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98화 (98/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98화

로보가 눈을 반짝거렸다.

“신기하단 말이지. 지금까지 몇 판 했어?”

잠시 수를 헤아리다 대꾸했다.

“정확히 마흔여덟 판이요.”

“그렇게까지 한 것도 대단하긴 한데, 한 번도 안 졌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벙긋하는 즉시 우쭐댈 것 같아서였다.

“이번에도 승리를 가져가는구나. 판돈이 걸렸다면 장신구 여럿을 내주어야 했겠지.”

거듭된 패배에 익숙해진 왕이 세네트 판을 정리했다. 상자 안으로 말과 패를 집어넣는 손길이 걸림 없이 빨랐다.

곁에서 차를 홀짝이던 크로노가 내 세네트 실력에 몇 마디 얹었다.

“오필리아 님은 봐주는 법이 없지. 아무리 도전해도 이길 수가 없소. 꼭 운명이 오필리아 님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처럼…….”

“하하, 육지 황자는 예언까지 하면서 어떻게 맨날 지나?”

턱을 괴고 누트 멤피스를 빤히 관찰하던 크로노가 성을 냈다.

“예언은 자잘한 일은 보여주지 않소! 게다가 굉장히 유동적이지.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기도 하고, 드문 일이지만 미래가 변하기도 하는 것이오.”

“그 예언이라는 거 순 제멋대로라니까. 그런데 말 늘임 많이 고쳤네. 장하다.”

크로노가 말없이 이마를 싸맸다. 로보의 장난기 짙은 말꼬리 잡기가 크로노의 속에 열을 붙였다.

확실히 크로노의 말 늘임이 많이 줄기는 했다. 수정궁에 유폐되는 바람에 다른 이들과 말할 틈이 없었을 테니, 부쩍 대화 빈도가 늘어난 지금 발음이며 말투가 교정되는 것은 당연했다.

“오필리아 님. 승리도 좋지만, 너무 도취해 놀이에만 몰두하지 마시오……. 몸이 상할 테니까.”

“아, 혹시 저 쓰러지나요?”

“무슨 말을 그렇게 태평히 하는가.”

누트 멤피스가 혀를 찼다. 나는 아차 싶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막의 왕은 내가 온종일 잠에 빠져 있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태생이 강골인 누트에게는 내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비추어진 것 같았다.

누트 멤피스가 팔짱을 꼈다. 요즘 그가 취미를 붙인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후였다.

“세네트에 푹 빠진 것 같아 기쁘지만, 이 놀이에 무시무시한 전설이 있다는 것, 알고 있는가? 이 전설은 그대에게 선물한 세네트가 발굴된 신전 유적에서 함께 발견되었는데, 아주 오래된 수인족의 언어로 적혀 있어 모리구가 아니었다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테지.”

“전설이요? 당연히 모르죠! 누트, 알려주지 않을래요?”

주변에 퐁퐁 꽃이 솟았다. 누트 멤피스가 픽 하고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를 위협했을 때의 거칠거칠한 나무줄기와는 상반되는 분위기의 식물이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여러모로 흥분해 평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청자의 반응이 좋으니 왕도 흥이 난 듯했다. 누트 멤피스가 수련회에서 귀신 이야기를 하는 아이처럼 몸을 수그린 채 서늘한 얼굴을 했다. 로보와 크로노도 왕의 이야기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순간 우리가 있는 곳은 테라스가 아니라 사막의 이름 모를 신전 유적 속이었다.

마른침이 꼴깍 언덕 저편으로 넘어갔다.

“오랜 옛날, 세계가 신에 의해 막 창조되었을 때. 신은 인간, 수인족, 인어 세 종족과 갖은 동식물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발전도, 성장도, 죽음도 맞이하지 못해 정체된 삶을 살았다지. 하여 신들은 우주의 순환과 순리를 관장하는 세 마리 용에게 이 땅을 함께 돌볼 것을 청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누트 멤피스가 무어라 말을 이을 틈도 주지 않고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은 채 그에게 바짝 붙었다.

“하나이되, 세 마리인 용……. 생명의 용 나베르타, 늙음의 용 메오게레타, 죽음의 용 세네트. 맞죠?”

누트 멤피스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대, 어떻게 알았지? 대공이 일러준 것인가?”

세 남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흥분이 벼락처럼 일렁였다. 심장이 가쁘게 뛰어 호흡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아뇨, 꿈에서 봤어요. 당신이 세네트를 처음 알려준 날 밤 꿈에서요!”

얼굴에서 배슬배슬 미소가 떠올랐다. 두 눈은 환희의 불꽃이 춤을 추듯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꿈이라니?”

“꿈속에서 용은 아내인 것 같은 여자와 배 속 아기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태양신이라는, 그…….”

“아낙시만드로스.”

답을 내려놓은 자는 뜻밖에도 크로노였다. 누트 멤피스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했다.

“짐을 놀리는 것인가? 이미 공유하고 있는 이야기였다면 따로 물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놀리는 게 아니에요! 저는 정말 아무에게서도 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요. 그 용은 아낙시만드로스의 피조물을 특히 저주했는데……. 크로노, 크로노는 어떻게 이 이야기를 알고 있나요?”

“글쎄. 오필리아 님, 이 경우는…….”

의문스러운 황자가 은백색 눈을 어물어물 내려뜨렸다. 사내가 대답 대신 쿠키로 손을 뻗었다.

“어허, 이번에는 안 돼! 궁금하단 말이야. 좀 이야기해달라고. 응?”

로보가 능청스럽게 크로노의 손등을 탁 쳤다. 크로노는 짜증을 부리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나머지 세 명의 눈빛에 못 이겨 턱을 괴었다.

그러나 과연 제국 레시우스의 3황자, 그에게서는 누트 멤피스에 뒤지지 않는 기품이 흘렀다. 그의 자세를 따라 자세 교정 연습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오필리아 님과 연관된 먼 미래에, 소용돌이치는 바다 위……. 누군가가 아낙시만드로스라 연신 비명을 질렀소.”

크로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사내는 너무 아름다워서, 계속 보고 있고만 싶었소. 흰 파도와 박동하는 대양을 끌어 모아 만들어진 것 같은 사내이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무릎을 꿇고 죄를 고하고 싶어지고, 더없는 부채감과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슬픔을 가져 오는…….”

두서없이 이야기하던 크로노가 두 눈을 감싸 쥐었다. 작열통을 느끼는 사람처럼 그는 눈가를 꾹 눌러낸 채 고통스러워했다.

“크로노! 괜찮아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크로노의 상태를 살폈다. 다친 다리는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맺히는 듯했다.

크로노가 괜찮다 손을 내저었다. 가끔 너무 먼 것을 헤아리려 할 때면 두 눈이 욱신거린다는 것이다.

“괜찮소. 내가 잘못 보았소. 이것은 오지 않을 미래나 다름없소……. 여기까지는 너무 가물어 잘 보이지도 않지. 그저, 그 ‘아낙시만드로스’ 하는 소리가 인상적이고도 처절한 바람에 나도 모르게 따라 발음하고 말았을 뿐이오.”

크로노가 몸을 바로 세웠다.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창백했지만 고통스러워했던 것이 거짓이라는 듯 그는 평소처럼 덧붙였다.

“오필리아 님, 당신께는 여전히 숙부에게서 도망치는 미래가 가장 또렷하게 할당되어 있소.”

또 그 소리였다. 말룸에게서 도망친다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고 회피하고 싶은 미래.

분위기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누트 멤피스는 크로노가 미래를 짚어내는 모습을 처음 목격해 상당히 놀란 듯했다.

“흐음…….”

왕이 비음을 흘렸다. 그는 생각을 정리할 때면 의미 모를 소리를 흥얼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협력하지 않았다면 후회할 뻔했군. 그대들이야말로 이 세계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직감이 든다.”

왕이 폭풍처럼 웃었다. 그러나 나와 로보, 그리고 크로노는 따라 웃지 못했다.

우리는 라딘라티와 내 건강 상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무너지는 내 몸의 재건이, 원작의 시간이 다가와도 살아남는 일이 유물을 파헤치는 일보다 급했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호기심이라는 악동을 붙여 놓았다. 우리는 누트 왕을 타박하는 대신 그의 첨언을 기다렸다.

“그대들의 말이 맞다. 하나이되 세 자아를 가진 용들의 협조로 이 땅의 생명은 태어나고, 늙어가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지. 그렇게 해서 순환하고 발전을 영위하는 것이다. 정체된 세계는 성장하지 못하니까…….”

왕은 찰나 자신의 왕국을 헤아리는 듯했으나 다시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후 완벽한 세상이 구축되자, 신들의 수장이자 태양신인 아낙시만드로스는 용이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 약조했지. 용이 선택한 것은 어느 인간 여자와의 혼인이었다.”

누트 멤피스가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그 여자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 없으나, 듣기로는 세네트의 명수였다 한다.”

로보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인어의 수려한 얼굴이 의문으로 갈라졌다.

“혹시 그 여자가 아가씨란 소리는 아니지?”

누트 멤피스가 픽 웃었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것 아닌가? 하지만 미심쩍은 것은 사실이군. 다른 행성 사람인데다 세네트 게임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았으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 여자의 환생이라면 말룸에게 더없이 미안해졌다. 짜 맞춰진 키메라 신세인 것만으로도 이해를 호소할 구석이 넘쳤다.

“아뇨, 저 평범해요.”

로보가 테이블 표면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하긴 그 여자의 환생이라든가 하면 설정이 너무 많이 몰린 셈이잖아. 웨이브 로망 문학원에는 이런 말이 있는데, ‘설정 과다’라고. 애초에 전생 같은 게 있기는 해? 난 안 믿는 주의야. 한 번 죽으면 끝이지. 전생이란 거 누가 만든 말인지 모르겠어.”

“삶에 미련 있는 사람들이 만든 거 아닐까요? 하하……. 아니면 지배 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든가.”

어색한 웃음이 공기를 차게 식혔다. 로보가 눈을 깜빡였다.

“지배 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니?”

“음, 이번 생에 천하게 태어나도 직분에 충실해 선업을 쌓으면 다음 생에 좋은 신분으로 다시 태어난다든지, 네가 지금 고난을 당하는 건 전생에 나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든지 하는 거요.”

“와, 진짜 별론데. 뭐야, 그게. 그런데 지배자 입장에서는 그것보다 편한 논리가 또 없겠어. 미신이나 종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홀려 들어가거든.”

로보가 곧장 가차 없이 평했다.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누트 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양 이야기를 이었다.

“어찌 되었든, 여자와 용은 세기의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태양신의 피조물은 자신과 같은 여자가 우주를 창조한 존재의 사랑을 받는 것을 심히 질투했지. 하여 여자에게 세네트 승부를 제안했다.”

“고작 세네트 승부를요?”

“전에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고대의 세네트는 신들의 놀이, 승리한다면 행동을 강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혼마저 흩어낼 정도로 막강한 저주를 걸 수 있었다. 신들은 상대에게 무를 수 없는 맹세를 강요할 때 세네트를 하기도 했지. 그 점을 들어 아낙시만드로스의 피조물은 세네트 패에 수작을 부렸고, 여자는 결국 패배해 목숨을 대가로 지불했다. 자연히 배 속에 자리한 용의 자식도 함께 숨을 거두었지……. 사랑하는 반려와 태어나지 못한 아기의 죽음에 분노한 용은 세상에 저주를 내렸다. 이것이 유적 전설의 골자인 셈이다.”

누트 멤피스가 내 낡은 세네트 상자를 가리켰다.

“그대에게 준 세네트 상자는 그 유적에서 나왔고, 용은 자식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아이의 혼이 여물 때까지 타 행성을 떠돌게끔 했다지. 그러다 때가 되면 아이를 이 세상에 다시 불러와 기존의 우주를 멸망시킨 후, 아이만을 데리고 새로운 우주를 창조할 것이라는데……. 어떤가. 섬뜩하지 않은가? 저주가 깃든 세네트인 것이다.”

누트 멤피스는 재미있는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년처럼 쾌활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나는 등줄기에 소름이 끼쳐 그의 말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어떤 전조도 없이 세네트와 얽힌 이야기를 꿈으로 꾸었고, 심지어 저주의 내용까지 생생히 읊어낼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가 보아도 이상했다.

“잠시만요. 저는 저주의 내용을 알아요. 꿈에서 봤거든요. 당신이 유적에서 본 내용과 일치한다면, 구세계 신들이 세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될지도 몰라요. 용이 신들에게 분노해서 행성을 떠나라 종용한 게 되니까요. 그러니 저주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누트.”

채근하듯 물었지만 누트는 용이 내린 저주가 어떤 것인지는 유적에 적혀 있지 않다고 했다.

“짐은 아는 것이 없으나, 모리구라면 얼마간 연구를 이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용의 저주가 실제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내렸다면, 저주를 파훼했을 때 요르나스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지. 좋다, 요정이여. 저주의 내용을 적어주면 그에게 전달하도록 하지.”

“네, 그렇게 할게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손쉬운 일이다. 흥미로운 일에 짐이 빠질 수야 없는 것이다!”

나는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만 꾹 쥐었다. 긴장감으로 손에 땀이 차 매끈매끈한 유리가 손아귀에서 자꾸만 빠져나갔다.

내 곁의 예언자가 묵묵한 낯을 벼렸다.

“진중한 이야기 도중 미안하오만.”

평소 티타임에 어울리지 않고 홀로 있는 일이 잦은 크로노가 특별히 자리했다면, 나를 만나야 할 이유가 있을 법도 했다.

“오필리아 님, 당신은 오늘부터 또다시 사흘 잠들 것이오.”

요즘 그는 이전처럼 두서없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심히 두렵고 혼란스럽겠지……. 하지만 다리도 곧 고쳐 거동에 불편함도 사라질 테니, 이후 부디 시간을 할애해 나를 배웅해주시오.”

나는 당연히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노는 나와 함께 관광 동굴 단지에 가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허락하자 크로노가 허리를 곧게 펴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그를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모습을 전시하는 듯도 싶었다.

“이것은 청원이오, 나의 신. 내 쓸모를 결정지어준 명왕의 사람.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크로노는 빗속에 있는 듯했다. 가물어든 그림자 안을 유영하는 것 같기도 했다. 또는 태양을 목전에 둔 이카로스 같기도, 신을 맨눈으로 목격한 신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비유적인 표현도 크로노의 속내를 알려주지는 않았다. 나는 그가 내린 조각웃음이 무척 마음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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