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97화
충격적인 고백이었지만, 말룸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그는 신에게 반기를 든 인간처럼 오만에 젖어 있었다.
뱀의 눈동자에 번드르르한 광기가 비쳤다. 마음이 깨져 생긴 물길은 아니었다. 그는 환희하고 있었다. 말룸의 뒤편으로 불꽃 속에서 신을 끌어내릴 갈고리를 만드는 대장장이의 형상이 비쳤다.
“라딘라티가 세계의 신으로 취급받고 있다면, 저는 신을 죽이는 방법을 찾아낼 뿐입니다.”
“신을…… 죽이는 방법?”
“네. 모리구는 라딘라티 편에서 많은 것들을 연구했으니 작은 단서라도 알고 있겠죠. 사정을 이야기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까마귀 날개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가 내 위로 이불을 내렸다.
“펜, 펜이요, 말룸.”
얼이 빠져 흘리듯 작게 이야기한 것도 그는 귀신같이 잡아냈다. 말룸이 만년필을 찾아 건네주었다.
“신을 죽이는 방법이라니. 물론 저희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자를 해치워야 하는 건 맞지만, 찾을 수 있겠어요? 라딘라티가 그저 그런 괴물인 줄 알았던 때와 신과 동일시되는 걸 알았을 때 다가오는 느낌이 너무 달라요.”
그가 단언했다.
“지금부터 찾아봐야죠. 찾아야만 하고. 걱정 마세요, 오필리아. 단지 방향이 조금 달라진 것뿐이니까.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걸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죠. 신과 같이 되었다 해도, 자신에게 할당된 신성을 파편 형태로 떼어내는 바람에 그자는 신성을 모두 간직하고 있었던 천 년 전에 비해 무척 약해졌습니다. 알렉산더가 공언했으니 정확하죠. 그러니 파편을 잃은 현 시점, 그자는 분명 신이 아닐 텐데……. 육신은 썩게 만들 수 있었지만 사념체에는 도저히 상처를 낼 수 없었습니다.”
“사념체에 상처를 낼 수 없다는 건, 라딘라티에게 어떤 힘이 더 숨겨져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말룸이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부디 그자가 신으로 취급받는 것일 뿐, 완전히 행성신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으면 하는군요. 두 개념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천지차이니까…….”
이후 그는 신을 죽일 방법을 찾아 지하로 향했다.
나는 한동안 노트를 매만졌다.
우리에게 너무 박한 세상이 아닌가, 정말 이 세계가 라딘라티를 신으로 세워 그의 죽음을 용인하고 있지 않은 것이라면.
결국 정보를 찾아 푸른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라딘라티는 달콤한 꿀을 늘어뜨려 우리를 꾀어내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벙벙히 앉아 있다가 노트를 꺼내 펼쳤다. 말룸이 연구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요점정리 수준이었다.
<세계 관찰 일지>
본 일지는 추측만으로 작성되어 내용이 명확하지 않음.
그러나 덧붙일 뿐, 내용의 삭제는 없을 예정임.
1. 현 상황에 대하여
―말룸은 라딘라티를 이 행성과 분리하려 했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는 이제 라딘라티를 신으로 간주, 신을 죽일 방법을 찾겠노라 했다.
―신관님들은 살해당한 분들의 장례식을 무사히 치렀다. 범인은 아라크네가 아니라 딸의 치료를 거부당한 황실의 고위 기사로, 파편의 힘을 펼칠 틈을 주지 않고 그들을 살해했다고 한다. 심지어 살해당한 대신관 중 하나는 의식 집행 신관으로, 파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관님들이 지닌 파편은 총 여섯. 크로노가 두 개의 파편을 가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밝혀진 파편의 수는 여덟 개. 파편은 대체 몇 개나 있는 걸까?
2. 라딘라티에 대하여
―찬란한 파도, 트리아이나. 누구보다 다정하고 상냥한 왕이었으나,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오천의 인어들을 제물 삼아 불사를 누리게 되었다. 생명을 증오해 숱한 학살을 벌였다. 엘로힘 오빠와는 영혼이 묶여 있다는데,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라딘라티가 죽으면 엘로힘 오빠도 죽고, 그렇게 되기 전까지 엘로힘 오빠는 안식을 얻을 수 없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세계는 라딘라티를 신의 대체품 삼아 신의 부재에 적응할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이제 라딘라티가 기능하지 않아도 행성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는 시점에 닿았다. 남은 것은 그의 처치뿐이지만, 신성을 잃은 라딘라티의 사념체를 해칠 수 없는 점으로 보아 그자가 완전히 신의 자리에 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말룸의 결론을 기다리는 수밖에……. 후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바다에 가면 힘을 잃는다고 한다. 그 때문에 말룸은 바다와 인접한 티포주 성을 봉인지로 선정했다. 말룸은 제물로 희생당한 인어의 원혼이 무언가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지 추정 중이라 했지만, 라딘라티가 그렇게 간단히 저주에 걸릴 존재인지는 잘 모르겠다.
―라딘라티는 포인세티아의 시신을 그릇으로 하고 오필리아의 영혼을 고정축으로 희생시키면서까지 나를 이 세계로 불러왔다. 방법과 이유는 불명. 말룸을 적대하기 위함이 아닌지 추측할 뿐이지만, 나는 정말이지 말룸을 해칠 힘이 없다.
3. 괴물에 대하여
―괴물이 된 순간에 고정되어 늙거나 자라지 않으며,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며 자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다.
―로보의 말에 의하면 죄의 경중에 따라 썩은 내가 난다고 한다. 모리구와는 달리, 말룸이 본 모습으로 돌아갔을 때 내가 그 악취를 맡아낼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모르긴 몰라도 그는 참 많은 죄를 지었겠지…….
―라딘라티는 이들을 귀찮아했던 듯하지만 ‘영원히 심복으로 있겠다’는 말룸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 고독에 취약한지도 모른다. ……아니다, 불사를 염원해 일을 벌인 자가 고독을 두려워하다니, 앞뒤가 맞질 않는다.
3-1) 말룸 발타사르
―내가 사랑하는 사람. 산양 뿔이 달린 거대한 뱀이 본 모습이며, 모리구의 말로는 한때 어린 괴물들을 책임졌다고 했다.
―스스로는 알지 못하고 있을까? 그는 깊이 망가졌다. 나는 당신을 쉬게 해주고 싶은데, 계속 무리하게 해서 미안해요, 말룸…….
3-2) 모리구
―세 발 달린 외눈의 까마귀. 멤피스의 책사로, 누트 멤피스에게 복종한다. 누트 멤피스 역시 모리구를 상당히 아낀다.
―수인족에 대해 호의적이다. 사막왕의 의사와는 별개로 그 역시 멤피스의 재건을 바란다. 멤피스에서 함께 어울렸다는 ‘그 애’와 관련된 일일까?
―믿기진 않지만 말룸을 형으로 여기고 있다. 아라크네와도 돈독한 듯하다.
3-3) 아라크네
―네 괴물 중 막내다. 다른 괴물들과는 달리 라딘라티가 직접 괴물로 만들어 데려 왔다고 한다. 라딘라티와 돈독한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레시우스 제국의 공작. 권력을 흡수하다시피 하고 있지만, 모리구의 말에 의하면 라딘라티가 말룸에 의해 봉인된 이후 그 충격으로 인해 심한 우울을 앓고 있다고 한다.
―내 다친 다리를 고쳐줄 수 있는 사람. 그의 특수한 능력과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영 감감무소식이다. 말룸과 사이가 무척 나쁜 듯하다.
3-4) 스콜피오
―전갈의 형태를 가진 괴물. 신전 측에 사냥 당했다. 이미 죽은 자이니 내가 신경 쓸 인물은 아닌 것 같다.
4. 세계에 대하여
―신들은 세상을 등지고 떠났다. 신이 떠난 충격으로 세계는 홀로 서지 못하게 되어, 붕괴를 피하기 위해 7할이 신인 라딘라티와 결속했다. 행성 내부의 자연스러운 시스템인 듯하다.
―신이 떠난 충격으로 행성에는 각종 재앙이 일어났다. 내가 요르나스로 온 해가 이례적으로, 평상시에는 기온이 널뛰듯 이상하다고 한다.
―멤피스는 불타버렸고, 엘드라코는 얼어붙었다. 레시암 대륙은 기후변화를 제외하면 큰 피해를 입진 않았다. 운이 좋은 셈이다.
―행성이 홀로서기를 할 만큼 신의 부재에 적응해 라딘라티를 처리해도 재앙이 극심해지지 않는다지만, 새로운 신이 나지 않는 이상 안정되거나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한다.
5. 기타
―세네트 게임은 신을 꺾어내기 위한 게임이었다.
―내가 꾼 꿈이 정말 상상력에 의한 꿈일까? 나는 어떻게 세네트의 천재라는 누트 멤피스를 단 한 번의 패배 없이 이겨내었을까. 꿈 생각이 선명하다……. 용의 울음소리와 차게 식어버린 여자의 형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검은 공책이 더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이것에 의지해 어둠을 걸어 내며 가까워지는 시간의 끝을 회피해야 했다. 원작의 정보도, 주변 인물이 알고 있는 것도 쓸모를 다했다. 판단과 직감만이 퍼즐을 완성하게끔 하는 조각이었다.
구세계의 신들, 용과 여자, 태양신 아낙시만드로스, 그리고 꿈 속 용이 내렸던 저주와 세네트 놀이…….
이 모든 것이 행성의 코어를 이루는 골자처럼 생각되었다. 파편의 수량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말룸은 내 꿈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건 그 사람의 특성이니 타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분명 세네트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 참나무 상자의 정체가 뭘까? 나는 낡은 세네트 상자를 들여다보며 한참 고민에 잠겼다.
퍼즐이 맞추어질 듯 말 듯 정보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몰두하지 못했다. 몸이 시시각각 무너졌다. 나는 하루 중 다섯 시간밖에 깨어 있지 못했다.
병든 닭처럼 졸다가 연명을 위해 모이를 먹듯 음식을 넘기는 일상이었다. 하루하루 찍어낸 듯 똑같은 침대생활이 계속되었다.
전처럼 두려움에 떨지는 않았다. 세네트에 몰두하느라 육신에 대한 걱정이 뒤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몰두하는 것은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다. 몰두야말로 치명적이고 심각한 문제를 외면할 수 있는 구실이었다.
방에서 벗어나진 못하고 있었지만, 대신 사람들을 초대할 수는 있었다. 라딘라티와 관련된 사정을 아는 내부자들은 속속 내 말상대를 해주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간단한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자꾸만 세네트에 관해 물었다. 왕은 의외로 빠르게 답을 내려주었다. 그저 내가 이상할 정도로 세네트를 잘 해서라는 것이다.
“정말 그것뿐이에요?”
내 표정이 어때 보였는지 누트 멤피스는 기분이 상한 낯이었다.
“이야기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만, 간간이 열리는 세네트 대회 우승자에게 돌아가는 상품이라고. 다른 의도는 없었다. 세네트 상자를 중요한 유물로 여기는 학자는 멤피스에 없고, 대회마저도 소규모에 불과하지. 세네트를 아는 자가 많지도 않고 인기가 있지도 않다. 노인 서넛이 참가할 정도일까?”
로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당신 왕이잖아. 중요한 유물 같아 보이는데 국가에서 보호해야 하는 거 아니야? 셋째가 고고학자라 이런저런 언어를 많이 봤지만, 이렇게 생긴 상형문자는 처음이야.”
“수인족의 주술사 계층이 쓰던 문자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일반적인 수인족 문자와도 다르지. 모리구의 말에 의하면, 수인족은 제례용 문자와 평상시 또는 관문서에서 쓰는 문자를 철저히 구별했다는군.”
누트는 태연자약했다. 뜨거운 모래 위를 맨발로 딛어도 멀쩡할 사람이었다.
“어쨌든 돈도 되지 않는 물건엔 관심 없다. 보존 주술이 걸려 있어 망가질 염려도 없고, 나보다는 세네트를 잘 다루는 자에게 가는 편이 낫지 않은가. 고작 놀이일 뿐인 일에 왜 그렇게 열을 올리는지 짐은 알 수가 없다.”
왕이 샐쭉 웃었다. 지금은 세네트 게임의 도중, 왕이 패를 던졌으나 패는 하나뿐이 뒤집어지지 않았다.
나는 패를 마저 던지고 결과를 확인했다. 그리고 말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여섯 칸을 전진하는 말이 거침없었다. 이번에도 나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