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18화 (18/100)

18

칼립소의 말에 베리우스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증표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가이아 제국에서 제대로 된 이행을 하는지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칼립소의 눈이 엘레나에게 향했다.

죽음 같은 정적이 연회장에 흘렀다.

“무슨 뜻이요? 알아듣게 구체적으로 말해보시오.”

무거운 침묵 끝에 칼립소의 입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믿을 만한 사람을 볼모로 보내주시죠.”

“볼모라니.”

베리우스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 그럼 저희가 어떻게 가이아 제국을 믿고 군대를 철수하겠습니까?”

베리우스 황제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당장이라도 협상테이블을 엎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면…… 누구를 말인가.”

“가이아 제국 제1황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칼립소의 미소가 짙어진 반면 베리우스 황제의 표정은 창백해졌다.

“지금 내 딸아이를 볼모로 보내라는 건가?”

칼립소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해 주시죠.”

“그건, 무리한 요구요.”

베리우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베리우스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만약 정 볼모를 보낸다면 제1황녀인 엘레나가 아닌 제2황녀인 아리엘을 보내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엘레나에 비해 한없이 여린 아리엘을 생각하면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좀 전에 보내기로 한 예술가들을 더 많이 보내도록 하겠소. 만 오천 명 정도면 되겠는가?”

“아니요. 볼모를 보내지 않으면 협약은 없던 일로 하지요.”

“하지만…….”

“그러지 말고 황녀에게 물어보시죠. 이런 일은 무엇보다 본인 의사가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칼립소는 대놓고 엘레나를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칼립소의 눈이 엘레나를 향했다.

약속한 것이 있지 않냐는 듯이.

“본인이 가기 싫다고 하면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것이오?”

베리우스 황제가 곤란한 듯이 물었다.

“일단, 물어보시죠.”

칼립소가 느긋하게 엘레나를 바라보며 술잔을 들었다.

“엘레나, 너의 뜻은 어떠냐?”

베리우스 황제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엘레나에게 물었다.

궁 안의 시선이 모두 엘레나에게 향했다.

출렁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였고, 고개를 오만할 정도로 치켜들어 위엄이 빛났다.

엘레나는 칼립소를 향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거절합니다.”

명백한 거부에 칼립소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치사하군. 그렇게 안 봤는데.’

소리로 나오진 않았으나, 칼립소의 입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거리낌 없이 말을 이었다.

“제가 볼모로 간다면, 양국은 평등한 입장이 될 수 없지요. 지금 화친을 하러 온 거지 지배를 하러 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엘레나의 말에 칼립소가 풋, 하고 웃었다. 잠시 웃던 칼립소가 곧 차가운 표정으로 엘레나를 향해 물었다.

“협정은 기본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황녀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이아 제국은 신뢰를 깨뜨리지 않습니다.”

그 말에 칼립소는 묘한 표정으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일단, 그렇군요.”

칼립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는데 협정은 내일로 미루죠.”

“그러시겠소?”

베리우스 황제는 곤란한 상황을 피한 것에 내심 반가워하며 일어났다.

“편히 묵을 수 있는 침소를 준비해 놓았으니, 쉬시오.”

“감사하군요.”

칼립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전에 잠시 성안을 산책하고 싶은데, 황녀님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부탁에 베리우스 황제는 당황했다.

하지만 본디 황녀의 역할에는 외교 활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른 국가의 황제가 방문했을 때, 엘레나가 그 역할을 맡곤 했다.

그렇다면 허락을 해도 될 텐데, 왠지 선뜻 승낙하기가 껄끄러웠다.

“아바마마,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베리우스 황제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엘레나가 말했다.

덕분에 고민하던 베리우스 황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볼모 제의를 거절했으니, 안내 정도는 맡겨도 될 것 같았다.

“그럼, 예법에 어긋나지 않게 잘 안내해 드리거라.”

“네, 아바마마.”

엘레나는 베리우스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칼립소를 응시했다.

“따라오시죠.”

그 말에 칼립소는 산뜻하게 일어나 엘레나의 뒤를 따랐다.

그들 뒤로는 칼립소의 호위 기사와 엘레나의 시녀들이 줄줄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 * *

성안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각종 조각품과 꽃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고, 달빛도 은은하게 비추어 더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정원이 꽤 아름답군.”

칼립소의 말에 엘레나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은 총 열 개의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각 정원마다 이름이 붙어 있지요. 이곳 정원의 테마는 ‘믿음’이에요.”

“참 어울리지 않네.”

“네?”

“당신과 말이오.”

칼립소가 무심하게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뻔뻔한 거 같던데.”

“무슨 뜻이죠?”

“모르는 척하는 것도 수준급이고.”

칼립소가 허리를 굽혀 엘레나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다가오는 큰 체구에 엘레나가 긴장하여 뒤로 멈칫 물러났다.

순식간에 보호하듯 시녀들이 엘레나의 곁으로 한걸음 다가왔다.

엘레나가 손짓하자, 다시 시녀들이 원래대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칼립소의 입매가 비웃듯이 슬쩍 올라가더니, 커다란 손으로 엘레나의 등 뒤에서 파란 꽃을 땄다.

“스칼렛 펌퍼넬이군.”

“이 꽃을 아나요?”

의외라는 듯이 엘레나가 물었다.

“독성이 있어서 위험하지만, 한편으로는 약초로 쓸 수 있지.”

엘레나가 놀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칼립소가 꽃잎을 하나씩 따서 흩트렸다.

“이 꽃의 꽃말은 약속인데, 꽃의 주인은 약속을 안 지키는군.”

칼립소의 눈빛이 찌르듯이 날카로워졌다.

“분명히 다시 잡히면, 순순히 따르겠다고 했던 거 같은데.”

“잡힌 건 아니잖아요.”

그 말에 칼립소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엘레나는 약간 양심에 가책이 들었지만, 무시하고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전장에서 맞서 싸워 진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화친하러 칼립소가 직접 왔으니, 이건 잡힌 게 아니다.

“싸워서 진 게 아니잖아요.”

승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한 엘레나를 칼립소는 차분하게 바라봤다.

어느새 그의 손에 든 꽃은 꽃잎이 다 뜯겨 볼품없어 보였다.

“꽃을 꺾으면, 잠시 아름다움을 갖지만.”

칼립소는 그 꽃을 정원 한가운데로 던졌다.

“곧 망가져버리지.”

“그러니까 꽃은 보는 거예요. 꺾는 게 아니라.”

나무라듯 말하는 엘레나를 보고 칼립소가 빙긋 웃었다.

“나름 예의를 갖춰 데려오려 했는데, 아쉽게 됐군.”

“다시 전쟁을 시작할 건가요?”

엘레나가 긴장하는 말투로 물었다.

“그러길 바라오?”

엘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 상태에서 다시 전쟁을 시작한다면 패배는 자명했다.

“이왕 협정을 시작한 거 좋은 쪽으로 매듭지어요.”

“우선 정원을 거닙시다. 당신 말대로 아름다운 곳이니.”

칼립소가 긴 다리로 성큼 걸어가자, 엘레나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넓은 정원을 거니는 동안 엘레나는 열심히 그에게 설명했다. 엘레나가 말하는 것을 칼립소도 귀 기울여 듣는 듯했다.

간혹 그의 시선은 정원보다는 그녀에게 머물렀지만, 엘레나는 설명하느라 그의 진한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다.

“가이아 제국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아요. 전쟁이 없으면 아름다움은 계속 지켜질 거예요.”

“그렇군.”

“다음에 방문할 때는 여기보다 더 아름다운 곳도 소개해 줄게요.”

화해를 바란다는 듯한 그녀의 미소에 칼립소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달빛은 찬란했고, 꽃향기는 그득한 밤이었다.

* * *

엘레나가 칼립소 황제와 함께 나가자 안토니안은 초조해졌다.

“감히 엘레나에게 안내를 부탁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케이타 제국 때문에 혼인이 무산되어 심사가 뒤틀려 있던 차였다.

“게다가 거기서 탈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볼모로 요구하다니요? 아버지, 이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안토니안의 말에 하를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해. 듣는 귀가 많아.”

“이대로 놔두시면 내일 또 그 작자가 무슨 요구를 할지 모른다고요.”

“그건 내일이 되어 봐야지.”

안토니안의 얼굴이 수상하게 빛났다.

그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오늘 밤이 기회예요. 그자를 처리하려면 오늘 밖에 기회가 없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하를 공작이 펄쩍 뛰며 말을 막았다.

“상대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그렇다고 그냥 무사히 밤을 보내게 하실 거예요? 어차피 내일 협정이 무산되면 전쟁을 재개할 거라고요.”

“협정을 잘하면 평화가 올 수도 있어.”

“오늘 요구하시는 거 보셨잖아요.”

안토니안은 흥분으로 씩씩거렸다.

“오늘은 제안으로 그쳤지만, 내일은 또 협박을 할 수 있다고요. 최악의 경우에는 엘레나가 강제로 볼모로 끌려갈 수도 있다고요!”

안토니안의 외침에 하를의 표정도 어둡게 변했다.

설마하니 다시 황녀의 문제를 언급할 줄은 몰랐다.

그때 청혼을 거절하면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감히 엘레나를 볼모로 요구하다니 안토니안은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 엘레나는 서열 1위 황녀예요. 그런 그녀가 볼모로 끌려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엘레나가 볼모로 끌려간다면, 안토니안 역시 같이 케이타 제국으로 가거나, 아니면 가이아 제국에서 그녀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 밤이 기회예요.”

“먼저 폐하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하를 공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폐하께서 아버지를 적진으로 보내신 걸 보지 않으셨어요?”

그 말에 하를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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