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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99화 (99/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99화

나는 평소처럼 말룸의 품 안에서 잠들었다. 그의 몸 깊이 기대고 있노라면 내 몸에 꼭 맞게 제작된 침대에 묻힌 것처럼 편안했다.

가만히 비척거리면 말룸은 다시 나를 품에 안아 고정했다. 모로 돌아누워 오른다리가 배길라치면 얼른 자세를 바꿔주기도 했다.

나는 일부러 몸을 움찔 뒤틀기도 하고 끙끙 앓았다. 그러면 말룸은 갓난쟁이를 살피는 사람처럼 이불이며 베개의 배치를 달리해 어떻게든 깊은 잠을 재우려 노력했다.

말룸은 자신의 어리광이 늘어가고 있다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반대였다. 그는 항상 내게 관대했다. 나는 그의 상냥한 눈동자를 마주하면 한 걸음만, 한 걸음도 너무 크다면 꽃씨 한 알만큼이라도 좋으니 슬금슬금 속을 풀어 놓고 싶어졌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목전에 두었을 때 아이처럼 되어버린다. 아이는 치부가 드러나도 주저앉아 울거나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다.

시야가 검어 뿌옇다.

자각몽을 꾸고 있는 듯했다. 흑백 영화를 보는 것처럼 풍경이 오직 두 가지 색으로 이루어졌다.

눈꺼풀 위를 비비고도 앞이 맑지가 않아 몇 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도리질 친 후에야 앞이 좀 트였다. 꿈꾸는 일에 적응할 법도 했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워 심장이 졸아들었다.

꿈속의 나는 손과 발이 없었다. 나는 검은 꽃밭 안에 있었는데, 시침이며 분침이며 시계 속 숫자 하는 것들이 초원 위 떠올라 나와 함께 어디론가 흘러갔다.

대지는 붙박이일 텐데 움직이는 것이 바다를 연상케 했다. 허공에 뜬 꽃잎들이 하나 둘 부식해 사라졌다.

크로노에게 내가 오래 잠들 것이라는 예언은 들었다.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도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덜컥 겁이 났다. 죽음이 지척에 있다는 직감이 엄습했다.

본능에서부터 비명이 우러나왔다.

나는 한 번 죽음을 겪었고, 이후로도 바다에 빠지는 등 사선을 넘나들었다. 심장이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기분은 거듭한다 해서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엄마를 찾듯 말룸을 찾았다.

“말룸, 어디 있어요? 근처에 있는 건 맞아요?”

동굴 속에 온 것처럼 목소리가 윙윙 울렸다. 두려움으로부터 형성된 고드름이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다. 나는 다시 소리 높여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말룸!”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이곳에 있을 리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룸은 나와 달리 살아 있었다. 동일한 시간선상에 박제되어 있기는 했지만, 살아 있는 자와 이미 죽은 자는 커다란 강을 사이에 두었다.

거짓말처럼 강물에 유속이 붙었다. 나는 검은 꽃잎의 파도에 쓸려가기 시작했다. 신음하며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하늘에서는 의미 모를 쓰레기가 쏟아져 내릴 뿐 어떤 구조선도 없었다.

쓰레기의 종류는 가지각색이었다. 냉장고, TV부터 시작해 엘로힘이 조각했을 법한 석상, 기묘하게 꺾인 나뭇가지, 거리의 사람들이나 덮는 낡은 모포나 지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인형…….

이것들은 우리 셋의 물건이었다. 나와, 오필리아와, 포인세티아가 생전 사용했던 물건.

심장이 쿵 추락해 사방으로 터져 버린 것 같았다. 덜덜 떨리는 몸뚱이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팔다리가 어디 붙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꽃잎의 파도가 점점 끝을 향해 흘러갔다.

입과 코로 꽃잎이 들어찼다. 겨울 바다에 빠져 죽어갔던 것이 생각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있는 힘껏 심줄을 놀려 버둥거렸지만 물살은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천 개 만 개의 태엽이 풀리는 소리가 일제히 들렸다. 벌들이 윙윙대는 소리 같기도 했고, 폐기되기 직전의 기계가 토해내는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물살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물은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감겨 있었던 태엽이 몽땅 풀려버리듯이.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번뜩 깨어났다.

“오필리아!”

“말, 룸……. 말룸, 나…….”

꺽꺽대며 숨을 쉬었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저 몸을 반쯤 일으킨 채 계속 무어라 소리치는 말룸의 손을 세게 잡았다. 말룸이야말로 나의 현실이었고 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종소리였다.

“진정해요. 나 좀 봐요!”

팔다리가 멀쩡히 달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 멀거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누르스름한 덩굴이 복잡하게 자라 천장을 틈 없이 뒤덮었다.

“말룸, 저기…….”

그러다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내가 끝나 가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나 없이는 영원히 망가져 버릴 것 같은 말룸에게?

그대로 손바닥에 얼굴을 묻자 말룸이 안달을 냈다. 그가 날 안심시키려 애를 썼지만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주술과 마법을 구별하지 못하는 나라도 알겠다. 그 꿈은, 거꾸로 흐르던 물살과 풀리듯 하는 태엽 소리는 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라딘라티…….

마른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용이나 세네트 생각일랑 나지도 않았다. 고개를 푹 수그려 침대로 파고드는 편이 심신 안정에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땅 밑으로 숨는 애벌레처럼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오필리아, 제발. 뭐라고 말 좀 해 줘요. 무슨 꿈을 꾼 겁니까?”

말룸이 홍수에 세간살이가 다 떠내려가는 사람처럼 급박히 부산을 떨었다. 나를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무용해 불 없는 밤처럼 서러웠다.

“전에 당신이 이야기했던, 그 용이 나오는 꿈을 다시 꾼 건가요? 짚이는 구석이 있으면 뭐든 말해줘요. 당신 말이라면 돌이 금이 된다는 것까지 검증하고 살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제발…….”

“아뇨, 진정해요. 이제 괜찮아요, 말룸. 그리고 용이 나오는 꿈은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숨겨야 할지, 아니면 솔직히 이야기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말룸도, 그리고 크로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작정 진실을 털어 놓으라 재촉했던 건 아닐까?

착잡함이 수풀처럼 자라 눈 앞을 가렸다. 길이 나지 않은 정글에 갇힌 듯 햇빛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얼마나 잤나요?”

말룸이 짓씹듯 한숨을 뱉었다.

“사흘이요. 평소와 비슷한 주깁니다. 하지만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묻는다는 건, 무언가 달라졌다는 소리겠죠. 제 말이 틀린가요?”

숨이 턱 막혔다. 말룸은 내 말 몇 마디만으로 수수께끼를 풀어헤쳐 버려 차마 숨길 수도 없었다.

“말해줘요.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벌벌 떨리는 손을 말룸이 꼭 잡아주었다. 스르르 빠져나가는 모래라도 담아두려는 사람 같았다. 그가 미간을 섧게 찌푸렸다. 영롱한 금빛 눈동자가 석양을 품어 붉어지는 듯했다.

“크로노가 지금쯤 깨어날 거라고 알려주어서 그나마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가 없더군요.”

그가 씁쓸하게 덧붙인다.

“……가끔, 당신이 평범한 사람을 만났다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당신 곁을 떠나지 못하게 되고 말아요. 당신의 인생을 망친 사람이, 당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게 맞으니까.”

“당신이 제 인생을 망쳤다고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가 비명을 지르자 말룸이 느린 박자로 연주하듯 숨을 토했다. 그는 순리를 거스른 불사의 뱀, 죄책감이 없으면서도 나와 연루된 일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들마저 죄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전 완벽한 남편이 되어줄 수 없습니다, 오필리아. 저는 마음에 빈 곳이 많아요.”

“당신은 이미 완벽해요! 가끔 당신이 그런 말 할 때마다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더할 나위 없을 만큼 잘난 사람이 꼭 나랑 연관되면 자존감 없이 구니까.”

“…….”

“그리고 제가 이렇게 된 건 당신이 아니라 라딘라티 탓이에요.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고, 되레 날 지켜 주면서 어떻게든 살게 하려 노력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말이 단호하게 떨어졌다. 나는 말룸과 닿아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처럼 심장이 거칠게 달음박질했다. 그러니 말룸과 함께 추는 춤은 내 생명의 개화요 심장에 불을 붙이는 의식이었다.

설령 우리의 시간이 맞닿지 않아 나는 죽고 그는 영원히 살아간대도, 지금껏 우리가 그 주제로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서로에게 깊이 얽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무의미한 가정, 무의미한 밀어냄이었다.

말룸의 얼굴을 잡아 내렸다. 그가 손길에 이끌려 자세를 낮추었다. 나는 뱀의 입술에 작게 입을 맞추고 안심시키듯 그를 응시했다.

“나 여기 있어요.”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되듯 말룸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지 표정이 이전보다 좋지 않다.

당신은, 그런 힘없는 몸짓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내가 그를 초라하게 만든 것 같아 그게 참 비통했다.

“내일 아라크네가 도착할 겁니다.”

그가 꽃과 같이 웃었다. 그의 미소를 이루는 꽃잎은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검게 부식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당신을 낫게 하지 못하면, 저는 녀석을 죽여 버릴 겁니다. 거미의 다리를 몸통으로부터 갈기갈기 찢어 놓은 다음, 푸른 문 안으로 던져 넣어 라딘라티를 조롱하는 거죠.”

그가 두터운 이불을 칼로 갈라내듯 세로로 매만졌다.

“그리고 라딘라티의 죽음이든 뭐든 상관없이 세상의 끝으로 도망치고 또 도망쳐서 당신을 가둘 겁니다. 만일 그 과정에서 시간이 다해 당신이 사라지면, 세상을 썩게 만들어서라도 영혼을 찾아내 다시 곁에 둘 거고요. 제게 시간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으니까…….”

말룸이 오랜 세월 묵은 그의 광기를 자백했다. 지금까지 말룸은 이처럼 노골적으로 어두침침한 속내를 열어 보인 적이 없었는데.

나는 그가 어째서 이렇게 행동하는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말룸은 내가 자신을 경멸하고 혐오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이 행성이 반으로 쪼개진대도 일어날 수 없었다.

“이리 와요. 휴식이 필요한 건 제가 아니라 당신 같아요.”

나는 잠을 자지 못하는 뱀을 대신 침대에 뉘였다. 말룸은 꼭 말 잘 듣는 종이 인형처럼 순순했다. 커다랗고 단단한 사내를 휘두르기에는 내 힘이 부족한데도 그는 고분고분 끌려와 내 온기만을 찾았다.

“생각이 많아 보여요. 말룸, 다 잘 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크로노는, 여전히 제게서 당신이 도망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럼 지금처럼만 해요. 제가 도망칠 일 없이. 그럼 되는걸.”

말룸이 그제야 작게 웃었다.

“그래야겠군요. 당신 맘에 꼭 들도록 이것저것 궁리할게요. 당신도 계속 날 달래주고 어여쁘게 여겨야 합니다. 내가 땅에 떨어져 배를 가르지 않을 수 있도록.”

“물론이죠. 영원히 자장가를 불러줄게요.”

땅을 뚫고 나무와 풀잎이 자랐다. 우지끈 하고 주변 기물 부서지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했다.

나는 수리비가 얼마나 나올지 헤아리거나 방을 고치느라 힘을 들일 사람들 생각에나 몰두했다. 그런 다음 몇 초를 간격으로 색색 숨을 몰아쉬었고, 안온함을 느끼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옆으로 돌아누워 말룸을 힘껏 안았다.

오랜 세월 묵은 말룸의 결핍이 단층처럼 딱딱했다.

“말룸. 조금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신 품은 저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제게 꼭 맞아요.”

“오필리아…….”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면 저를 위해 태어나서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모든 책임을 제게 돌려 버리는 거예요, 내가 당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그렇죠? 가여운 사람……. 미안해요. 저는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당신을 꾀어내려 손을 내밀었을 겁니다. 그래도 견뎌줘요. 이 괴물을 떠나지 말아요. 죽지도 말고, 도망치지도 말고, 영원히 날 사랑해요. 그럴 수밖에 없도록 내가 잘 할 테니까…….”

말룸의 목소리는 허파가 뚫려 호흡할 수 없는 사람처럼 흐리멍덩했다.

“죽지 않을 거죠? 오필리아. 저는 그저 당신의 다리를 고쳐주고, 믿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지요? 당신 스스로를 삶으로 이끄는 방법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거죠? 제발 그렇다고 해줘요.”

나는 줄곧 그렇다 얘기하며 그의 깊은 불안이 가시기를 기원했다. 말룸은 한동안 속을 추스르지 못해 죽어가는 사슴처럼 잘게 떨었다.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성 곳곳에 퍼졌는지 오가는 손님이 많았다.

며칠을 주기로 오랫동안 잠드는 일은 왕왕 있었지만, 요사이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통에 사람들은 ‘의미 모를 수면장애’가 다 나은 줄 알아 길었던 겨울잠에 더 놀란 듯싶었다.

티샤와 모아, 아이바르가 물기 어린 표정으로 건강을 기원하는 레시우스 전통 인형을 머리맡에 두고 갔다. 엘로힘은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벙긋거렸으나 후일을 기약했는지 몸이나 잘 추스르라 말했다. 로보는 이유 없이 미안해했는데, 그는 팔찌가 소용이 없었다며 아픔 깃든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팔찌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인어를 푹 끌어안자 로보 특유의 뜨뜻미지근한 체온이 마음을 덥혔다.

사막왕과 그의 수행원들은 시간을 잡아먹은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 왕은 어둑어둑한 시선으로 내 건강을 헤아렸고, 모리구는 내가 죽어 말룸이 날뛰지는 않을지 재어 보았다.

뜻밖으로, 평소와 다른 행보를 보인 이는 크로노였다. 크로노는 말룸이 자리를 비울 때면 그 대신 침대 곁을 지켰다. 당신은 저승사자가 아닐 텐데요, 하면 크로노는 그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 답했다.

나는 사방이 고요해질 때면 째깍 소리를 노상 들었다. 그것이 희미해지는 날이 내게 주어진 시간의 끝이었다.

천장에서 속도 모르고 나뭇가지가 삐져나왔다. 무화과였다. 무화과는 이름 따라 꽃이 없었고, 열매는 심장부까지 썩어 악취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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