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20화 (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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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겠어요?”

엘레나의 권유에 칼립소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럼, 간단히만 마시도록 해요. 먼저 가세요.”

엘레나는 시녀에게 칼립소의 안내를 맡겼다.

그러자 칼립소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안토니안과 잠깐 이야기할 게 있어서 그래요. 먼저 가세요.”

아무래도 셋이 한자리에 있기 전에 안토니안과 말을 맞추고 함께 하는 것이 나았다.

이런 외교적인 문제를 갑자기 이야기하는 안토니안이 불만스러웠지만, 워낙 시간이 촉박하니 그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엘레나의 제안에도 칼립소는 움직이지 않았다.

‘뭐를 보는 거지?’

칼립소의 눈빛은 아까부터 엘레나의 허리에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엘레나의 허리를 잡고 있는 안토니안의 손에 향해 있었다.

그의 눈빛을 의식하자, 엘레나는 새삼 안토니안의 손길이 거북했다. 아무리 정혼한 사이지만, 평소에는 거의 스킨십이 없다시피 했었다.

‘오늘 왜 하필 허리를 잡아서는.’

엘레나가 불편한 듯 몸을 비틀려 하자, 안토니안이 엘레나의 허리를 더 꼭 안았다.

‘왜 이러는 거야.’

하지만 밀쳐내면 그 모습이 더 우스울 것 같았다.

엘레나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곧 따라갈게요.”

한참을 바라보던 칼립소가 갑자기 커다란 몸을 먼저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화난 듯이 보였다.

‘내가 안내하지 않아서 결례라고 생각하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안토니안과 아무런 이야기 없이 갈 수는 없었다.

“어서, 안내해드려.”

엘레나의 눈짓에 시녀가 재빠르게 달려갔다.

하지만 속도도 줄이지 않고 성큼성큼 걷는 탓에 시녀는 거의 뛰듯이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칼립소가 사라지자, 엘레나는 허리에 감긴 안토니안의 손을 냉정하게 쳐냈다.

단호한 엘레나의 손짓에 안토니안은 두 손을 들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무슨 짓이야?”

날카로운 엘레나의 말에 안토니안은 멈칫했다.

“엘레나.”

“갑자기 허리는 왜 잡아?”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엘레나의 사나운 눈짓을 보고 안토니안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그자에게 우리가 사이 좋아 보이는 게 더 좋잖아.”

엘레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갑자기 이 밤에 와인은 또 뭐야?”

“아, 그거?”

안토니안의 입매가 비틀렸다.

“말 그대로야. 내일 협상 전에 어느 정도 합의를 해 두면 좋을 것 같아서.”

“전략은 있어?”

안토니안은 잠시 갈등하는 듯 이마를 찌푸렸다.

‘말할까?’

짧은 갈등이 스쳐 갔으나 안토니안은 입을 다물었다.

말하면 엘레나의 성격상 하지 못하게 할 것이 분명했다.

“전략도 없이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는 거야?”

엘레나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하자 안토니안은 더욱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지속되고, 엘레나의 눈이 추궁하듯 다가왔다.

“그냥 본격적인 협정 전에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차원에서…….”

“그거라면 이미 연회를 통해 한 거잖아.”

“엘레나, 지금 상태라면 내일 협정이 긍정적일 거라고 예상해?”

안토니안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엘레나도 선뜻 답하지 못했다.

“만약 내일 협정이 어긋나면 다시 전쟁이 시작될지도 몰라. 그거 감당할 수 있겠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안토니안도 보는 눈이 있었다.

협정이 결렬되고, 다시 케이타 제국의 맹공이 펼쳐진다면 가이아 제국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무리한 수를 쓰는 것이다. 속절없이 당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오늘 밤 우리 쪽에서 전략 회의부터 제대로 하는 게 낫지 않아?”

그러자 안토니안이 빙긋 웃었다.

“걱정 마. 엘레나. 전혀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니까.”

이번엔 안토니안이 엘레나의 허리가 아니라 어깨를 두드렸다.

“난, 네 남편이 될 사람이잖아. 믿어줘.”

“그럼, 먼저 말해 봐.”

“그러기엔 좀 시간이 없어. 엘레나. 케이타 제국 황제를 계속 기다리게 할 거야?”

안토니안이 엘레나를 몰아붙였다.

“믿고 맡겨줘.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깜빡. 안토니안의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맑고 투명한 안토니안의 초록빛 눈은 사람들을 곧잘 믿게 했다.

“무리한 발언은 하지 마.”

“당연하지, 어디까지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자는 거야.”

“알았어.”

엘레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엘레나.”

“응?”

“내 편에 서줄 거지?”

“무슨 소리야? 내가 설마 케이타 제국의 편에 서겠어? 다만 신중하자는 거야.”

“알았어. 이만 가자. 너무 많이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안토니안은 엘레나보다 앞서서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칼립소는 미리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많이 기다렸죠?”

예의 바르게 물으며 다가오는 엘레나를 칼립소는 조용히 지켜봤다.

그녀의 옆에는 안토니안이 서 있었다.

다만 아까보다 나은 것은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지 않았다는 정도였다.

“뭐, 별로.”

칼립소가 괜찮다는 듯이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이 시간까지 날 붙잡아 두었으면, 뭔가 그에 합당한 제안을 하겠지.”

그러자 안토니안이 활짝 웃으며 나왔다.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당신 제안은 그다지 마음에 들 거 같지 않은데?”

칼립소가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이런, 황제께서는 저보다 엘레나를 좋아하나 봅니다.”

안토니안이 엘레나를 바라봤다.

“엘레나. 케이타 제국 황제께 드릴 와인은 네가 드려야겠어.”

안토니안이 와인병을 엘레나에게 건넸다.

‘무슨 짓이야.’

엘레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속삭이듯 안토니안에게 말했다.

아무리 비공식적인 자리지만 황녀에게 와인을 따르게 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났다.

“날 마음에 안 들어 하시잖아.”

엘레나는 안토니안을 잠시 원망스럽게 본 후, 칼립소에게 다가갔다.

칼립소가 와인잔을 들자, 엘레나는 우아한 동작으로 와인을 따랐다.

“영광이군.”

칼립소가 눈썹을 찡긋하며 엘레나를 바라봤다.

“마셔봐요. 잘 숙성되어 맛이 꽤 괜찮을 거예요.”

가이아 제국의 와인은 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게다가 안토니안이 가져온 와인은 그중에서도 최상품이었다.

“고맙소.”

칼립소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건배하시죠.”

안토니안이 잔을 들어 살짝 부딪히자, 칼립소는 와인잔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 순간, 칼립소는 눈살을 찌푸렸다. 식도로 넘어가는 와인의 맛이 이상했다.

‘이게 무슨 맛이지?’

분명 좋은 품질이라 했는데 입이 심하게 썼다.

‘뭐지?’

와인이 넘어간 식도가 타오르듯 홧홧했다.

자신을 지켜보는 안토니안의 시선이 기분 나쁘다고 느꼈을 때, 칼립소는 눈앞이 핑그르르 도는 것을 느꼈다.

‘설마?’

칼립소의 붉은 눈이 한껏 일렁이다 눈 앞에 불꽃이 작열했다.

전신으로 퍼지는 기분 나쁜 감각은 이것이 평범한 와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줬다.

“빌어먹을, 엘레나!”

칼립소는 거친 손길로 와인잔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파편이 튀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이아 제국의 병사들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칼립소는 한껏 찌푸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감히 이따위 짓을 하다니!”

뚜벅뚜벅 엘레나에게 걸어가는 그를 안토니안이 잡았다.

팍.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칼립소가 안토니안을 간단히 메다꽂았다.

“으…….”

또다시 뒤에 달려드는 안토니안의 턱을 칼립소의 주먹이 그대로 내려 갈겼다.

“안토니안!”

칼립소의 주먹에 나동그라지는 안토니안을 보고 놀라 엘레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들이 칼립소 주위를 둘러싸며 검을 꺼내 들었다.

“멈추지 못하느냐!”

엘레나가 막으러 가려 했으나 순식간에 둘러싸인 병사들에 의해 길이 막혔다.

“안토니안!”

“엘레나, 먼저 공격한 건 저쪽이야.”

안토니안이 피가 맺힌 입가를 닦으며 비열한 표정으로 말했다.

반면 칼립소는 주변의 병사들에 의해 포위되다시피 했다.

“재미있군.”

칼립소가 옆에 있던 와인병을 내리쳐 깼다.

거친 동작으로 깨진 와인병을 검같이 들며 병사들과 맞서기 시작했다. 고작 와인병을 든 칼립소 앞에서 검을 들은 병사들이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수없이 둘러싼 병사들을 간단히 젖히며 어느새 칼립소가 엘레나의 앞까지 다가왔다.

피가 뚝뚝 흐르는 와인병을 든 그의 모습이 잔인해 보였다.

“엘레나, 깜찍한 짓을 했어.”

칼립소가 잡을 듯이 엘레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 기세에 놀라 엘레나가 움찔 뒤로 물러섰다.

“잠깐, 내 말부터 들어봐요.”

엘레나는 이 사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때 점점 다가오던 칼립소의 커다란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나선 거대한 몸이 그대로 엘레나를 향해 엎어졌다.

쓰러진 그를 본 엘레나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이제야 약효가 도나 보군. 지독한 놈.”

어느새 정신 차린 안토니안이 칼립소 뒤에 섰다.

“약이라니. 안토니안, 그게 무슨 말이야!”

엘레나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자, 안토니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서 의원을 불러야겠어.”

엘레나가 황급히 일어나서 나가려 하자, 안토니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럴 필요 없어.”

“무슨 짓을 한 거야? 설마…….”

아무 대답 없는 안토니안의 얼굴은 긍정을 말하고 있었다.

“드하야 즙이야.”

“뭐?”

드하야 즙이라면 한 방울만 마시게 해도 하루 내내 죽은 듯이 잔다고 했다. 용량이 지나치면 죽을 수도 있는 극강의 약물이었다.

그런데 그걸 사용했다고?

“얼마나 사용한 거야?”

엘레나의 말에 대답을 피한 안토니안이 병사들에게 명했다.

“여봐라. 이자를 묶어라.”

안토니안의 말에 병사들이 달려들어 칼립소의 사지를 결박했다.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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