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6화 (6/100)

6

두 사람의 검이 격돌하자, 그 소리를 듣고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황급히 뛰어왔다.

“폐하!”

단번에 태세를 갖춘 호위 기사 알베르토가 칼립소의 명을 기다렸다. 칼립소가 명만 내리면 은빛 여우의 목숨쯤이야 단번에 끊어놓을 작정이었다.

황궁에 도는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알베르토는 은빛 여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찌 적진에서 만난 자를 황후로 모시겠는가.

아무래도 황제께서 은빛 여우의 마법에 단단히 홀리신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혼인이 웬 말이란 말인가.

그러니 이번 기회에 후환이 남지 않도록 목숨을 완전히 끊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칼립소는 알베르토를 흘낏 바라본 후, 잠시 손을 들어 멈추라는 표시를 했을 뿐이다.

병사들이 활을 겨누고 여차하면 쏠 기색으로 은빛 여우를 향해 둘러쌌다.

“활을 내려라.”

“폐하.”

“알베르토. 구경하려면 조용히 있고, 아니면 들어가.”

칼립소가 검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 새로 바꾼 검이 길이 안 들어서 좀 요란할 테니.”

그 말이 엘레나의 성미를 자극했다.

‘길이 안 들어서? 설마 내게 하는 말인가.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엘레나의 검이 순식간에 칼립소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날카로운 검의 공격은 재빠른 칼립소의 검날에 그대로 부딪혔다. 엘레나가 잠시 당황한 찰나, 그대로 손목이 강타당했다.

엉겁결에 검을 놓친 엘레나는 품 안에서 다급히 촛대를 꺼냈다. 그 날카로운 끝을 잡고 그대로 칼립소의 목을 겨누며 달려들었다.

예상치 못한 촛대를 이용한 돌격에 놀란 칼립소는 피하면서 허리를 잔뜩 젖혔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더 달려드는 엘레나의 다리를 공격하자, 중심을 잃은 그녀가 그의 몸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하필이면, 엘레나의 입술이 칼립소의 입술에 부딪혀 버렸다.

말캉하고 보드랍고 빨간 입술이 그에게 닿자, 둘 다 당황한 나머지 굳어버렸다.

“흐흠.”

상황이 이쯤 되자, 주위의 병사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격정적인 것은 좋은데, 이제 좀 치우지.”

칼립소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건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엘레나의 하얀 얼굴이 단숨에 붉게 달아올랐다.

‘마치 키스하려고 달려든 것 같잖아.’

서둘러 몸을 일으켜 입술을 떼려 하자 칼립소의 손이 엘레나의 머리를 잡았다.

“그거 말고.”

가는 촛대가 칼립소의 가슴 아래를 찌르고 있는 걸 엘레나가 뒤늦게 눈치챘다.

“이걸 치우란 말이야.”

촛대를 꽉 잡은 엘레나의 손을 칼립소가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리곤 촛대를 자신의 품에 넣었다.

“이제 내 목을 감아.”

“뭐?”

당황한 엘레나의 귀에 칼립소가 속삭였다.

“내 몸에 상처가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수십 개의 화살이 바로 당신 목에 박힐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레나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촛대가 박혔던 가슴 아래에서는 조금이지만 핏자국이 번지고 있었다.

엘레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살은 내렸지만 경계가 가득한 병사들이 어찌 돌변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살려면 다시 내게 키스하지.”

칼립소의 말에 엘레나가 홀린 듯이 입술을 다시 맞춰왔다.

결심한 듯이 보드랍고 말캉한 입술이 지체 없이 다가오자, 칼립소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아챘다.

다시 도망이라도 갈까 두려운 것처럼 칼립소의 강한 손이 엘레나의 작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다가오는 엘레나의 입술 사이를 살며시 혀로 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안쪽의 훨씬 더 보드랍고 따뜻한 곳으로 진입하자, 당황한 듯 엘레나의 머리가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칼립소의 손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혀로 입 안을 쿡쿡 찌르며 열 오른 살덩이가 서로 엉켜들었다. 칼립소는 처음 느껴보는 열기가 몸 안에서 날뛰는 것을 느꼈다.

입을 더 벌려달라는 뜻으로 짓궂게 들어가자, 꼭 다물려는 입술이 오히려 자극적이었다. 칼립소는 잠시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뒷머리를 세게 잡아당기자, 신음을 내며 엘레나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칼립소는 혀를 더욱 깊이 밀어 넣었다.

달큼하게 젖어 드는 감각에 칼립소의 혀가 춤을 추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엘레나는 문득 키스를 너무 오래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들자, 이미 병사들은 저 멀리 가고 없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병사들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엘레나가 화들짝 일어났다.

“이런.”

아래에서는 묘한 표정을 지은 칼립소가 아직도 드러누워 있었다.

“탈출은 포기해. 주변에만 없을 뿐이지, 멀리서 주시하고 있을 테니.”

낭패였지만 다음 기회를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엘레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차림으로 가려고? 지금 그런 차림으로 의심받지 않고 성안으로 돌아가는 길은 나와 함께 가는 것뿐일 텐데.”

엘레나는 칼립소를 돌아봤다. 얄밉지만 그 말이 또한 사실이었다.

“그럼 빨리 일어나든지.”

엘레나의 말에 칼립소가 음미하듯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은 좀 힘든데.”

엘레나가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칼립소가 실소했다.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어. 좀 일으켜주든지.”

마치 유혹하듯 내민 칼립소의 손을 엘레나가 매섭게 쳐냈다.

“엄살 부리지 마.”

“매정하긴.”

칼립소가 상처 받았다는 듯이 픽 웃었다.

“빨리 일어나기나 하지.”

가슴 아래 상처를 움켜쥐며 칼립소가 과장되게 말했다.

“아파서 그렇다니까.”

“고작 그따위 상처에 말이야?”

상처에 주변이 제법 피로 물들었다고는 하지만, 칼립소가 누구인가. 전쟁의 신으로까지 불리면서 전장을 휩쓸고 다닌 자였다. 이깟 상처에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누워있는 모습에 슬며시 걱정도 됐다.

‘설마 급소라도 찔렸나?’

엘레나는 무릎을 꿇고 칼립소의 가슴 부근을 봤다.

피가 배어 나오긴 했지만 큰 상처는 아닌 것 같았는데, 옷 위로 보는 것만으로는 모를 일이었다.

자세히 보고 싶어서 단추를 끄르자, 바위처럼 탄탄한 근육이 나타났다.

‘별로 다치지도 않았잖아.’

상처 부위를 더듬는 엘레나의 손길에 갑자기 근육이 펄떡 움직였다.

“헉.”

마치 큰 아픔이라도 느끼듯 칼립소의 입에서는 신음이 나왔다.

“크게 안 다친 거 같은데, 이제 일어나지.”

“너무 자극적이군.”

그제야 느릿하게 일어나면서 칼립소가 중얼대듯 말했다.

‘정말 아픈가.’

일어나는 칼립소의 움직임이 이전과는 달리 둔해 보였다.

특히 걸음걸이가 불편한 것처럼 어기적거렸다.

“괜찮은 거야?”

엘레나의 말에 칼립소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남 걱정은.”

엘레나를 돌아보던 칼립소가 망토를 풀었다. 그리고 엘레나의 찢어진 잠옷 위로 덮었다. 어찌나 크던지 온몸이 감싸지고도 질질 끌렸다.

칼립소가 엘레나를 보호하듯 품으로 이끌었다.

“그럼, 들어가지.”

칼립소가 이끌자, 엘레나는 얌전히 그를 따라갔다. 하지만 성문 앞에 당도했을 때 주춤하며 들어가길 망설였다.

아무리 탈출에서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그냥 들어가기엔 좀 허무했다.

그러나 별수 없었다. 다음번에 제대로 된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가만히 서 있는 엘레나를 보고 칼립소가 발을 멈췄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칼립소는 엘레나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청초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까의 입맞춤의 열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쉬운가?”

“할 수 없지, 다음을 노릴 수밖에.”

엘레나의 담담한 말에 칼립소를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다음엔 날 한 번에 죽이는 게 나을 거야. 아니면 놓칠 테니까.”

“역시.”

칼립소가 어두운 표정으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아까의 입맞춤 따위에는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듯이 그저 달아날 궁리만 하는 그녀의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다.

“벌은 받아야겠지?”

칼립소가 엘레나를 보고 잔인하게 웃었다.

“벌이라니?”

엘레나가 황당하다는 듯이 칼립소를 바라봤다.

“설마 이 난리를 벌였으면서 그냥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정말 치사하기가…….”

엘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그냥 넘어가기로 한 것 아니었나. 그녀는 서서히 불안해졌다.

‘또 지하 고문실에 가게 되는 건 아니겠지?’

엘레나의 눈이 불안으로 흔들렸다.

아무래도 지금이 지하실에 있었던 것보다는 백번 나았다.

‘다시 고문을 받는다?’

살결에 새겨진 아픔이 생각나 엘레나는 몸을 움찔 떨었다.

치유력 덕분에 상처가 빠르게 아물긴 했지만, 고통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괴롭힘을 다시 받고 싶지는 않았다.

엘레나는 얼굴에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최대한 기품있게 말했다.

“밤이 늦었으니 일단 들어가지.”

엘레나의 말에 칼립소가 기묘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그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엘레나는 얼른 성안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꼿꼿하게 쳐든 채 허리를 세우고 최대한 우아하게 걸으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겁먹었다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을 따라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위압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엘레나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성안에 들어서자, 병사들이 그녀를 보고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정확히는 그녀 뒤에 있는 칼립소를 보고 한 것이지만.

“그럼 이만.”

엘레나는 갑자기 뒤를 돌아 예의를 갖춰 칼립소에게 인사했다.

그의 입에서 다른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침실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 성싶었다.

우아하게 인사를 마친 엘레나가 다급하게 달아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