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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의 뒷모습을 보고 칼립소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엘레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칼립소는 소리 내서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의 표정이 어리둥절하게 변할 때까지 칼립소의 웃음은 끝나지 않았다.
‘역시 재미있어.’
당당하던 그녀가 ‘벌’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달아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그 와중에서도 고고한 자세는 잊지 않았다.
칼립소는 허리까지 꺾으며 신나게 웃다가 멈췄다.
이렇게 크게 웃은 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 * *
침실로 돌아온 엘레나는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자신이 기절시킨 병사는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말끔한 얼굴로 경례를 하는 바람에 도리어 움찔하게 만들었다.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황급하게 문을 잠갔으나, 시선은 여전히 문에 향해 있었다.
언제 들이닥쳐서 자신을 끌고 나갈지도 몰랐다.
‘어떻게 하지? 또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려나?’
불안한 마음에 엘레나는 침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 동작에 풍성한 은발 머리카락도 그녀의 동작에 따라 흔들렸다.
엘레나는 성가신 마음에 틀어 올린 머리를 냉큼 풀어버렸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어깨에 감기자, 아까보다는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좀 더 신중했어야 했어.’
엘레나는 섣불리 탈출을 감행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하더라도 좀 더 신중하게 도모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안 오지?’
기다리는 내내 마음은 더 불안해졌다.
‘올 거면 빨리 올 것이지. 혹시, 그냥 넘어가려는 건가?’
제발 그러길 바랐지만, 그간 겪어본 칼립소의 성미로는 뱉은 말을 안 지키고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러면 빨리 데리고 가든지, 이렇게 유예하는 것이 더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은데.’
엘레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다시 내려가 따지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심신이 피로했던 그녀는 침대로 가서 누웠다.
‘혼인이라니.’
그것도 자신을 고문한 케이타족의 황제와의 혼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엘레나는 팔을 이마로 올렸다.
‘방심하면 안 되는데.’
분명 벌을 내리겠다고 했으니 그냥 넘어가진 않을 테지만,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가기엔 지독하게 피로한 날이었다.
어느새 엘레나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 * *
기분 좋게 서재에서 정무를 보던 칼립소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데릭이 들어오더니 뜻밖의 사실을 전한 것이다.
“엘레나에게 정혼자가 있다고?”
“네.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정해졌던 사이라고 합니다.”
데릭의 말에 짜증이 난 듯 칼립소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그런데 자신의 정혼녀를 전쟁에 내보내? 머저리 같은 놈.”
칼립소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나왔다.
“그런 놈이라면 애초에 상대할 가치도 없지.”
칼립소의 입가에 느긋한 미소가 어렸다.
“바르고 훌륭한 청년이라고 합니다.”
“쳇.”
데릭의 말에 칼립소가 실소했다.
“예술이나 좋아하는 샌님이 아니고?”
칼립소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누군데?”
“가이아 제국의 개국공신 가문인 하를 공작가의 장남입니다. 훌륭한 기사로 평판은 좋은 편입니다.”
그 말에 칼립소의 이마가 불끈거렸다.
“그런 이유로 가이아 제국에서 폐하의 청혼을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탁.
칼립소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히, 내 청혼을 거절했다고?”
“네, 폐하. 게다가 비밀리에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두 사람은 신탁의 계시로 이어진 사이라고 합니다.”
“신탁?”
“은빛 여우는 태어날 때부터 신탁을 받은 유일무이한 제1황녀입니다.”
“신탁의 내용이 무엇인데?”
“정확한 내용은 황가만 아는 비밀이라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가이아 제국에서는 절대로 이 혼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칼립소의 표정이 굳자, 데릭이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폐하. 가이아 제국은 포기하시고, 르시아 제국의 공주와 혼인하십시오. 가이아 제국보다 훨씬 이득이 있는 국가입니다. 만일 르시아 제국과 혼인을 맺는다면 가이아 제국은 스스로 우리 발밑에 엎드릴 것입니다.”
“……케이타 제국이 르시아 제국의 도움을 받을 정도냐?”
데릭이 간절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폐하, 쉬운 길을 두고 왜 어려운 길로 가십니까?”
“쉬운 길은 재미가 없어.”
“폐하, 오늘도 그분께선 탈출을 감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칼립소의 입이 무겁게 닫혔다.
“처음 말씀하신 대로 처형하심이 마땅하다 생각됩니다.”
그 말에 칼립소의 눈썹이 꿈틀댔다.
“짐의 명을 무시하는 건가?”
무섭게 가라앉은 말에 데릭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데릭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머리를 더욱 깊게 숙였다.
“정 그러하시면 첩으로 들여 취하심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데릭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여자에 대해서 집착은커녕 관심도 없었던 주군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잘 알기에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칼립소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여자였다.
하지만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다. 방금 전 탈출 소식도 아찔하지 않았는가.
단순한 사랑싸움으로 포장했다고는 하지만 데릭은 그 실체를 대번에 간파했다.
은빛 여우는 애초에 황후가 될 마음이 없었다. 그런 여자를 황후로 만드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이제 갓 제국으로 발돋움한 케이타 제국에서는 현명하고 부드러운 황후가 필요했다. 황제와 같이 피 흘려 싸울 장수들은 케이타 제국에는 넘쳐흘렀다.
황후는 칼을 들 필요도 없었고, 들어서도 안 되었다.
더구나 은빛 여우는 정혼자까지 있는 몸이었다.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데릭은 가이아 제국의 거절이 누구보다 반가웠다.
고고한 가이아 제국이 혼사를 안 내켜 할 줄은 어느 정도 짐작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협상을 하며 시간을 끌 줄 알았다. 단칼에 거절해주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데릭.”
“네, 폐하.”
“내가 예의를 차려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칼립소가 야만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폐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저 한 번 취하심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때였다.
갑자기 목덜미에 파고드는 거친 손길에 데릭의 팔이 허공을 상대로 휘저어졌다.
칼립소의 단단한 손이 대번에 데릭의 목을 조여 왔다.
“다시 한번 말해봐.”
말은 다시 한번 말하라고 했으나, 데릭은 뻔히 알았다. 다시 그 말을 입에 담으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
“송……구합니다. 폐하.”
“다시 말해보래도.”
칼립소의 붉은 눈이 타오르듯 빛났다.
“짐이 이미 말했잖아. 황후로 삼겠다고. 그런데 뭐라고?”
“하지……만, 가이……아 제국에서…….”
칼립소의 손아귀에 힘이 더해졌다.
“짐의 명보다 가이아 제국의 명을 따를 셈이냐?”
이제 데릭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래질 지경이었다.
“어떻게 말해야겠나?”
“허…… 헉.”
데릭의 숨소리가 가팔라졌다.
“알잖아, 내가 인내심이 별로 없는 거.”
“전……쟁을 준……비하심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 말에 칼립소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풀었다.
급하게 숨을 헐떡거리며 데릭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러게 말이야, 예의를 갖출 때 따라주면 얼마나 좋으냐고.”
칼립소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데릭, 출병을 준비해. 가이아 제국을 쓸어 버리자고.”
칼립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 *
창문으로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오자 엘레나의 눈이 저절로 떠졌다.
‘아침인가?’
엘레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결국 밤새도록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가.’
엘레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멈칫했다.
‘이게 뭐지?’
철그덕, 발목에 걸리는 이질적인 느낌이 불길했다.
벌떡 일어나 발목을 바라본 엘레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자가 진짜!’
자신의 발목은 죄수처럼 단단한 쇠사슬에 감겨 있었다.
엘레나가 힘껏 발목을 빼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자신의 발목에 꼭 맞춰 제작한 듯한 족쇄는 아이러니하게도 안쪽에 부드러운 천이 덧대어져 있어 아무리 몸부림쳐도 상처가 나지 않았다.
‘뭐야.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몇 번 빼내기를 시도하던 엘레나는 이내 포기한 채 침대에 벌렁 누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잠이나 더 자야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분한 마음에 잠도 쉽사리 오지 않았다.
잠시 후, 분명히 들리는 노크 소리에 엘레나는 전투태세를 갖추며 일어났다.
하지만 정중한 노크 끝에 들어온 사람은 비비안이었다.
“공주님, 일어나셨어요?”
다정한 미소를 띠고, 엘레나 곁으로 다가온 비비안이 발목에 감긴 쇠사슬을 본 순간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머!”
그 반응을 보고 엘레나는 조용히 한숨 쉬었다.
이제야 자신들의 황제가 얼마나 미친놈인 줄 알게 되겠지.
황제를 변호하며 눈동자를 반짝이던 비비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도 꽤 볼 만할 것이다.
엘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당신들의 황제는 이런 자야.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바로 가두고, 고문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고.’
하지만 비비안의 눈은 다른 의미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벌써, 이런 것도 하시는 거예요?”
“이런…… 거라니…….”
엘레나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말했다.
“어젯밤 격정적이었다고 듣긴 들었는데, 설마 벌써 이런 도구도 이용하실 줄이야.”
“그게 무슨 말이지?”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두 분께선 곧 혼인하실 테니까요.”
비비안은 엘레나의 찢긴 잠옷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봤다.
“하루라도 빨리 혼인하셔야겠어요. 역시 폐하께선 마음을 주신 이에게는 한없이 정열적이시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