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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 제국에는 별 볼 일 없는 사내들이 많아서 그랬을지 몰라도, 여기 여인들은 그런 고생할 필요가 없어요. 그저 사내들이 벌어오는 금전으로 행복하게 살면 그뿐이랍니다. 물론 잘 싸우도록 내조해야 하지만, 뭐 그것도 밥 잘 챙겨주고, 밤 생활 잘해주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면 사내들은 꼼짝 못 하고 여인들에게 잘해주게 되지요.”
그 말에 엘레나는 가슴부터 얹히는 체기를 느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네? 왜요? 지아비를 내조하는 건 여인으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 아닌가요?”
비비안이 엘레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잠깐만.’
엘레나는 비비안의 말에 반박하려다 풍덩 다시 욕조에 몸을 숨겼다.
여기의 법도가 그렇고, 가장 가까이 있는 비비안의 생각이 저렇다면 여기서 굳이 싸울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비비안의 생각에 동조하는 척하며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자신이 탈출하려면 일단 비비안의 경계를 푸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게…….”
엘레나는 말을 골랐다.
어차피 자신이 탈출하려는 것을 비비안이 눈치채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아니,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뭐가요?”
“지금은 좋다 해주시지만, 폐하께서 날 싫어하면 어찌 하나하고.”
“어머 가여우셔라. 벌써부터 폐하의 마음이 떠나지 않을까 걱정되시는군요. 걱정 마세요. 이 비비안이 책임지고 가이아의 때를 벗겨내고, 폐하께 예쁨 받는 법을 알려드릴게요.”
기가 막힌 소리에 엘레나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예쁨 받는 법이라고?’
“그게 도대체…….”
“원래 첫날이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은 그거까지 해야 되겠어요.”
“뭐…… 뭘 말이지?”
“따라오시면 알게 될 거예요.”
의욕에 찬 비비안이 엘레나의 어깨를 잡았다.
“자, 이제 일어나세요.”
진작부터 일어나고 싶었던 엘레나가 벌떡 일어났다. 어서 옷을 입고 정신을 가다듬고 싶었다. 이 시녀와 계속해서 말을 섞다가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엘레나의 나신을 비비안이 부드럽게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저를 따라오세요.”
엘레나는 긴 비단 천으로 몸을 두른 채 비비안을 따라갔다.
비비안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침대가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여기 누우세요.”
“이곳에?”
엘레나가 당황하자, 비비안이 서둘러 누우라고 손짓을 했다.
“이곳에는 왜 누우라는 거지?”
“어서요.”
비비안의 재촉에 엘레나는 대리석 침대에 몸을 눕혔다.
“걱정 마세요. 처음에만 조금 아플 뿐이지, 숙련된 시녀들이 알아서 해드릴 테니까요.”
‘무슨 말이지?’ 엘레나가 어안이 벙벙해진 틈에 비비안이 정체 모를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갑자기 다섯 명의 시녀가 엘레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고통의 순간이 시작되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공주님.”
벅벅 긁은 느낌이 온몸을 휩쓸었다.
난생처음 겪는 그 감각에, 전장에서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헉, 그곳은.”
순간 허벅지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손에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어머, 걱정하지 마세요.”
우악스러운 시녀의 손놀림이 허벅지 사이를 문질렀다.
“피부가 약하시네요.”
금세 빨개지는 엘레나의 피부를 보고 비비안이 중얼거렸다.
“살살해 드리렴.”
하지만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제 제모를 시작할게요.”
‘제모라고?’ 엘레나의 입이 벌어졌다.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불행히도 엘레나의 예상은 맞았다. 따끔한 고통과 함께 제모까지 완벽하게 끝내자, 엘레나의 정신은 반쯤 나가 있었다.
아마 이전에 채찍으로 고문하지 말고 이 여인들을 붙여주었다면 진즉에 항복했을지도 모를 고통이었다.
그때부터 혼이 나간 엘레나는 손톱 손질이며 머리 손질까지, 아무 저항 없이 시녀들에게 맡겼다.
“정말 부러운 머리카락이에요. 이런 머리카락을 얻을 수만 있다면 천금인들 아까울까요?”
비비안은 신기하다는 듯이 은빛 머릿결을 만졌다.
반짝이며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게 휘말리는 은색의 머릿결은 참으로 탐스러웠다.
“그럼, 이제 성으로 가셔야죠.”
겨우 몸단장이 끝났다 싶었더니, 이제는 의상이 문제였다.
비비안이 가지고 온 의상은 하늘하늘한 하나의 천으로 되어 있었다.
하나의 천으로 만든 이 의상은 정교한 매듭으로 되어 있었으나, 한 번 매듭이 풀리면 그대로 벗겨지는 고약한 옷이었다.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의도가 뻔히 보였다.
평소라면 기겁했을 엘레나였지만, 이제는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엘레나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비안은 손뼉을 치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거울 속의 엘레나는 이전의 강인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늘거리는 푸른 천은 그녀를 한없이 연약한 여성으로 보이게 했다.
잘 손질된 은발은 허리까지 풍성하게 왔으며, 금으로 된 머리띠는 다이아몬드 장식으로 화려하게 빛났다.
피부는 반짝거리다 못해 광이 날 지경으로 엘레나의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이제 폐하께서 공주님을 예뻐하실 수밖에 없을 거예요.”
비비안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곧 식사가 시작될 거예요. 이리로 가시면 돼요.”
엘레나는 비비안이 따라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연회장으로 가는 길목마다 화려한 장식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돈이 넘쳐나나?’
복도 중간중간 화려한 금 기둥이 늘어져 서 있었고, 벽면에는 각종 전리품으로 가득했다.
‘뺏은 것을 자랑하고 싶은 거군.’
비록 진귀한 것이 가득했으나, 그 진열이 아쉬웠다.
그저 과하게 나열만 되어 있어 그 기품을 온전히 살리지 못했다. 오히려 뒤죽박죽으로 되어 있는 통에 어지럽기만 했다.
그런 안타까움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서니 긴 식탁 위에 화려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이리 앉으시면 됩니다.”
비비안의 안내를 받아 엘레나는 의자에 앉았다.
엘레나는 식탁에 있는 화려한 요리들을 바라봤다. 눈앞에 놓인 요리의 맛있는 냄새를 맡는 순간 그녀의 입 안에 침이 저절로 고였다.
그러고 보면 고문을 받는 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일단 먹어야 기운을 차려 도망갈 것이 아닌가.
‘배고프다.’
엘레나는 당장이라도 음식을 입에 넣고 싶었지만, 두 눈을 뜨고 지켜보는 비비안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언제 오는 거야?’
엘레나가 식당에 들어오고 한참이 지나고 아무리 기다려도 칼립소는 오지 않았다.
‘이건 또 새로운 고문 방식인가?’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앞에 두고도 먹지를 못하자 엘레나는 점점 괴로워졌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폐하께서는 늦으시는 것 같은데, 먼저 먹어야겠네.”
“공주님!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럼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당연히 폐하께서 오실 때까지지요.”
비비안의 단호한 말에 엘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 시진 남짓 지났을까. 눈앞의 음식은 차디차게 식고, 위장조차 꼬여갈 때였다.
“황제 폐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 소리와 함께 칼립소가 천천히 들어왔다.
불만이 가득한 엘레나를 보는 칼립소의 눈썹이 놀랍다는 듯이 휘어졌다.
“시녀의 솜씨가 예상외로 좋군.”
“공주님께서 워낙 미인이라서 그렇습니다.”
비비안의 겸손한 말에 칼립소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차갑게 중얼거리던 칼립소가 손짓을 했다.
“물러가.”
칼립소의 손짓에 주위 시녀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다렸을 텐데, 먹지.”
그 말이 떨어지자 엘레나는 성급히 음식을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혀끝에 느껴지는 달콤한 감각에 칼립소에 대한 분노는 잠시 사라졌다. 오직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성가셨으나, 지금은 우선 배를 채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입 안으로 퍼지는 고기의 육즙은 오랜 시간 기다린 엘레나를 충분히 만족시켰고, 수프는 감미로웠으며, 야채는 신선했다.
허기를 면하자, 그제야 엘레나도 천천히 음식을 음미할 수 있었다.
“엘레나.”
자신을 부르는 말에 그제야 엘레나는 칼립소와 시선을 맞췄다.
“나한테 예쁨 받고 싶다고 하던데.”
그 말에 엘레나는 잘 먹던 음식이 목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설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
엘레나가 기가 막힌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식욕까지 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칼립소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엘레나에게 다가왔다.
장신의 그림자가 자신의 위로 덮쳐오자 엘레나는 생전 처음으로 사람에게 위압감을 느꼈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엘레나의 뺨을 스쳤다.
솜털조차 없는 매끄러운 곡선을 따라 훑어 내려가는 순간, 엘레나가 그의 손을 매섭게 내쳤다.
“뭐 하는 거지?”
“이렇게 차려입은 것을 보니 꼭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엘레나는 코웃음 쳤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아도취에 뭐든 자기 마음대로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연극을 할 참이지?”
“연극이라.”
분명 변덕이 나서 사람을 갖고 노는 것 같은데 그 심중이 궁금했다.
“연극이 아니면? 설마 진심으로 나와 혼인하겠다는 건 아닐 테고.”
그 말에 칼립소가 슬쩍 웃었다.
“당신에게 반했다니까.”
“그 미친 소리를 나보고 믿으라고?”
엘레나가 웃기지 말라며 삐죽댔다.
“온 나라가 그 소문을 믿는데 당신만 안 믿는군.”
“소문? 매일 매일 나에게 세레나데를 불러줬다는 그 헛소문 말인가? 눈이 멀고, 귀가 먼 사람들은 몰라도 당사자를 속일 수는 없지. 매일매일 당신이 내게 준 건 세레나데가 아닌 채찍이었으니.”
“흠, 그런 것 치고는 몸이 지나치게 멀쩡한데.”
엘레나는 기가 막혔다. 그렇지만 그 앞에서 가이아족의 치유력에 대해 떠들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혹시 세레나데를 듣지 못해 섭섭한 건가?”
칼립소의 말에 엘레나가 벌떡 일어났다.
“천만에. 이런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