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17화 (1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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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가 빙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전시 중입니다. 사신단을 통해 화친 협약을 먼저 맺는 것이…….”

“하를, 그렇지 않으면 화친 협약은 없소.”

칼처럼 자르는 칼립소의 말에 하를 공작의 얼굴은 또다시 창백해졌다.

“성문을 여시오. 설마 그 정도도 못 하는 거요? 그렇다면 사신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칼립소는 잔인한 미소를 띠며 검을 만졌다.

그러자 하를 공작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만약 성문을 열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를 공작은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자, 일어나시오. 하를.”

하를 공작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안내하시오.”

칼립소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 * *

하를 공작 일행이 성문에 당도하자, 가이아 제국은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를 공작 뒤에는 케이타 제국의 군사들이 그득했기 때문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저건 케이타 군대 아닌가.”

“우리를 치러 들어온 것인가.”

상황을 알지 못하는 가이아 본성에서는 혼란스럽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협상을 하러 보낸 하를 공작이 인질이 되어 돌아온 사실에 대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굳게 잠긴 성문은 열리지 않았고, 가이아 본성에서는 공격을 해야 할지 말지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자 황급히 하를 공작이 말에서 내려 먼저 성문에 다가갔다.

“폐하, 문을 열어주소서. 이들은 화친 협약을 맺으러 온 것입니다.”

하를 공작의 전언에도 가이아 본성은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케이타 제국 황제가 직접 오다니 어찌하는 것이 좋겠소?”

베리우스 황제도 당황한 낯빛이 역력했다.

“성문을 열면 안 됩니다. 그 기회를 보아 저들이 공격을 할 것입니다.”

“폐하, 하를 공작님께서 그들의 인질이 되진 않았을 겁니다. 화친을 하려면 하를 공작님을 믿고 성문을 열어야 합니다.”

대신들의 갑론을박에 베리우스 황제의 얼굴이 고민에 휩싸였다.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지만, 이것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때, 랑베르 백작이 나서서 말했다.

“기회라니?”

“적국의 황제입니다. 그가 우리의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니, 받아들여도 될 것 같습니다. 일단 들어오게 하고 화친 협약을 맺으면 우리 쪽에서 유리한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화친 협약을 맺으러 온 만큼, 무기와 군사는 두고 오게 하소서.”

베리우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문을 열라. 단, 인원은 최소로 하고 무기는 들이지 못하게 하라.”

베리우스 전언을 케이타 제국 쪽에서 받아들이자, 성문이 활짝 열렸다.

“잔치를 준비해라.”

가이아 본성에서는 보기 드문 큰 연회가 준비되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희망에 성안 사람들에겐 흥분이 흘렀다.

성문이 열리자 하를 공작과 함께 칼립소 황제의 행렬이 함께 들어왔다.

“어서 오시죠.”

깍듯하면서도 경계 어린 가이아 사람들의 눈빛을 받으며 칼립소가 성안으로 들어섰다.

칼립소는 천천히 가이아 본성을 둘러보았다.

성 밖의 백성들은 고초를 겪는 것에 비해 본성은 여전히 화려하고 평화로웠다.

“폐하를 맞이할 연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데릭이 칼립소의 옆에서 말했다.

“이곳은 전시 같지 않군.”

“아무래도 본성이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지나치게 평화로워.”

칼립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칼립소 일행이 도착하자, 순식간에 성대한 연회가 준비되었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케이타 군사들이 놀랄 정도로 화려한 연회였다.

가이아 제국에서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급한 쪽은 가이아 제국이었다.

연회가 준비되자, 베리우스 황제는 예를 갖춰 칼립소 황제를 맞았다.

지난 청혼선물을 보낼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진작 초대를 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오시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입에 발린 말에 칼립소는 형식적인 인사 대신 딱딱하게 본론을 말했다.

“화친을 원하신다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대로 계속 전쟁을 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피해가 되지 않습니까?”

‘서로에게?’ 그 말에 칼립소는 잠시 실소를 흘렸다.

지금 승기는 누가 봐도 케이타 제국 쪽에 있었다.

이번 화친은 가이아 제국에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서로의 요구 조건이 맞아야겠지요.”

“우린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베리우스 황제는 담담하게 말했다.

케이타 제국의 무력을 인정했다.

이대로 전투를 계속하면 잃는 것이 많은 쪽은 가이아 제국이었다.

적당한 수준에서 그들의 요구 조건을 들어 준 이후에 평화를 되찾고 싶었다.

다만 그 요구 조건이 너무 많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먼저, 연회를 즐기시죠. 가이아에서의 연회는 처음이지 않습니까?”

베리우스 황제의 말에 화려한 무희들이 등장했다.

신명 나는 음악과 함께 수준 높은 공연들이 펼쳐졌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서 협상을 원활하게 이끌어갈 목적인 것이 눈에 잘 보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무희의 춤에도 칼립소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은 성안의 사람들을 집요하게 하나하나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이.

* * *

엘레나는 성문에 들어서자 미묘한 활기를 느꼈다.

엘레나가 돌아오자, 시녀 이자벨이 서둘러 달려 나왔다.

“분위기가 왜 이렇지?”

들떠 있었고, 심지어 전시 중인데 흥겨운 음악 소리까지 들렸다.

“황녀님, 지금 연회가 벌어지고 있어요.”

“연회라니?”

“케이타 제국 황제께서 오셨거든요.”

“뭐라고? 직접 이곳에 왔다고?”

“네! 우리와 화친 협약을 맺으러 왔대요.”

“화친?”

“이제 지긋지긋한 전쟁은 끝이에요, 황녀님. 그리고 정말 무시무시하게 잘생기셨어요.”

이자벨이 흥분한 목소리로 엘레나에게 말했다.

미쳤군. 아직 평화 협약이 체결되지도 않았는데 직접 왔단 말인가.

엘레나는 그 의중을 알고 싶어 황급히 음악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세상에! 황녀님, 이러시고 가시려고요?”

“왜?”

이자벨이 엘레나의 복장을 훑어봤다.

“설마 이 차림으로 연회에 참석하시겠다는 건 아니지요?”

이자벨의 곤란한 표정을 보니 엘레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군복 차림 그대로 연회장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화친 협약을 맺기 위한 연회이지 않는가.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어야 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엘레나는 궁금증을 억누른 채 이자벨에게 이끌려 방으로 들어갔다.

이자벨은 진주가 달린 화려한 드레스를 꺼냈다.

“황녀님의 위엄을 보여주셔야죠.”

“꼭 그래야 해?”

이런다고 그자가 황녀의 위엄 따위를 알아줄 리가 없었다.

“앉으세요.”

그리고는 반짝이는 엘레나의 은발부터 천천히 풀어 헤쳤다.

“언제봐도 황녀님은 정말 아름다우세요. 이런 아름다움을 가리시는 건 너무한 거예요.”

이자벨은 엘레나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빗었다.

그러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정돈되면서 주변까지 환해지도록 빛이 나는 듯했다.

“어머, 눈부셔라.”

다이아몬드 머리 장식을 하고, 진주가 가득 박힌 드레스까지 입자 엘레나의 모습은 황녀로서 완벽해졌다.

“이제 가서, 우아한 기품으로 야만족의 콧대를 눌러주세요.”

준비를 끝낸 엘레나는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연회는 한창이었고, 중간중간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분위기는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연회장에 엘레나가 들어서자, 단번에 그녀 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베리우스 황제가 자랑스러운 시선으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엘레나, 인사드려라. 케이타 제국에서 화친 협약을 맺으러 왔다는구나.”

엘레나가 인사하자, 그때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칼립소의 눈이 반짝였다.

“황녀님과 전 이전부터 인연이 있지요.”

그 말에 베리우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를 무사히 보내줘서 고맙게 생각하오. 청혼을 받아드리지 못한 것은 어릴 때부터 정혼자가 있어서 그런 것이니 괘념치 말길 바라오.”

베리우스 황제가 지난 일을 언급하며 정리하려 했다.

혹시나 다시 한번 그가 청혼에 관해 언급하면 그 또한 곤란한 일이었다.

“지난 일은 잊으시죠.”

칼립소가 깔끔하게 말하며, 베리우스 황제 대신 엘레나를 바라봤다.

“저야말로 황녀님의 혼인 예식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말투로 칼립소가 말했다.

“뭐, 그거야 다시 올리면 되는 거니 염려 마시오.”

베리우스 황제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평화협정을 맺으면 대대적으로 다시 혼인식을 열 생각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화친 협약에 관해 논의하도록 하죠.”

칼립소의 말에 베리우스 황제가 긴장했다.

“먼저 요구 조건을 말해 보시오.”

“우선 저희는 가이아 제국의 예술성을 높이 삽니다. 가이아 제국 최고의 건축기술자, 화가, 음악가, 과학자를 매년 만 명씩 케이타 제국에 보내주십시오.”

베리우스 황제의 미간이 좁혀졌다.

“우리 가이아 제국에서 예술가들은 자긍심이 높소. 아무리 국가에서 강권한다고는 하나, 그들이 순순히 가줄지는…….”

“그들을 제대로 대우할 것입니다. 물론 합당한 금액도 제시하고요.”

“알겠소. 그거면 되겠소?”

생각보다는 쉬운 협상이었다.

물론 천금 같은 자신의 나라의 기술자들과 예술가들을 그냥 보낼 생각은 없었다.

특히 건축 분야는 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케이타 제국에서 탐내는 것이 당연했다.

허나 그들의 수준을 감히 케이타 제국에서 어찌 알겠는가.

대충 일류가 아닌, 이류와 삼류 중에서 보내면 그만일 것이다.

“일단 교류는 그것으로 시작하는 걸로 하고, 우리에게 군사를 물릴 만한 증표를 보내주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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