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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12화 (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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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밤새도록 계속 이어졌다.

성안에서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칼립소의 행방을 놓고 말들이 많았다.

데릭은 이런 소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쩐지 그 은빛 여우가 성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더 많아졌다.

캄캄한 밤중. 데릭은 진정되지 않는 마음으로 초조하게 성문 앞에서 칼립소를 기다렸다.

생각 같아서는 병사들을 끌고 칼립소를 찾으러 가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칼립소의 성미에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다.

지금으로서는 얌전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 밤 산책이라니?’

은빛 여우를 다정하게 안고 나가는 칼립소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게다가 비까지 오다니.’

비가 오는 날에 칼립소의 성미는 유난히 날카로워졌다.

데릭은 진정되지 않는 마음으로 뚫어지게 앞만 노려봤다.

긴 시간이 지나고, 동이 틀 무렵, 드디어 칼립소의 모습이 저편에서 드러났다.

“폐하.”

데릭이 서둘러 나가 칼립소를 맞았다.

“괜찮으십니까?”

칼립소의 몸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한 손에는 여우 몇 마리가 들려 있었다.

“사냥을 하신 겁니까?”

칼립소는 여우들을 바닥에 툭 던졌다.

“역시 쉽게 잡히는 것들은 재미가 없어.”

여우들을 내려놓자, 뒤에 있던 병사들이 달려와 사냥물을 가지고 돌아갔다.

칼립소는 피곤한 듯이 걸음을 옮겼다.

“폐하, 어찌 된 일입니까? 왜 혼자 돌아오시는 겁니까?”

“놓쳤다.”

“네? 놓치다니요?”

“…….”

“폐하!”

“비가 그치면 찾으러 간다.”

칼립소는 담담하게 말했다.

“설마…… 가이아 제국으로 보내셨단 말입니까?”

그 말에 칼립소는 더이상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듯이 지나치려 했다.

“칼은 어디에 두시고요? 설마 같이 보내셨습니까?”

칼립소의 주변에는 말이 보이지 않았다.

칼은 칼립소가 전장에서 늘 함께했던 명마였다. 그런 말을 칼립소가 두고 올 리가 없었다.

아니 어딘가 두고 오더라도 칼은 칼립소의 자취를 따라 돌아올 명마였다.

‘설마, 그 말을 은빛 여우에게 주었다는 건가?’

데릭은 칼립소가 돌아온 방향을 돌아봤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폐하.”

“데릭, 피곤하다.”

“폐하. 혹시 은빛 여우가 폐하께 수상한 짓이라도 했습니까?”

데릭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짐이…….”

칼립소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놓쳤다고 하지 않았느냐?”

칼립소는 데릭을 향해 단호하게 말한 후 더는 아무 말도 않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 * *

혼자 돌아온 칼립소를 두고 성에서는 말이 많았다.

특히 각종 전투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던 헥토르 장군의 불만이 높았다.

“그 여우한테 단단히 홀리신 것이 분명해. 처음부터 이상했어. 포로에게 황후의 자리를 준다고 하질 않나.”

“그래도 가이아 제국의 황녀잖아.”

지략가이자 비교적 침착한 편인 윌리엄 장군이 냉정하게 말했다.

“난 폐하의 결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가이아 제국과 협력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도 나쁠 게 없으니까.”

“아니야. 그냥 홀리신 게 분명하다니까. 그 여우 눈빛 봤어? 사내라면 홀리게 되어 있다고. 거기다 그 머리카락 하며. 한번 품어보고 싶게 만든다니까.”

“조용히 해.”

데릭은 헥토르의 입을 단속시켰다.

“에이,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폐하도 은빛 여우를 황후로 올리려고 한 거고요.”

윌리엄이 헥토르의 팔을 잡아당겼다.

“됐어. 헥토르. 어차피 없었던 일이야. 가이아 제국에서 거부했으니, 우리가 이번 기회에 정복하면 그만이야. 어차피 이제 동맹은 물 건너갔어.”

“약골 주제에 감히 폐하의 청혼을 거부해? 가이아 제국 따위 쓸어버리자고.”

“그래, 그러니까 은빛 여우가 황후가 될 일은 없어.”

“당연하지, 노예면 몰라도.”

헥토르가 킥킥대며 웃었다.

“가이아 제국 여인들은 예쁘겠지?”

헥토르는 금세 기대감에 젖은 듯이 말했다.

“헥토르, 쓸데없는 생각은 말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한다고 해? 그렇지 않아도 폐하의 명 때문에 건드리지도 못할 텐데.”

그렇지 않아도 그런 면에 있어서 헥토르는 불만이 많았다.

원래 발 빠르고 용맹한 헥토르는 용병으로서 누구보다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제일 먼저 선발대에 섰고, 그런 만큼 약탈품도 많이 가져갔다.

하지만 칼립소가 황제에 오르면서 개인적인 약탈을 금지시켰다.

공평한 분배를 위해서 내린 조치였다. 선착순으로 약탈을 한다면 선봉대를 선 군사들만 지나치게 많이 가져가게 되고, 뒤에서 전쟁을 준비한 사람들은 얻는 것이 조금밖에 없었으니까.

칼립소가 개인적 약탈을 금지시키자, 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에게까지 공평한 분배가 돌아갔고, 그것은 칼립소의 군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헥토르처럼 앞장서서 전쟁을 즐겼던 장수들은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차마 칼립소에게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해도 속마음에 생긴 불만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비가 그칠 때까지 조용히 해. 지금 폐하의 성미를 건드려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

“알아. 딴이 그렇다는 거지.”

안 보이는 데서는 제법 떠들지만, 헥토르는 칼립소를 진정으로 두려워했다.

아니, 케이타의 장수들이라면 누구나 다 칼립소를 경외했다. 그것이 칼립소가 이들을 이끄는 힘이었다.

데릭은 장수들의 대화를 보며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은빛 여우가 들어오고 난 후부터 성안이 편안하지 못했다.

‘찾으러 가신다니?’

데릭은 점점 머리가 아파왔다.

이번 전투에서도 아마 칼립소는 은빛 여우를 죽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아마 또 어떻게 하든 생포하려 하시겠지.’

자신의 애마인 칼에 태워 보낸 것만 하더라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또다시 반복인가.’

데릭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케이타 제국은 제국의 기틀을 잡고, 강대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이런 불필요한 혼란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 전투에서 어떻게 하든지 그녀의 목숨을 끊어 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일로 설사 칼립소의 진노를 산다고 하더라도 계속되는 두통거리는 애초에 제거하는 편이 나았다.

* * *

날이 밝을 때까지 쉬지 않고 칼을 몰아댄 덕에 엘레나는 겨우 국경 부근에 다다를 수 있었다.

검은 말이 국경 부근에 다다르자, 정체 모를 인물을 발견한 가이아 병사들이 긴장했다. 하지만 곧 나부끼는 은색 머리카락을 보고 병사들이 뛰어왔다.

“황녀님.”

그녀를 본 병사들이 순식간에 그녀를 에워쌌다.

“잘들 지냈는가?”

“황녀님! 어떻게 되신 겁니까?”

“일단 들어가자.”

“탈출하신 겁니까?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다.”

엘레나는 위엄있게 병사들을 둘러봤다.

“다들 별일 없었지?”

“저희는 황녀님이 걱정이 돼서…….”

병사들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고 엘레나가 오히려 토닥거렸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지켜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라.”

엘레나는 담담하게 말하며 안으로 향했다. 엘레나가 막사에 들어가 있는 동안, 병사들은 서둘러 안토니안에게 소식을 전달했다.

“엘레나.”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들은 안토니안이 서둘러 엘레나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덥석 안았다.

“안토니안.”

엘레나는 순간 굳어서 그를 바라봤다.

어릴 때부터 정혼한 사이였지만, 그와는 육체적 접촉을 한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온몸을 다 껴안는 자세는 매우 불편했다.

“엘레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안토니안이 굳어버린 엘레나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힘껏 껴안으면서 말했다.

“그 야만인한테 끌려가서 얼마나 고초를 겪은 거야?”

안토니안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 엘레나는 오히려 그를 다독였다.

“이거 좀 놔줘.”

“싫어. 이젠 절대로 안 놓쳐”

안토니안은 더욱 강하게 엘레나를 붙잡았다.

“안토니안, 답답하다고.”

“아.”

그제야 아쉽다는 듯이 안토니안이 떨어져 나갔다.

“다친 곳은 없는 거지?”

안토니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엘레나를 훑어봤다.

“알잖아. 다치더라도 금방 회복되는 거.”

가이아 제국에서도 황족에만 흐르는 치유의 피.

그중에서도 엘레나의 능력은 극상이었다.

“그래도 아픔은 느꼈을 거 아니야.”

“그 정도는 괜찮아.”

“엘레나.”

안토니안은 걱정스러운 듯이 엘레나를 바라봤다.

“혹시 다른 일을 당한 건 아니지?”

“다른 일이라니?”

엘레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자 이번에는 안토니안이 시선을 피했다.

“아니야. 어쨌든 무사하게 돌아왔으면 됐어.”

“아까 말, 무슨 뜻이야.”

“됐어. 상관없다고. 네가 무슨 짓을 당했든지 내가 다 감수할 테니.”

마치 봐준다는 말투에 엘레나는 해명하고 싶은 생각보다는 오히려 모욕감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니, 안토니안의 시선이 이전과 달리 불편했다.

엘레나의 기분이 이상해질 즈음에 안토니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셔.”

그 말에 엘레나는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하루빨리 부모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엘레나도 간절했다.

거기다 전쟁을 준비하려면, 무엇보다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져야 했다.

“그래, 어서 출발하자.”

“좀 쉬어야 하지 않아?”

부모님이 계신 본성으로 가려면 지금부터 하루를 다시 꼬박 달려야 했다.

“아니, 지체할 시간이 없어. 바로 가자.”

“정말 괜찮겠어?”

안토니안이 재차 만류해도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말은 바꾸는 게 좋을 텐데.”

“그냥 이 말을 타고 갈 거야.”

“지쳐서 제 속도를 못 낼 거야.”

안토니안의 걱정에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하루 칼을 타면서 느낀 확신이었다. 칼은 보통의 말과는 달랐다.

“괜찮아. 어떤 말보다도 빨리 달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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