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목숨이 위험한 자리에 보내신 분이에요. 아마 폐하는 끝까지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들 거예요.”
“그렇다고 폐하의 허락 없이 거사를 치르자는 거냐?”
“어차피 끝이 좋으면 좋은 일이에요. 오늘 그자의 요구에 폐하의 안색이 굳어진 거 보셨잖아요?”
그 말에 하를 공작도 잠잠해졌다.
“우리가 이를 계기로 이번 전쟁에서 승기를 잡으면 폐하께서도 당연히 칭찬하시겠죠. 게다가 전 엘레나와 혼인할 텐데요. 엘레나는 다른 이와 혼인할 수 없어요. 신탁의 계시도 있었잖아요.”
안토니안의 자신의 붉은 머리를 쓸었다.
“그래서,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냐?”
아버지의 말에 안토니안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드하야 즙을 먹일 생각이에요.”
안토니안은 손안의 드하야 즙이 든 병을 들여 보였다.
“이걸 먹으면 죽은 듯이 잠들 수밖에 없어요. 그런 다음 한밤중에 습격하는 거죠.”
“뭐라고?”
“적국의 황제가 우리 성안에 잡혀있으면 그들도 우리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안토니안, 위험한 일이야.”
어찌 되었건 화친 협약으로 들어온 황제이다.
그런 황제를 비겁한 수로 노린다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차피 엘레나가 케이타 제국으로 끌려간다면, 우리에게도 미래가 없어요. 엘레나의 여동생 아리엘이 서열 1위로 올라갈 수도 있고요.”
그 말에 하를 공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려서부터 검 쓰기를 좋아하고 밖에서 기사 생활을 했던 엘레나와 달리 아리엘은 궁 안에서 생활하며 황녀의 역할을 도맡아 했다.
차분하고 명석한 아리엘은 평판이 좋았으며, 아리엘의 약혼자인 필립은 개국공신의 핏줄이었다.
안토니안이 엘레나와 혼인하지 못한다면?
아니, 혼인을 하더라도 엘레나가 서열순위에서 밀린다면?
그럼 황위를 차지하려는 꿈도 영영 멀어지게 되었다.
“아버지, 시간이 없어요.”
하를은 잠시 생각하는 듯이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드하야 즙의 효과는 확실한 거냐?”
“걱정 마세요.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깨어나지 못할 테니까.”
“어떻게 먹일 작정이냐?”
“저에게 계획이 있어요.”
안토니안의 눈이 반짝였지만, 하를 공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계획이냐?”
“산책을 갔다 오면 와인을 권할 겁니다.”
“이 밤에 칼립소 황제가 그걸 쉽게 마시겠냐?”
하를 공작이 나무라듯 말하자, 안토니안의 눈빛이 야비하게 빛났다.
“엘레나에게 권하게 해야죠. 아마 엘레나가 권하면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안토니안이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렇겠지.”
그 말에 하를 공작도 수긍했다.
오늘 연회 자리에서만 봐도 그가 엘레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케이타 제국 황제는 아직 황녀님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
“그러니까요. 감히 야만족 주제에.”
안토니안의 기분은 그래서 더 좋지 않았다.
칼립소가 엘레나를 볼모로 요구했을 때, 그 눈빛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그건 분명히 사내가 여인을 보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엘레나가 나서줘야 나중에 일이 잘못되어도, 폐하께선 저희 편에 서실 겁니다.”
“하긴 그렇지.”
엘레나가 함께 엮여 있으면 베리우스 황제도 자신들을 탓하진 못할 것이다.
하를 공작은 한층 가벼워진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황녀님이 나서줄까?”
“그건 저한테 맡겨주세요.”
안토니안은 자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엘레나는 강한 듯 보여도 은근히 정에 약한 구석이 있었다. 자신이 부탁하면 그녀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드하야 즙을 탄다는 것까진 말할 수 없겠지만.
* * *
어느새 엘레나와 칼립소는 꽃향기가 그윽한 정원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어느 정도 설명이 끝나자, 엘레나도 말이 없었고 칼립소도 향기에 취한 듯이 조용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엘레나는 궁금한 듯 칼립소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정원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피곤한가?’
하긴 계속해서 전장에서 참여하고 연회까지 즐긴 후였다.
이쯤해서 산책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한 엘레나는 성안으로 들어오는 길로 안내했다.
“피곤할 텐데 이제 들어가서 쉬세요.”
엘레나의 말에도 칼립소는 아무 말이 없었다.
성문이 다가오자 엘레나는 인사를 할 준비를 했다.
“그럼, 이만 저도 들어가 볼게요.”
엘레나는 예를 갖추고 물러날 참이었다.
그때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칼립소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엘레나.”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말에 엘레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엘레나의 눈과 칼립소의 눈빛이 마주쳤다.
“정말 케이타 제국으로 올 생각이 없소?”
“그 대답은 이미 했을 텐데요. 하지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평화로운 외교협정은 약속할게요. 좋은 기술자와 예술가들을 선별해서 보낼 거예요. 그러면 케이타 제국에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깟 놈들이 와서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칼립소는 별로 관심 없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깟 놈들이라니!’
그걸 원해서 전쟁까지 했으면서.
엘레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인내하며 천천히 말했다.
“케이타 제국은 이제 막 위세를 넓혀가니까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제국의 기틀을 잡으려면 신경 쓸 게 한두 개가 아니죠.”
“신경 쓰이는 건 그게 아냐.”
엘레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칼립소를 바라봤다.
또다시 칼립소의 눈빛은 타오르듯 불타 있었다.
그 눈빛이 버거워 엘레나가 시선을 피하자 칼립소는 작게 한숨 쉬더니 답답한 듯 말했다.
“협정을 맺고, 평화가 찾아오면 그자와 혼인은 할 거요?”
“어릴 때부터 정해진 혼사예요. 당연히…….”
“그놈의 빌어먹을 정혼자.”
그 말에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아, 거칠었다면 사과하지. 내 눈에는 영 시원치 않게 보여서.”
전혀 미안하지 않은 말투로 칼립소가 말했다.
엘레나는 그런 그를 천천히 관찰했다.
뭔가 이상했다.
“혹시, 날 좋아해요?”
그 말에 절대로 피할 것 같지 않았던 칼립소의 눈이 황급히 엘레나의 눈을 피했다.
심지어 살짝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
그 모습을 보니 엘레나는 더욱 수상했다.
처음에는 욕정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무언가 갈망하는 것 같았다.
아니겠지. 설마, 저 전쟁에 미친 자가 날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말도 안 돼.
“물론 아니겠지만…….”
“내 대답에 따라 당신 선택이 바뀔 여지가 있소?”
칼립소의 붉은 눈이 일렁였다.
그 열기가 지나쳐 이번에는 엘레나가 눈을 피했다.
“하도 나한테 집착하기에 궁금해서 그런 거예요.”
“내가 미쳤다고…….”
“하긴,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엘레나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다만, 후회는 되지.”
“후회라니요?”
후회라는 단어와는 생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후회된다고 말하니 엘레나는 의아했다.
“이왕 이렇게 될 거였으면, 그때 안아보기라도 할걸.”
엘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런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나.
엘레나는 수치심으로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러자 칼립소가 그녀에게 한걸음 다가왔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내려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딱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그때 일은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지난 일로 나를 모욕하진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모욕이라.”
왠지 씁쓸한 목소리가 밤공기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엘레나는 더욱 냉정하게 말했다.
“내일 협정엔 좀 더 이성적인 제안이 오고 갔으면 좋겠어요. 분명 양국에 이득 될 합의가 있을 테니까.”
“서로에게 이득 되는 합의란 없소. 어느 방법이든 한쪽이 다치게 되지.”
“적어도 피를 덜 흘리는 방법은 있겠죠.”
엘레나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안내는 이 정도 했으면 된 것 같네요. 들어가죠.”
“마무리가 별로군.”
칼립소의 말에 엘레나가 발끈했다.
“이 정도면 안내로는 충분했어요.”
“본디 안내란 받는 자가 만족해야 하지.”
어느새 칼립소가 엘레나의 옆에 서서 말했다.
정원을 거닐 때 감돌던 따뜻한 분위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서늘한 밤공기보다 냉랭한 분위기로 둘은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안토니안이 성문 앞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안토니안?”
엘레나가 부르자, 안토니안이 자연스럽게 엘레나에게 다가왔다.
평소 안토니안이 작은 키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칼립소의 옆에 있으니 그가 꽤 왜소해 보였다.
“엘레나. 기다리고 있었어.”
안토니안은 자연스럽게 엘레나에게 다가갔다.
엘레나의 허리에 올리는 안토니안의 손이 천연덕스러웠다.
안토니안은 당연한 듯 엘레나의 허리를 끌어 거의 안다시피 하며 칼립소를 바라봤다.
“산책은 잘 끝내셨습니까?”
안토니안의 말에 칼립소가 못마땅한 눈초리로 말했다.
“아름답긴 하더군.”
다소 애매한 표현에 안토니안도 형식적인 웃음을 보였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뭔가?”
“가이아 제국에 좋은 와인이 있어서 엘레나와 함께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엘레나는 당황해서 안토니안을 바라봤다.
“안토니안, 밤이 늦었어. 케이타 제국의 황제께서도 쉬고 싶어 하실 거야.”
“엘레나, 아직 밤은 길어. 내일 협상 전에 비공식적으로 논의해도 좋잖아?”
안토니안의 말에 엘레나는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분명 아까 정원에서는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마무리가 별로군.」
이대로 내일 아침이 밝는다면, 협상은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분명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의 기분을 돌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엘레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