 공격하라.」

무기를 놓고 성안으로 들어갈 때, 자신에게 은밀히 전한 명이었다.

‘제발, 너무 늦지 않았기를.’

헥토르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칼립소가 데려간 병사들의 처참한 꼴을 봤기에 헥토르의 마음도 점점 불안해졌다.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말렸어야 했는데.’

지금이야 위세를 떨친다 했지만, 칼립소가 없는 케이타 제국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헥토르는 서둘러 지하 감옥을 차례차례 뒤졌다.

“재상!”

끔찍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는 데릭을 봤을 때, 헥토르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정신이 드십니까?”

헥토르의 모습이 보이자, 데릭은 간신히 눈을 떴다.

“폐하는 어디 계십니까?”

그 말에 데릭이 힘없이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헥토르는 남은 병사들에게 데릭을 맡기고 더 깊숙이 내려갔다.

데릭의 상태로 보았을 때 칼립소의 목숨도 장담하지 못했다. 헥토르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더 아래로 내려갔다.

을씨년스러운 지하로 더 내려가자, 방금 본 감옥들보다 더 큰 감옥이 보였다.

‘혹시 저기 계신가?’

헥토르는 불길한 예감에 발을 천천히 옮겼다.

그리고 칼립소의 모습을 확인하자, 곧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

흥건하게 바닥을 적시고 있는 피는 칼립소의 것이 분명했다.

살갗이 베이도록 난 채찍 자국은 참담했던 고문의 현장을 보여주었다.

거기에 배에 깊숙이 박힌 검은 그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냈다.

“폐하, 폐하!”

헥토르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어릴 때부터 힘을 타고 태어나 누구에게든 지는 법이 없었던 헥토르였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인정한 대장이었고, 황제였다.

비록 약탈품을 나누는 방식에 잠시 불만을 품었으나, 그도 칼립소의 방식이 더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찌 되었든 떠돌아다니는 방랑족에 불과한 그들을 이끌고 제국을 세우지 않았는가!

“폐하, 폐하. 흑흑.”

그때였다.

“거참, 쓸데없이 시끄럽구나.”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서 울던 헥토르가 놀라서 칼립소를 바라봤다.

“귀…… 귀신?”

그러자 칼립소가 헥토르의 머리를 팍 내리쳤다.

“가뜩이나 골이 울리는데. 정신 사납게.”

“폐하, 살……아 계신 겁니까?”

“보면 모르겠느냐?”

“폐하, 정말 괜찮으십니까?”

칼립소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괜찮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끝날 바에야, 네 목숨 줄은 끊어 놓아야지.」

확실히, 자신은 검에 찔렸다. 그것도 깊숙이.

「이건 날 비웃은 대가야.」

아직도 귓가에 안토니안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이 개운한 거지?’

칼립소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배에 손을 가져댔다.

아직도 배에는 검이 박혀 있었다.

칼립소는 자신도 모르게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폐하, 그거 함부로 빼시면 안 될 것 같은데요.”

헥토르의 발언에 칼립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깊숙이 박힌 검을 뺐을 때는 상당한 출혈이 있을 것이다.

의원이 없는 상태에서 감수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어서 나가셔서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가이아 제국의 황족 일가는 잡았느냐?”

“그건, 아직…….”

그러자 칼립소가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럼, 잡으러 가야지.”

“폐하, 폐하는 지금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치료는 나중에. 먼저, 복수부터 하고.”

“폐하!”

헥토르의 다급한 부르짖음이 들렸지만 칼립소는 재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칼립소가 멀쩡한 모습으로 등장하자, 케이타 제국의 병사들은 열광했다.

배에 검을 꽂은 채로, 칼립소는 날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위세는 성난 사자와 같았으며, 자신들의 황제가 앞장서자 케이타 제국의 병사들의 사기도 더욱 높아졌다.

‘어디로 숨었지?’

칼립소는 광포한 눈으로 오직 한 사람을 찾았다.

어차피 독 안에 든 쥐. 아직 성 밖으로 나가진 못했을 것이다. 칼립소는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며 성안 곳곳을 뒤졌다.

자신을 사지로 몬 안토니안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오로지 그의 눈은 은빛 여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감히 나를 능멸해?’

이번에는 절대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목숨 줄을 끊어 놓고 싶었다.

‘분명 비밀통로가 있을 텐데.’

칼립소는 성안에 머물면서 둘러봤던 구조를 재빨리 떠올렸다.

비상시에 그들이 피하는 통로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때 신전에서도 갑자기 사라졌었다.

‘만약 신전의 방향이라면?”

칼립소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정원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급히 사라지는 베리우스 황제의 모습을 발견했다.

칼립소는 무서운 속도로 그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막 터널로 빠져나가려는 베리우스 황제의 덜미를 잡았다.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베리우스 황제는 칼립소의 모습을 보고 놀라 굳어버렸다.

칼립소는 서서히 베리우스 황제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너머에 보이는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을 보고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칼립소 황제.”

베리우스 황제가 진정하라는 듯이 칼립소를 바라봤다.

“말씀하시죠.”

“협상이 이렇게 어긋나게 된 건 유감이네.”

“유감 표명만으로 이해하기엔 고생을 지나치게 해서요.”

칼립소의 눈이 번뜩였다.

“누가 봐도 이해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베리우스 황제가 떨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협상을 하지.”

“이 와중에 협상이라고요?”

칼립소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었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분노에 찬 칼립소의 눈을 보며 베리우스는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분명 이전보다 더 큰 것을 제시해야 했다.

“자네의 청혼을 받아들이겠네.”

칼립소가 잔인하게 웃었다.

“청혼이라. 내가 아무리 미쳤다 해도, 지금 상황에서 그딴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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