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안토니안의 명과 동시에 떨어진 엘레나의 명령에 병사들이 안토니안의 눈치를 봤다.
“뭣들 하고 있어, 그대로 묶어.”
안토니안이 다시 명령을 내리자, 어쩔 줄 몰라 하는 병사들의 행동에 엘레나가 분통을 터뜨렸다.
“안토니안, 이게 무슨 짓이야! 네 전략이라는 게 고작 이따위야?”
분노로 파르르 떠는 엘레나 앞으로 안토니안이 다가갔다.
아까 칼립소의 주먹에 맞은 입가가 기괴하게 부풀어 올라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엘레나. 나부터 걱정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당장이라도 네 목부터 베고 싶어.”
엘레나가 황녀의 신분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나, 전쟁터에서는 뛰어난 장수였고 지휘관이었다.
그 위엄에 안토니안이 몸을 움찔했다.
“제대로 돌려놓아야 할 거야.”
그 말에 안토니안이 슬쩍 웃었다.
“엘레나. 알잖아.”
안토니안이 부풀어 오른 턱을 손으로 만지면서 밉살스럽게 말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걸.”
엘레나의 얼굴은 황망하게 변했다.
“끌고 가.”
안토니안의 명에 따라 병사들은 칼립소를 끌고 내려갔다.
거구의 몸체 때문에 병사들 다섯이 모여서야 겨우 그를 데려갈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책임지려고 이런 짓을 벌인 거야?”
“적국의 성안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잘못한 거야.”
“안토니안! 이건 비겁한 짓이야.”
“널 볼모로 요구했어. 내일 협상이 결렬되면 어차피 전쟁은 시작돼.”
안토니안은 당당하게 말했다.
“엘레나, 우리가 선공을 한 것뿐이야.”
안토니안은 설득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미래의 가이아 제국은 우리가 지켜야지.”
“그래도 이건 아니야. 이건 부끄러운 짓이야.”
화해를 청하러 온 상대를 공격하다니.
엘레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우리가 그런 것을 따질 때야?”
안토니안은 벌컥 성을 내며 말했다.
“혹시 그자를 따라 볼모로 가고 싶은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글쎄. 정원에서 분위기가 좋던데.”
안토니안이 숨기지 못한 못난 마음을 드러내며 엘레나를 무섭게 노려봤다.
“그게 아니면, 협조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적국의 황제를 사로잡았는데.”
안토니안이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엘레나는 결심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안토니안과 파혼하겠다고.
그리고 그의 죄를 묻겠다고.
* * *
지하 감옥에서 칼립소는 힘겹게 눈을 떴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파 왔고, 식도는 타는 듯이 뜨거웠다.
“으…….”
갈증이 나고 목이 말랐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손을 움직여보니 강력한 족쇄가 양팔과 양다리에 묶여 있었다.
“젠장!”
주변을 찬찬히 살피자 검을 든 병사들이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칼립소는 정신을 잃기 전 엘레나에게 와인을 받아 마셨던 것을 떠올렸다.
「마셔봐요. 잘 숙성되어 맛이 괜찮을 거예요.」
‘왜 늦게 오나 했더니 정혼자와 그런 짓을 꾸미고 있었군.’ 칼립소의 입맛이 지독하게 썼다.
‘정말 단단히 여우한테 홀렸군.’
이곳에 들어온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내가 미쳤지.’
여태껏 여인에게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약하고, 보호해 줘야 하는 귀찮은 존재. 아니면 함정에 빠뜨려 남자를 망하게 하는 존재.
이 두 종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엘레나는 달랐다. 자신을 향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여인은 처음이었다.
아직도 그날의 전투가 생생했다.
은빛 머릿결을 날리며 휘두르던 검과 날듯이 가벼운 동작. 그리고 달큰한 피 냄새와 함께 부딪히던 순간들이 잊히지 않았다.
‘역시 반했나.’
지금까지 저 여인을 한 번 얻겠다고, 말이 되지 않는 짓을 너무 많이 했다.
칼립소는 여태껏 전투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앞세운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담백하다고나 할까.
언제나 이성적으로 판단했고, 합리적으로 행동했다.
그런 그에게 부하들은 존경을 표했고, 적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결국 아버지를 닮았나?’
여자에게 빠져 죽임을 당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퉤.”
칼립소는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었다.
침을 뱉었지만, 목구멍은 여전히 타는 듯이 말랐다.
‘데릭…….’
칼립소는 자신을 말리던 데릭을 떠올렸다.
자신이 이런 꼴인데 부하들은 어떤 상황인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결국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려다 부하들까지 사지에 몰았다.
자괴감이 드는 순간,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안토니안이 병사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칼립소의 부릅뜬 붉은 눈과 마주친 안토니안이 비웃듯이 웃었다.
“이제야 정신이 드나 보네요.”
안토니안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지하 감옥에 울려 퍼졌다.
“치졸한 놈, 그렇게 자신이 없나 보지?”
칼립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에 채찍이 갈겨졌다.
“아직도 상황 판단이 안 되나 봅니다.”
안토니안이 눈짓을 하자, 옆의 병사들이 계속 채찍을 내려쳤다.
끝부분에 징이 박힌 채찍은 칼립소의 두터운 살갗에도 날카롭게 상처를 냈다.
한참 동안 채찍질은 계속되었다.
가뜩이나 벌어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내 부하들은 어떻게 되었지?”
끝까지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은 채로, 칼립소가 입을 열었다.
“지금 부하들을 걱정하실 상황이 아닐 텐데.”
칼립소의 눈앞에 안토니안이 다가왔다.
“목숨이나마 부지하고 싶으면 내 말을 들어야 할 거야.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빈 다음, 성문 위로 올라가 퇴각 명령을 내려. 지금 볼모가 된 건 엘레나가 아니라 너니까.”
그 말에 칼립소가 비웃었다.
“꼴에 정혼자라고 나서기는.”
“아직도 여유가 있나 보지?”
안토니안이 검을 빼 들었다.
“다시는 검을 들지 못하게 팔부터 잘라줄까? 아니면 걷지도 못하게 발목을 절단 낼까?”
안토니안이 검으로 위협하듯 칼립소에게 다가갔다.
“내가 기절한 지 얼마나 지났지?”
칼립소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거의 반나절은 깨어나지 못했지.”
“그래?”
칼립소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내가 이곳에 오면서 아무런 대책 없이 왔을 것 같나? 난 너처럼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뭐라고?”
“거의 시간이 됐겠군.”
“무슨 말이야?”
“나한테 물을 시간에, 성문이나 확인해 봐.”
칼립소의 말이 이어질수록 안토니안의 표정이 불길하게 변했다.
“더 이상 이자가 허튼소리 못하게 채찍 맛을 보여주고 있거라.”
안토니안은 명령을 내린 후, 서둘러 지하 감옥을 벗어났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순간, 헐레벌떡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병사와 만났다.
“무슨 일이냐!”
“성문이…… 성문이…….”
“성문이 왜!”
“성문이 열렸습니다.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안토니안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뭐라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케이타 제국에서 공성탑을 가져왔습니다.”
공성탑은 이동식 망루로 탑 꼭대기에는 사수를 배치하고, 안에는 병사를 태워 성을 공격하는 장치였다.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안토니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을 때, 요란한 함성 소리가 밖에서부터 들렸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안토니안은 잠시 머뭇댔다.
“시간이 없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지금 가셔야 합니다!”
병사들의 부르짖음에도 안토니안은 다시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족쇄에 묶인 칼립소의 눈이 번들번들 빛나고 있었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나? 이곳 따위는 마음먹었으면 진작에 함락시켰어.”
“그런데 왜 그랬지?”
“봐준 거지.”
칼립소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는 그럴 마음이 없고.”
“그래, 그랬단 말이지.”
안토니안은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너네한테 끝장날 바에야, 네 목숨 줄은 끊어 놓아야지.”
“뭐?”
“이건 감히 날 비웃은 대가야.”
안토니안은 자신의 검으로 칼립소의 배를 깊숙이 찔렀다.
“헉.”
“이건 엘레나를 모욕한 죄.”
안토니안은 검을 빼서 다시 깊게 찔렀다.
솟구치는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네놈의 빌어먹을 군대가 구해주러 오기 전에 네 목숨은 끝날 거야.”
칼립소의 배에 검을 박은 채로, 안토니안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황급히 계단을 올라가던 안토니안은 엘레나와 마주쳤다.
“엘레나. 어서 피하자.”
“칼립소 황제는?”
안토니안은 피에 젖은 손을 자신도 모르게 뒤로 숨겼다.
“설마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놈을 처지하고 오는 길이야.”
“뭐라고?”
엘레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칼립소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는 지금, 그들의 황제마저 온전하지 않다면 가이아 제국의 앞날은 보장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달아나자.”
엘레나가 안토니안의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
엘레나는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어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엘레나! 이리 와. 머뭇댈 시간이 없어.”
엘레나는 그 말에도 아랑곳없이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이럴 수가.’
현장을 본 엘레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칼립소 주위에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고, 그는 이미 정신을 잃고 있었다.
황급히 그에게 달려간 엘레나가 족쇄를 풀었다.
그러나 아무 반응 없는 거대한 체구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엘레나는 다급하게 그의 얼굴을 두드렸다. 하지만 이미 핏기가 가신 얼굴은 미동조차 없었다.
‘이대로는 가망이 없어. 어떻게 하지?’
엘레나는 잠시 고민했다.
‘만약 이대로 칼립소가 죽는다면?’
그렇게 생각을 하는 순간, 가슴 속에 무언가가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가 생각났다. 비록 고문은 당했지만, 결국 풀어주지 않았는가.
「고마워요. 전장에서 만나면, 한 번쯤은 당신도 봐줄게요.」
잠시 고민하던 엘레나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힘껏 깨물었다. 그러자 붉은 선혈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치유의 능력은 엘레나가 태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었던 능력이었다. 어릴 때부터 모험을 좋아했었던 엘레나는 금방 넘어지고, 깨지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깜짝 놀랄 정도로 금방 아물었다.
그걸 알기에 부모님도 엘레나가 사고 치는 것을 어느 정도 묵인해주기도 했다. 어차피 상처가 나도 금방 아물곤 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피가 특별하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제발, 효험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