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13화 (1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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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안은 칼을 내려봤다.

자르르 흐르는 윤기며, 짐승임에도 총기 어린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 말은 어떻게 얻은 거야?”

“빌린 거야.”

엘레나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고 말에 올라탔다.

그녀의 예상대로 하루를 꼬박 달려왔음에도 칼의 속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충분히 쉬었던 안토니안의 백마보다도 속도가 빨랐다.

“엘레나, 좀 천천히 가.”

안토니안의 외침에도 엘레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칼립소를 생각하면 마음이 급했다.

‘칼립소…….’

갑자기 그자의 얼굴이 떠오르자, 엘레나는 생각을 떨치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중에 그를 잡게 되면, 그가 그랬듯이 자신도 기회를 주면 그뿐이었다.

* * *

하루를 꼬박 달린 결과, 엘레나와 안토니안은 드디어 본성에 도착했다.

본성에 도착하자마자 엘레나는 칼부터 챙겼다.

“칼을 잘 살펴봐 줘.”

연이틀을 무리하게 달린 말이 걱정되어 엘레나는 마부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그런 엘레나의 태도를 수상쩍게 보았지만, 안토니안은 더 이상 별말을 하지 않았다.

“엘레나, 무사했구나.”

엘레나의 귀환 소식을 듣고 베리우스가 감격해서 마중 나왔다.

“아바마마.”

엘레나는 눈물이 글썽대며 울컥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살아생전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줄 알았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베리우스는 엘레나의 등을 위로하듯 두드렸다.

“이제는 고생이 다 끝났다. 어서 들어가자.”

“네. 아바마마.”

부모님을 무사히 만난 안도감이 사라지자, 엘레나는 마음이 급했다.

한시라도 빨리 출병 허락을 얻어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아직까지 별다른 소식이 없는 것을 보아 그쪽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엘레나.”

성안에 들어가자 이번에는 어머니인 엘리자베스와 동생 아리엘이 뛰쳐나왔다.

“언니.”

“아리엘.”

엘레나가 아리엘의 가녀린 어깨를 껴안았다.

“괜찮은 거예요?”

“그럼, 아리엘. 걱정 많았지?”

“언니가 무사히 돌아오실 거라 믿었어요.”

아리엘은 엘레나를 꼭 끌어안았다.

자매의 상봉을 지켜보던 엘리자베스는 눈물을 흘렸다.

천성이 섬세하고 유약한 그녀는 엘레나를 만나고도 믿어지지 않는 듯이 몇 번이고 엘레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그래도 이렇게 무사하다니. 다 안토니안 자네 덕분이야.”

다소 의아한 그녀의 발언에 엘레나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안토니안 덕분이라니?’

그러자 안토니안이 바로 말을 받았다.

“천만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걸요. 그럼, 엘레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세요. 전 물러나 있겠습니다.”

안토니안이 재빨리 물러나자, 엘레나는 베리우스를 바라봤다.

“아바마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말하거라.”

“케이타 제국에서 곧 공격을 시작할 겁니다.”

“케이타 제국에서? 왜지?”

그 말에 엘레나가 오히려 당황했다.

“그쪽에서 청혼을 한 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하지. 야만족의 청혼 따위를 받아들일 것 같으냐? 건방진 것들. 그 죄로 우리가 혼내주면 혼내줬지 감히 공격을 한다고?”

‘아무리 본성에만 계셨다지만 전력에 대한 기본적인 파악이 되지 않으신 건가?’ 엘레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차분히 말을 이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저희도 군대를 정비해서 선공에 나서야 합니다.”

그 말에 베리우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얘야, 그건 이제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아바마마, 저도 가이아 제국의 장수입니다.”

그때, 엘리자베스가 끼어들었다.

“엘레나, 이제 전쟁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그리고 다시는 검을 잡지 말거라.”

“그래, 이 이상 네 목숨이 위험한 것을 두고 볼 수가 없단다.”

베리우스의 말에 엘레나는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고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엘레나. 이제 황녀 신분으로 돌아오도록 해라.”

“아바마마.”

엘레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베리우스를 바라봤다.

“네가 장수로서 훌륭한 줄은 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어. 이제는 그 직함을 내려놓도록 해라.”

“아바마마, 이번만큼은 제가 직접 선봉에 나서겠습니다. 그것이 제 할 일입니다.”

베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할 일은 따로 있다.”

베리우스의 말에 이어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었다.

“엘레나, 이번 기회에 우리도 느끼는 바가 컸어. 안토니안과도 이야기를 마쳤다.”

“무슨 이야기를요? 그리고 제 문제를 왜 안토니안하고 이야기를 합니까?”

“그건 당연하지. 너와 정혼한 사람 아니냐?”

“어마마마.”

엘레나는 답답한 마음에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지금 케이타 제국에서는 우리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가하게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그까짓 야만족 따위가 뭐가 무섭단 말이니?”

엘레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바라봤다.

“그런 건 남자들에게 맡기고 오늘부터는 혼인 준비나 하자꾸나.”

“혼인이라뇨?”

엘레나는 점점 기가 막힌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바라봤다.

아무리 궁에서 곱게 지내신다고 하지만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모르다니.

“쯧쯧. 네가 혼인을 하지 않고 천방지축으로 다니니까 그 야만족이 주제도 모르고 청혼하는 것 아니냐?”

엘리자베스는 오만하게 말했다.

“케이타 제국은 강한 나라입니다. 함부로 볼 만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봤자 야만족이지.”

“어마마마.”

“그동안은 우리가 봐줘서 그렇지. 제대로 맞섰다면 그깟 야만족 따위는 위협 거리조차 못 돼.”

“그렇게 쉽게 볼 상대가 아닙니다.”

“오! 아가, 이제 넌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지금부터는 어미 곁에서 혼인 준비에만 신경을 쓰도록 해라.”

일방적인 대화에 엘레나의 얼굴은 답답해졌다.

정말 케이타 제국의 위세를 모른단 말인가. 그렇게 자신 있다면 수많은 동맹국들의 도움 요청은 왜 그렇게 외면했는가.

엘레나는 마음이 급했다.

전심으로 다잡고 상대해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이러고 있는 시간도 아까운데, 혼인이라니.

“혼인은 그렇게 급한 게 아닙니다.”

“아니, 이보다 급한 게 없다. 그동안 네가 죽을지도 몰라서 안토니안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몇 번이고 적진에 뛰어들겠다는 것을 내가 겨우 말렸다.”

‘그렇게 걱정되면 말린다고 주저앉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엘레나는 냉소적인 생각이 들었으나 차마 말로 뱉지는 못했다.

“만약에 엘레나, 네가 죽기라도 해봐. 혼인도 못 한 안토니안 입장은 어떻게 되겠니? 황가와 인연을 맺었다는 이유로 다른 신부도 맞이하지 못하고, 조용히 늙어가야 하지 않니? 부마 자리를 확실히 해 두어야 안토니안도 뜻을 펼칠 것 아니니. 그리고 너도 어서 후사를 보아야지.”

그 말에 엘레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안토니안이 너한테 어떻게 했니? 네가 그렇게 방황하며 돌아다니는 것도 다 눈감아 주지 않았니? 다른 사내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제 방황은 그만하고, 돌아와서 황녀의 의무를 행하렴. 그럼 우리나라도 더 찬란하게 발전할 거야. 케이타 제국 같은 것은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신탁의 내용을 잊은 건 아니지?”

엘레나는 속이 답답해졌다.

그동안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운 것은 방황한 것이고, 결혼은 황녀의 의무를 행하는 고귀한 일이라니.

하지만 신탁을 걸고 말하자, 더 이상의 대꾸를 하기 힘들었다.

“엘레나, 그렇게 할 거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레나는 결국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 * *

엘레나가 밖으로 나오자 안토니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짐작하는 얼굴이었다.

“안토니안. 너도 알고 있는 거지?”

“혼인 이야기 말이야? 언젠가는 올리기로 약속한 거잖아.”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엘레나, 전쟁 생각은 하지 마. 어차피 케이타 제국에서 그렇게 쉽게 공격할 수는 없어.”

“어떻게 확신해?”

“우리 군대를 우습게 보지 마. 케이타 제국도 속으로는 우리를 두려워할 거야.”

엘레나는 고개를 숙였다.

뭔가 단단히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혹시…….”

안토니안이 엘레나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나와 혼인하기가 싫은 거야?”

“아니야. 그런 건.”

엘레나는 안토니안의 눈을 피했다.

“다만, 난 걱정이 돼서 그래.”

“무슨 걱정?”

엘레나가 불안한 눈으로 안토니안을 바라봤다.

“정말 모르겠어? 케이타 제국은 강해. 우리가 전력으로 맞서 싸워도 모자랄 상대야.”

부모님이야 황궁에 계셔서 실정을 잘 모른다고 해도 안토니안은 달랐다.

전장에 나서 본 경험이 있는 그는 케이타 제국의 무서운 실체를 알 것이다.

“엘레나, 네가 무슨 걱정을 하는 줄 알아. 하지만 우리 군대 역시 강해.”

“그러면 왜 안 왔어?”

“그건…….”

안토니안이 말을 더듬었다.

“귀족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어. 알잖아. 우리 의견을 취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 그렇다고 누구 한 사람의 의견이라도 무시할 수는 없는 거고.”

‘한마디로 탁상공론만 했다는 이야기군.’ 엘레나는 조국의 민낯에 점점 실망감이 들었다.

“그보다 엘레나, 혹시 혼인을 망설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안토니안이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에 엘레나는 왠지 어색함을 느껴 딱 그만큼 물러섰다.

“아니야.”

“그럼 됐어.”

“그래. 안토니안, 혼인식을 올리자. 대신 조건이 있어.”

엘레나는 진지하게 안토니안을 바라봤다.

안토니안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

“조건이 뭔데?”

“혼인식을 최대한 빨리 간소하게 올리자.”

“빨리 올리는 건 동의하지만 간소하게는 못해. 넌 제1 황녀잖아. 게다가 한 번뿐인 혼인식이고.”

“안토니안, 빨리 간소하게 울리고, 같이 출병하자.”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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