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14화 (14/100)

14

전쟁에 나가자는 말에 안토니안의 표정이 굳었다.

“내 말이라면 허락하지 않으시겠지만, 네 말이라면 다르니까. 네가 말하면 부모님께서도 허락하실 거야.”

“그럼 넌 혼인 후에도 전쟁터에 나서겠다는 거야?”

안토니안이 다소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안토니안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엘레나, 혼인 후에는 전쟁터에 나가는 거 말고 할 일이 많을 거야.”

“나도 황녀의 의무는 잘 알고 있어.”

가이아 제국에서는 여성이 황위를 이을 수 없다. 때문에 좋은 신랑감과 혼사를 맺어 아들을 낳아야 했다.

또한 나라 안의 행정적인 일에도 관여해야 했다.

“안다면, 이제 전쟁 따위는 나한테 맡겨.”

엘레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

“엘레나.”

“황녀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야. 다만 이번 전쟁만큼은 꼭 참여하고 싶어.”

안토니안의 얼굴이 고민에 휩싸였다.

“엘레나.”

“만약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혼인은 없어.”

“휴, 왜 이렇게 전쟁에 집착하는 거야?”

“안토니안, 내 성격 알지? 내가 안 하겠다고 결심하면, 아무리 부모님이라도 날 강제로 혼인식에 집어넣을 수는 없을 거야.”

엘레나는 차갑게 말했다.

“좋아. 그럼, 나도 조건이 있어.”

그에 맞서듯 안토니안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뭔데?”

엘레나가 불안한 얼굴로 안토니안을 바라봤다.

“네가 검을 잡는 건 이번 케이타 제국과의 전쟁이 마지막이야.”

“안토니안!”

“약속하지 않으면 나도 네 뜻대로 해 줄 수 없어.”

“안토니안, 넌 나를 이해해 주는 줄 알았어.”

“혼인 전 잠깐일 줄 알았어.”

엘레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혼인을 하면 기사 생활을 못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자신을 이해해 주는 안토니안과 혼인한다면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안토니안까지 이렇게 나오자 왠지 서글퍼졌다.

“그 약속 없이는 전쟁터에 못 보내.”

“……알았어. 그렇게 할게.”

엘레나가 마지못해 대답을 하자, 안토니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았어.”

“안토니안, 그럼 최대한 서둘렀으면 좋겠어. 당장 내일이라도 혼인을 올리고 싶어.”

그 말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터로 향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안토니안은 미간을 좁혔다.

“내일 당장 혼인을 하는 것은 말도 안 돼. 일단 준비만도 한참 걸릴 거고.”

“안토니안. 시간이 없어. 그런 절차 따윈 다 생략하자고.”

“노력은 해볼게.”

안토니안이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나는 그제야 숨을 가다듬었다.

* * *

엘레나의 결심이 서자 혼인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좀 급하긴 하지만 이렇게 마음을 돌려서 정말 기쁘구나.”

엘리자베스는 투덜대면서도 혼인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고 싶다고 안토니안이 어찌나 사정을 하던지, 안토니안은 얼굴도 잘생겼으면서, 어쩌면 그렇게 로맨틱하기까지 하니?”

엘리자베스는 흐뭇하게 웃으며 엘레나를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갖출 건 갖춰야지. 황실에서의 첫 혼사야. 게다가 넌 제1황녀고. 이렇게 성급하게 할 수는 없어.”

“어마마마. 전 그냥 빨리 식을 올리면 좋겠어요.”

“안 돼. 황실은 국민들의 모범이 되어야지. 최대한 빠르게 서두를 테지만 적어도 세 달은 소요될 거야.”

“세 달이라고요? 그건 말도 안 돼요.”

“아니, 얘가……. 그래, 알았다. 안토니안이 하도 빨리 혼인을 하겠다고 조르니 한 달 정도로 앞당겨 보마.”

“제발요, 한 달도 길어요. 그런 의식이 뭐가 중요해요?”

“중요하다마다. 휴, 엘레나. 너에게 가르칠 것이 한두 개가 아니구나.”

엘리자베스는 엘레나의 손을 꼭 잡았다.

어려서부터 검에 재능을 보이는 것이 신기하여 그대로 놔둔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진작 잡아매서 이것저것 가르쳤어야 하는데.

어차피 혼인 이후에는 제 마음대로 살 수 없으니, 정혼자의 허락도 있겠다 마음껏 살라 했더니 이런 사달이 나고 말았다.

“엘레나, 혼인 후에는 지금처럼 지내면 안 돼.”

엘레나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서둘러 시간이 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녀에게는 마지막 전투였다.

무엇보다 엘레나는 목숨을 걸고 그자와 승부를 내고 싶었다.

“이제야 어미도 안심이다. 너도 그동안 미뤄두었던 예법 공부 좀 다시 하고.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리거라.”

엘리자베스가 나가자, 엘레나는 조용히 한숨 쉬었다.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당장 내일이라도 케이타 제국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보란 듯이 맞았다.

비가 그치고 날이 좋아지자, 칼립소의 군대는 출병했다.

* * *

어느 때보다 높은 사기를 자랑한 칼립소의 군대는 무차별적으로 가이아 제국을 침공했다.

칼립소는 제일 앞 선봉에 서서 군사들을 이끌었다.

황제가 앞에 서면 안 된다는 데릭의 간청도 칼립소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날카로운 검을 휘두르며 가는 칼립소의 주변에는 수북하게 시체가 쌓였다.

“찾아라.”

칼립소의 목적은 하나였다.

벌써 하나의 성을 점령한 칼립소의 군대는 빠르게 가이아 제국의 중심부를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가이아 제국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케이타 제국이 강하다고는 했지만, 이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였다.

천년의 전통을 가진 자신들의 나라가 이리 흔들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야만족의 청혼이라 하며 오만하게 돌려보낸 것이다.

하지만 반인반마나 다름없이 말을 타고 자유롭게 칼을 휘두르는 야만족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동맹국들의 원조 요청에도 오만하게 바라보던 가이아 제국은 막상 겪은 케이타 제국의 위력 앞에 놀라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본궁에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엘레나의 혼인도 바로 앞당겨졌다.

원래라면 긴 준비 기간과 축제와 더불어 진행될 행사였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의식도 전쟁 앞에서는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

“어서 빨리 혼인을 서두르고, 안토니안을 출병케 하시오.”

베리우스의 명에 따라 엘레나의 혼인식은 바로 거행되었다.

이 혼인식을 마치면, 안토니안을 선봉으로 반격에 나설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케이타 제국 따위야 금세 제압할 거라 생각했다.

전쟁으로 변방은 고통받고 있었지만 엘레나의 결혼식은 다른 세상인 양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수천 개의 촛불이 신전 안을 밝혔으며, 화려한 꽃이 온 신전에 가득했다.

신전들은 하객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연주 소리는 하늘 높이 울렸다.

예식이 끝나면 하늘 높이 날려 보낼 비둘기들도 만 마리 이상 준비되어 있었다.

예식 준비가 차질없이 진행되는 가운데, 하얀 실크드레스를 입은 엘레나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아요.”

시녀들은 입을 모아 엘레나의 미모를 칭송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은 잘 손질되어 내려오고 있었고, 다이아몬드와 하얀 레이스로 장식된 실크드레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인 엘레나는 당장이라도 실크드레스를 벗어 버리고 싶을 만큼 조급했지만.

‘도대체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엘레나는 실크드레스 대신 갑옷을 입고 싶었다.

검을 들고, 말을 타고, 바람을 가르며, 칼립소와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갑옷 대신 코르셋이 숨 막히게 허리를 졸라맸고, 거추장스러운 실크드레스는 발밑을 지나 한참이나 길게 늘어져 있었다.

게다가 두꺼운 면사포에 가려진 얼굴은 식이 끝날 때까지 절대 고개를 들지 말아야 했다.

‘휴. 제발 빨리 끝나길.’

엘레나는 서둘러 의식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베리우스의 손에 이끌려 천천히 신전 앞으로 걸어가는 순간조차 참을 수 없이 지루했다.

그때였다.

우르르 쾅! 요란한 천둥소리와 비슷한 것이 바닥을 울렸다.

분명 먹구름 하나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그런데 천둥이라니!

‘무슨 일이지?’

엘레나는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들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를 어기도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으악!”

입구에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순식간에 신전은 군마에 의해 짓밟혔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검은 망토를 두른 칼립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히이잉.

신전에 들어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 그를 보고 병사들이 달려와 막았지만, 그가 휘두르는 칼에 맥없이 떨어져 나갈 뿐이었다.

베리우스는 그 기막힌 광경에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엘레나는 황급히 면사포를 걷어 던졌다.

옆의 병사에게 검을 달라고 손짓하자, 병사는 황급히 엘레나에게 검을 던졌다.

하지만 그나마도 칼립소가 휘두르는 검에 맞아 엘레나의 손에 닿지 못했다.

어떻게든 검을 향해 달려가는 엘레나의 앞길을 다시 칼립소의 검이 막았다.

먹잇감을 잡은 듯 느긋하게 노려보는 칼립소의 입매가 잔인하게 번뜩였다.

“엘레나. 잡히지 말라고 했잖아.”

칼립소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엘레나의 목 근처로 가져갔다.

“무슨 짓이냐?”

그제야 신전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안토니안이 서둘러 나섰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칼립소가 비웃듯이 안토니안을 바라봤다.

안토니안의 앞길을 칼립소의 병사가 막았으나, 칼립소의 눈짓 한 번에 그대로 길을 열어줬다.

하지만 안토니안의 검은 칼립소의 발끝에도 가지 못했다.

거슬린다는 듯이 칼립소가 휘두르는 검에 의해 한 번에 나가떨어져 버렸다.

그 압도적인 차이에 신전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공포로 뒤덮였다.

칼립소의 타는 듯한 붉은 눈이 다시 엘레나에게 향했다.

“엘레나, 기껏 시간을 줬더니.”

이제 칼립소는 엘레나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는 흰색의 눈부신 실크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봤다.

“이러고 있으면, 내가 정말 화나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