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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100화 (100/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100화

이곳은 연옥, 곱고 아름답다.

나는 죽음으로부터 10km 떨어진 곳에서 야영 중이었다.

함께 견디는 전우는 없다. 몸을 내린 곳은 늪지대였지만 두꺼비 따위의 작은 생물도 없었다.

사방에 썩은 나무줄기가 산재해 악취가 났다. 연기와 불꽃 속에서 영혼이 타오르는 듯했다. 물 떠난 사막 한가운데에 묶인 셈이었다. 이런 부류는 모닥불이 꺼지기도 전에 눈을 감기 마련이었다.

손으로 양 볼을 감싸면 따뜻한 온기가 도는데 이미 죽었다니 곡할 노릇이었다.

눈을 감고 어둠에 기대면 대차게 울리던 째깍 소리도 이제는 희미해서 째─깍, 째깍……. 째, 깍, 거리기만 했다.

시소를 타고 맞은편에 앉은 죽음을 어떻게든 떨쳐 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노라면 점점 아래로 잠겨 내려갔다. 놀이동산째로 끌어내려지는 것이다.

과거 크로노모르테 레시우스, 나의 예언자가 이야기하기를, ‘오필리아 님의 수명은 측정할 수 없소. 고장, 고장이 나 버릴 것 같소’라고 했다.

당시 나는 천사 같은 뱀을 두려워해 천진해지고 말아 그 말을 좋을 대로 해석했다. 하지만 시간을 잴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증수표가 아니라 언제 땅속을 굴러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 이중성을 헤아리지 못했다.

말룸은 나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하에서 라딘라티가 빈번히 광소한다는 엘로힘의 말에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그럼 정적이 휘돌아 편안해졌다.

아무도 방문하지 않을 때 나는 낡은 밀림에 묻혀 세네트나 만지작댔다. 청색의 말은 내가 잡았다. 백색의 말도 스스로에게 넘겼다. 번갈아 패를 던지고 말을 위로 올리면 승패는 반반으로 갈렸다.

죽느냐, 사느냐. 절반의 확률이었다.

오늘도 크로노가 병간호를 맡았다. 그는 매양 한두 시간 정도 있다가 갔다. 이즈음 나는 몸에 뚜렷한 힘을 주지도 못했다. 힘줄이 도려내져 바깥으로 끄집어진 것 같았다.

“크로노. 세네트 한 판 할래요?”

나는 침대에 누워 지친 패잔병처럼 팔을 까딱였다. 크로노가 봄날처럼 웃으며 기꺼이 말을 일곱 개 골라 집어 갔다.

침대에서 세네트 판이 요란하게 벌어졌다.

크로노는 항상 지기만 하면서도 대충 하지 않았다. 나는 패를 못나게 던지는 식으로 말미를 주었다. 한 판은 내가 이겼고, 다음 판도 내가 이겼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판들도 모두 내가 승리했다.

게임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그러나 내가 위태로워 보였는지 크로노가 딱딱한 얼굴로 세네트 말을 내려놓았다.

“중심을 잡으시오, 오필리아 님.”

나는 말을 하나 손에 쥐고 크로노의 속을 짐작하려 눈을 깜빡였다. 모두와 함께 눈싸움을 할 때도 그는 내게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중심이요……. 그걸 잡으라구요?”

3월 중순의 태양이 맑았다. 어느덧 봄기운이 물씬 났다. 톳이 돋아나고 두릅과 도라지가 머리를 들면 봄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예언자의 속은 때가 되면 땅 위로 오르는 새싹처럼 시간 맞춰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무슨 뜻인지 하나도 이해 못 하겠어요. 물론 크로노 탓은 아니에요. 제가 똑똑하지 못한 탓이겠죠. 익숙한 일이에요.”

이번에 나는 접시에 담긴 큼지막한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줄줄 흐르는 육즙이 목 뒤로 꿀꺽 잘도 넘어갔다. 짭조름한 맛이 혀를 톡 쏘았다. 아침부터 지금 점심까지 텅 비어 있던 속이 게걸스레 고기를 집어삼켰다.

입술은 번들번들해져 있을 것이다. 치아도 건강해 고기를 딱딱 잘 씹었다. 그런데 대체 여기서 어떻게 더 중심을 잡아야 하는지는 차마 모르겠단 말이다…….

나는 접시를 바닥에 내던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모를 줄 아냔 말이다, 당신이 내게 생명을 전이할 생각이라는 걸.

크로노는 시간의 파편을 통해 앞날을 내다볼 수 있고, 전이의 파편을 통해서는 무언가를 전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전이하고자 하는 대상이 너무도 선명했다. 때문에 나는 예쁜 말을 낼 수가 없었다.

나는 크로노에게 이렇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당신은 스스로가 소중하지 않나요? 더 살아서 푸른 초원을 내달리고 싶지 않은 건가요? 투레질하는 말도, 나무와 이파리와 보석을 서로 엮고 모퉁이끼리 맞대는 일도 모두 사랑하면서. 그리고 당신이 입에 달고 사는 쓸모가 인간의 생명을 결정짓는다면, 왜 나는 예전에 죽지 않았죠? 누구보다 이 일행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바로 나인데!’

그러나 하고픈 말 대신 엉뚱한 소리가 났다.

“크로노, 4월에 날이 풀리면 우리 외출하기로 했죠? 꽃도 예쁘고, 새들도 맑고 충만한 목청을 뽐내며 지저귈 거예요. 거리 곳곳에는 활기가 돌 테고 볼 것도 많겠죠. 동굴에 가서 뭘 할지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가 나를 보지 않았으면 해서 이불 속으로 깊숙이 숨었다. 말룸의 앞에서도, 크로노의 앞에서도, 로보의 앞에서도 나는 늘 숨었다.

“사랑하는 오필리아 님, 내 형편없는 예언을 가장 처음부터 애원했던 유일한 사람.”

이불이 어디론가 딸려나갔다. 갑자기 들이치는 빛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두려워할 필요 없소.”

크로노의 포근한 목소리가 나를 어루만졌다. 나는 크로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낯의 사내를 보았다.

“당신은 죽지 않을 것이오.”

그토록 원하던 말이었는데도 덜컥 겁이 났다. 어디서 기운이 솟았는지 나는 이불을 치우고 상체를 곧추세웠다. 나는 상대가 도주할 수 없게끔 크로노의 옷깃을 세게 잡았다. 그는 또 말갛게 웃기만 했다.

“죽게 두지 않을 것이오, 나 크로노모르테 레시우스가.”

“크로노.”

“그래, 바로 내가 오필리아 님을 살릴 사람이오. 당신을 죽음에서 건져 올릴 유일한 도구, 쓸 만한 실타래지.”

크로노가 내게 입을 맞출 듯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는 막 승천하려는 천사처럼 평온한 낯이었으나 나는 아니었다. 입매가 녹슨 철사처럼 비틀렸다. 죽지 않는다는 공언을 받았음에도 개운치 않았다.

나의 생존은 곧 크로노의 끝을 의미했다.

“아뇨, 저는.”

“살고 싶지 않소?”

저 속삭임은 이미 인간의 추잡한 본능에 대해 답을 내렸다.

“살고는, 싶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목숨을 빼앗으면서까지 살고 싶진 않아요.”

크로노가 섧게 웃었다.

“……잔인한 사람.”

그가 내 볼을 어루만졌다.

“차라리 숨을 달라 닦달했다면, 나는 그렇게 하고 이 지독한 짝사랑을 접을 수 있었을 텐데.”

사내가 꽃처럼 웃었다.

“지옥 같이 사랑스러운 사람이오, 오필리아 님은. 당신은 맘을 주지 않을 것이면서 달콤하게 굴지. 나는 그것이 증오스러우면서도 애틋하오……. 당신이 여지를 남기는 이유를 알고 있소. 오필리아 님은 누군가를 밀어낼 수 없을 정도로 강하지 않지. 자신이 감당하는 상처보다는, 남이 감당할 상처가 두려워서 그런 줄로 이해하고 있소.”

그는 나를 비난함과 동시에 찬양했다.

우리 중 가장 순수한 감정을 지닌 사람은 크로노였다. 그는 대부분 주눅 들어 있었고, 파편의 예지력에 묻혀 세상을 쉽게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게 닿기를 노골적으로 염원했다.

“그리고 또, 당신은 내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 내가 오필리아 님께 내쳐지는 즉시 시름시름 앓다 죽어버릴 것을 당신 영혼이 느끼고 있겠지.”

나는 그의 창백한 손을 꾹 잡아 쥐었다.

“미안하군……. 괜한 소리를 했소. 잊어버리시오.”

크로노가 정리하듯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일기를 쓰는 것이 좋겠소. 마음 정리에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기다리시오, 심장이 한 번 멎을 때까지. 그럼 내가 오필리아 님을 건져 올리겠소.”

크로노가 주홍빛 등불처럼 찬란히 미소했다.

“숙부도, 로보도 아닌, 이 크로노모르테 레시우스가.”

그는 떨어져 내리는 붓꽃처럼 힘없이 숨 쉬듯 이야기했다.

“그럼 나는 당신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이오.”

“…….”

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언젠가 글자 속에서 영원히 살겠노라 일기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나는 죽음의 기운을 상기했었다.

그러니 지금 크로노의 말은 유언이었다.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크로노의 모르테.

나는 크로노의 광기가, 그리고 그가 할 행동을 짐작할 수 없어 한없이 공포스러웠다.

인간이 신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나는 크로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인간이되 신의 시야를 가진 크로노는 오래 전 인간에서 멀어졌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결국 크로노였다.

가여운 사람, 복잡하게 얽힌 내 운명에 휩쓸린 작은 갈매기.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어르듯 쓰다듬었다. 크로노가 힘을 뺀 채 몸을 늘어뜨렸다. 약간은 예민하고 약간은 무기력한 평소의 크로노였다.

“당신을 죽게 두지 않을 거예요.”

“불가능하오. 정해져 있기 때문이오.”

“미래가 바뀌는 걸 전에 봤잖아요. 로보 말이에요. 분명 그 사람의 미래에 변화가 생긴 거죠?”

크로노가 내 볼을 쓸어주었다.

“그 인어와 오필리아 님은 상황이 다르오. 내가 아니면, 당신은 살아갈 수 없소……. 밑바닥에서부터 숨을 잃은 채 차게 식어가는 것이지.”

그는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철회하지 않았다. 가슴에 폭풍이 들이쳐 뼛속까지 시렸다.

나는 호언장담한 것과는 달리 어떻게 그를 삶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지, 그의 죽음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질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크로노의 죽음이 생명의 전이를 통해 일어난다면, 나는 그를 죽게 두지 않을 수 있을 듯했다. 전이를 허락하는 쪽은 생명을 받잡는 쪽, 즉, 나였다.

나는 크로노를 애매모호한 연옥에 끌어당길지언정 그가 끝내 죽어 지옥이나 천국 한쪽에 속하는 꼴은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자신의 쓸모를 결정짓는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그의 가치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발견해야 했다. 크로노는 작년 부로 성인이 되었으니 자기 미래를 찾아 날개를 펼칠 시간을 손에 쥐어야 했다.

그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먼저 세상을 유영해야 했다. 그것이 사람된 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순서였다. 크로노는 연못이든 바다든 물속에서 헤엄쳐야 했다, 무덤 같은 수족관이 아니라.

둥지를 떠나는 것은 서럽고 두렵다. 그러나 바깥으로 박차고 나가지 않으면 더는 성장하지 못 하는 시점이 있었다.

햇빛이 명멸할 듯한 3월 마지막 주, 늦은 점심.

말룸이 내게 차려 입으라 언질 했다. 그러나 굽 높은 신은 신지 말라 신신당부했다.

사랑스러운 뱀은 드물게 나를 보아도 웃지 않았다. 그의 신경을 갉작갉작 태우는 불의 고리가 목전에 온 탓이었다.

엘로힘은 항상 소지하지는 않던 검을 허리춤에 매달았다. 말룸이 굳은 표정으로 정장을 차려입고 틈 없는 살기를 첨예하게 벼렸다.

이외의 사람은 끼어들지 않았다. 동행하겠노라 고집을 부린 모리구만이 말룸의 사나운 눈초리를 견디고 내 곁에 붙었다.

아라크네 피티아가 드디어 납셨다.

공작가의 마차가 위세를 떨쳤다. 붉은 루비로 검은 바탕에 형상화된 거미 문양이 섬뜩했다. 공작이 대동한 수행원만 해도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아라크네 피티아는 원수의 성채에 치밀고 들어오는 데 준비를 촘촘히 한 것 같았다.

수행원이 마차 문을 열었고,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독을 품은 권력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와인 빛 머리칼이 얼음처럼 나부꼈다. 고양이상의 어여쁜 이목구비, 깊이 잘 여물어 단정히 매듭지어진 갈색 눈동자가 무겁게 추락했다.

공작은 모리구와 같은 단발이었지만 생머리가 아니라 굽이치듯 곱슬곱슬해 한층 사랑스러웠다. 말룸처럼 희고 창백한 피부 결은 선명한 색감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감싸 깊은 인상을 남겼다.

뜻밖에도 아라크네는 성인과 소녀의 중간쯤에 속한 외형이었다. 그러나 겉모습이 아라크네를 얕보이게끔 하지는 않았다. 천진한 소녀처럼 보이는 이자는 렉스 님의 수도원을 집어삼킨 악마였고, 말룸을 증오하는 거미 괴물이었고, 내 다리를 고쳐줄 의사였으며, 제국의 공작위를 꿰찬 위험분자였다.

유리로 공예 한 불꽃처럼 미려한 아라크네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곤두섰다. 공작은 내가 아닌 말룸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 심장이 덜컥거리며 운행을 멈출 만큼 사나운 기세였다.

“안녕, 말룸. 증오스럽고도 비정한 배신자…….”

아라크네가 흰 드레스 자락을 잡아 올려 우아한 인사를 건넸다. 막 결혼식을 끝낸 신부 같은 차림이었다.

“그리고 안녕, 모리구. 사랑하는 내 작은 까마귀.”

그자가 표정을 바꿔 상기된 낯의 모리구에게 다가갔다. 모리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여동생을 맞이했다. 아라크네도 작게 미소하곤 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만이 아라크네가 품은 유일한 온기였다.

말룸이 낱낱이 아라크네 피티아를 살폈다. 나는 혹시 모를 충돌을 대비해 몸을 경직했다. 하지만 아라크네도, 말룸도 눈에 띄는 행동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오랜 원수를 대하듯, 혹은 묵은 감정을 어떻게 토해 내어야 하는 줄 모른다는 듯 우두커니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가라앉은 불순물에서 치사량의 독이 형성되는 때가 있었다. 독이 얹힌 것도 모른 채 물을 머금었다가는 내장기관에 수은이 달라붙어 헐떡거리게 되니 주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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