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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가 엘레나의 두 어깨를 잡아 짓누르듯 자리에 앉혔다.
놀라운 악력에 엘레나는 잠시 버티다가 식식거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난 인내심 없는 황후를 원하지 않아.”
그의 말에 엘레나의 눈이 부릅떠졌다.
“난 내 반려로 미친놈을 원하지 않아.”
칼립소가 호탕하게 웃었다.
“왜 웃지?”
좀처럼 웃음을 그치지 않는 칼립소를 보고 엘레나가 기분 나쁜 듯이 중얼거렸다.
“내 앞에서 나를 미친놈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건 당신밖에 없을걸?”
칼립소는 겨우 웃음을 멈추고, 엘레나를 바라봤다.
“그럼, 피차 가식은 그만 떨고.”
칼립소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의 빙글거리던 장난기가 어느새 싹 없어졌다.
“가이아 제국과 혼인하려는 이유를 말해주지.”
진지한 그의 말에 엘레나의 표정도 변했다.
“급하게 제국을 꾸린 탓에 제도며 이곳저곳에 문제가 꽤 많아.”
케이타족은 본래 유목민이었다. 제대로 된 국가로 정비하는 것은 칼립소가 처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황제에 올랐으나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에 비해 가이아 제국은 규모는 작지만 천 년이 넘은 역사와 문화가 탄탄하게 자리 잡은 곳이었다.
어쩌면 탐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가이아 제국의 문물이라면 우리 쪽엔 꽤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 말에 엘레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만약 자신의 나라의 문화와 케이타 제국의 힘이 합쳐진다면?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교역의 꽃이 필 수도 있다.
가슴이 저도 모르게 두근거렸다.
‘진심인가?’
엘레나의 눈이 도르르 굴러갔다.
“……그런 생각이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
“당신이?”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듯 칼립소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큰 소리로 웃었다.
“당신 도움은 기대도 하지 않아.”
“먼저 도움을 요청한 건 그쪽 같은데?”
칼립소가 묘한 표정으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난 여자들한테 그런 기대를 하지는 않지.”
그 말에 엘레나가 바로 발끈하였다.
“하긴, 미친놈의 헛소리를 진담으로 들은 내가 잘못이지.”
“그런데 말이야, 엘레나.”
칼립소의 눈이 번쩍 빛났다.
짙은 검은 머리에 붉은 눈. 형형하게 빛나는 그 눈은 위험신호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런 말버릇으로 날 대할 거지?”
“그게 무슨…….”
“대우를 받으려면 먼저 격식을 갖춰. 그러고 보면 천년의 전통도 별거 아닌 것도 같고. 이 나라의 황제는 나야. 당신은 그 케이타 제국의 안에 와 있는 거고.”
그 말에 엘레나는 픽 하고 웃어버렸다.
“왜, 미친놈도 존대는 받고 싶은가?”
“당연하지. 안 그럼…….”
잠시 뜸을 들인 후 칼립소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나도 막 대하고 싶어지잖아?”
칼립소가 엘레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두 사람 간의 거리가 좁아지자, 엘레나는 다시 한번 심장이 조여지는 것을 느꼈다.
그 참을 수 없는 긴장이 싫었던 엘레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당신한테 예의를 갖추게 됐어? 날 포로로 가둬서 고문한 후, 멋대로 청혼하고, 여기에 앉혀놓았는데.”
“청혼받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감옥으로 다시 돌아가는 방법도 있어. 물론 고문 강도는 이전보다 높아질 거야. 치유가 된다고 고통을 못 느끼는 건 아니잖아?”
섬뜩한 말에 엘레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엘레나,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칼립소가 느긋하게 바라봤다.
“오늘 청혼 예물로 가이아 제국에 마차가 갈 거야. 금덩이를 잔뜩 싣고 들어가니, 그쪽에서도 화답이 오겠지.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도록 해. 되도록 머리는 굴리지 말고.”
칼립소가 엘레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더니, 일어섰다.
그리고 엘레나 앞의 빈 접시를 보며 싱긋 웃었다.
“부족한 거 같은데, 음식은 더 달라고 하고.”
칼립소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자, 엘레나는 비로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잠깐 상대했을 뿐인데도, 마치 치열한 전투를 치른 양 피로감이 지독했다.
지시를 받은 주방장이 새로운 요리를 준비해 나오자, 엘레나는 다시 우아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마치 처음으로 식탁에 앉은 것처럼 예법에 맞춰 천천히 먹었다.
누구에게 보란 듯이.
* * *
모두가 잠든 깜깜한 밤.
엘레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좀 급한 감이 있지만 자유롭게 풀려난 오늘 밤의 기회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어떻게 이용될지 감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엘레나는 재빨리 일어나 하늘하늘한 잠옷을 벗어버렸다.
황급한 동작에 지익 소리가 나면서 옷이 찢겼다.
‘도대체 옷을 왜 이렇게 약하게 만든 거야?’
엘레나는 옷장을 뒤지며 간편한 옷을 찾았으나, 마땅한 옷이 없었다. 하나같이 하늘거리면서도 긴 치마라 행동하기에 불편할 뿐이었다.
손을 멈춘 엘레나는 자신의 차림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속옷만 입고 갈 수는 없잖아.’
엘레나는 결심한 듯 방금 벗어둔 잠옷을 다시 입었다.
대신 치마를 찢어 활동성 편하게 다시 만들었다.
허벅지 바로 위까지 오는 치마가 신경 쓰였지만, 어차피 성 밖만 벗어나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더 이상 이곳에서 미친놈을 상대하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청혼한다고 저 야단이지만, 수틀리면 다시 변덕을 부려 당장 자신의 목을 베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가이아 제국으로 청혼 선물도 갔다니, 부모님께서는 얼마나 황당해하실 것인가.
어떻게든 빨리 자신이 돌아가서 해명을 해야 했다.
풍성한 은발 머리를 한 번에 틀어 올리자 엘레나의 쭉 뻗은 목선이 길게 드러났다.
목선은 가녀렸지만 탄탄한 근육이 붙은 팔과 다리는 그녀가 얼마나 고된 훈련을 했는지 보여줬다.
엘레나는 잠시 침실을 살폈다. 무언가 손에 쥘 만한 무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선뜻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었다.
‘이거라면 괜찮을까?’
침대 옆의 촛대가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날카로운 촛대 끝과 손잡이까지 있는 것이 꽤 적당해 보였다.
엘레나는 단숨에 촛대를 빼 들어 허리춤에 깊숙이 넣고 창문 밖부터 살폈다.
‘이곳에서 바로 벽을 타고 내려가면 좋을 텐데.’
하지만 이렇게 높은 층은 아무리 그녀여도 무리였다.
게다가 사방이 어두운 터라 발 받침대를 찾기도 요원해 보였다.
‘좀 더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
엘레나는 조심스럽게 침실 문 근처에 다가갔다.
빼꼼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앞을 지키는 경비병이 다가왔다.
엘레나는 허리를 굽히고, 신음을 흘렸다.
“무슨 일이시죠?”
“복통이 심해서…….”
“많이 아프십니까?”
“……식사가 문제였던 것 같다.”
엘레나의 작은 목소리에 걱정스러운 듯이 병사가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서둘러 뒤돌아 가려는 병사의 뒤통수를 엘레나가 강하게 내리쳤다.
엘레나는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주저앉은 병사를 끌어내 방문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병사가 찬 검을 본 순간, 엘레나는 자리를 뜨기 전 검부터 빼 들었다.
착 감기는 검이 손에 들어오자, 아까보다 훨씬 자신감이 생겼다.
엘레나는 신중하게 복도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날아갈 듯한 걸음으로 재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감옥에서 끌려 나오면서 성안의 구조와 위치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눈여겨본 비상 통로를 통해 재빠르게 2층까지 내려온 엘레나는 창문을 살폈다.
그때 살펴본 바로는 1층에는 병사들이 꽤 많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곳에서 뛰어내리는 편이 더 안전했다. 쓱 살펴본 엘레나는 고양이처럼 몸을 숙여 창문 옆으로 날아올랐다.
땅에 가볍게 착지하고 만족스럽게 일어서자마자 그녀는 온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거짓말처럼 칼립소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분명히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는데.”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처럼 느른하게 웃으며 칼립소가 얄밉게 중얼거렸다.
엘레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필이면 이놈에게 걸리다니.’
당황한 엘레나와는 반대로 칼립소는 느긋하게 그녀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봤다.
틀어 올린 은색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덕분에 가느다란 목덜미도 한눈에 들어왔다.
‘손에 쥐어 부서뜨릴까.’
하얗고 조그마한 얼굴이 현실감이 없어 보인다 싶을 때, 생기가 넘치는 빨갛고 도톰한 입술이 시선을 끌었다.
가녀린 목선을 타고 내려가다 보니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하늘하늘한 천 사이로 길쭉한 다리가 보였다.
‘훗. 직접 찢었나 보군.’
허벅지 근처에서 찢긴 잠옷은 야릇한 상상을 자극했다.
이상했다. 칼립소는 본래 여자에게 큰 관심 없었다. 전장에서 피 냄새를 즐겼을 뿐 여자에게는 무심했다.
여자는 본디 사내의 약점이 될 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칼립소는 기본적으로 여자를 멀리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왜 이렇게 신경 쓰일까?’
혼인을 결정한 것은 다소 충동적이었다.
황제에 즉위한 이상 나라의 기강을 제대로 세우려면 혼사를 서두를수록 좋았다. 데릭 역시 혼인을 빨리하라고 귀가 따갑도록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특히 전투를 즐기는 칼립소에게는 후계 문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칼립소지만 전장을 누비는 이상 부상이 있을 수 있고, 그를 대비해서는 든든한 후계자가 태어나야 했다.
어차피 하게 될 혼사라면, 이 여인은 어떨까. 그렇다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성가신 김에 내린 결정이었다.
다루기 힘들 거라 예상이 되었지만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취할 것만 취한 후에, 골치 아프게 됐을 땐 가둬버리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굳이 골치 아플 일을 자초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면 내 취향이 이런 쪽이었나?’
솔직히 말하면 그날 전투 이후,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달큼한 피 냄새와 화려한 동작은 충분히 매혹적이었으니까.
그때 엘레나가 바로 검을 휘둘렀다.
“이런.”
잠시 방심하고 있다가 일격을 맞은 칼립소도 곧 검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