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96화
누트 멤피스에게서 세네트를 배운 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여자가 힘을 잃고 추락했다. 여자는 푹 고꾸라져 대지에 검은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식어가는 순간에도 만삭의 배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버텼다.
용의 자식을 품은 걸까?
나는 용이 무엇인지도, 이 행성에 실존하는지도 모르면서 문득 생각했다.
끝내 여자의 명치가 움푹 내려앉았다. 육신을 채웠던 것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는 과정이었다.
여자의 발 옆에 놓인 세네트 상자마저 검게 저물었다. 여자의 심장도 영원히 다물렸다.
거대한 용이 우주의 중앙에 누워 연인의 부활을 염원했다. 용이 인간의 축 늘어진 손을 콧등으로 밀었지만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또 용이 다시 검은 날개를 폭포처럼 펼쳐 여자의 몸 위로 드리워 따스하게 품었다. 하지만 진작 딱딱하게 굳어 하얗게 뜬 육신에는 온기가 돌지 않았다.
우주를 관장하는 용조차 한 번 멎은 숨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법칙이었고, 순리였다.
나는 치가 떨리게 두렵고 가슴이 쪼개지는 것처럼 슬퍼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그들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가족의 형상이었다.
그 둘이 공유했을 추억이 얼음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용은 마음이 몹시 고통스러웠는지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천 마리 맹수가 신음하는 것처럼 애통하게 울었다. 그는 생전 처음 상실을 겪는 듯했다. 별과 별을 잇고, 우주의 생몰을 계획하고, 직물 짜듯 순리를 엮는 우주룡조차 상실의 고통을 피해가지 못했다.
마침내 용이 길게 울며 주변에 내린 은하계를 아주 박살냈다. 간단한 몸짓만으로 몇 백의 은하계가 죽었고 수천의 작은 별들이 사라졌다.
나는 신을 받은 사람처럼 몽롱해져선 직감했다.
우주가 죽어도 저 용은 죽지 않을 것이다. 저 용에게는 영원이라는 개념조차 무의미하다…….
정신을 반쯤 잃은 용이 아무렇게나 증오했다.
생명의 용 나베르타, 늙음의 용 메오게레타, 죽음의 용 세네트가 잿빛 활 무르무나스와 별빛 갑주 오르도로스, 흑색 검 칼리를 걸고 저주한다.
우리의 아내와 자식을 앗아간 아낙시만드로스의 피조물이여, 그 앞길에 절멸 있으라!
신이 떠남에 행성은 재앙을 맞이할 것이며,
교만이 고립을 이끌어 정체된 삶을 영위할 것이다.
미혹이 생명을 뒤엎어 죽음을 끓게 하고,
태양을 회피한대도 물길이 가물 것이며,
채 식지 못한 불길이 푸른 초원을 사막으로 바꾸어
강물조차 너희를 건져 올리지 못하리라.
사랑이 바다를 망쳐 유대를 잡아먹고,
정체된 관념이 화합을 매듭지을지니.
끝은 붕괴요, 영혼의 두려움.
여정의 끝, 곧 세 번 죽음으로 사죄할 지어다!
곧 하나이되 세 마리인 용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나베르타와 메오게레타와 세네트가 발을 구르고 발톱으로 별을 긁으며 크게 울었다. 세상의 끝이었고, 신과 행성의 단절이었다.
막 청소년기에 접어든 어린 행성 요르나스는 용의 자비를 되돌리지 못했다. 뒤늦게 찾아온 요르나스의 태양신이 온기를 내어 용을 달래려 했지만 하나이되 세 마리 용은 마음을 녹이지 않았다.
지성 있는 것들 중 가장 약하고 가장 빠르게 숨을 잃는 것이 영원조차 무색한 초월자의 속에 말뚝을 박았다. 용은 결빙된 채 우주의 창생과 멸망을 반복하며 다시는 재건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꿈을 꾸었어요. 어때요, 신기하죠? 요르나스에는 용 전설이 있다면서요.”
말룸은 흥미로운 기색이었다. 그는 기꺼이 내게 수건을 내밀고 머리를 맡겼다. 나는 남빛 머리칼의 물기를 지그시 문질러 없앴다.
이제 그는 제법 자연스럽게 머리칼을 맡겼다. 필요하지 않음에도 행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이었다.
“오필리아. 인간의 상상력은 끝이 없다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목소리의 웃음기가 얄미웠다.
“뭐예요, 안 믿는 거예요? 허무맹랑한 얘기긴 하죠. 그래도 지금까지 제가 꾼 꿈은 모두 특별했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길게 하품했다. 몸의 긴장이 풀린 이후로는 위험을 느끼지 못하겠다. 몸의 본능이 죽어 그러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간밤의 꿈이 촉매가 되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제가 세네트를 내리 이기는 건 신기하지 않아요?”
나는 세네트 상자의 모서리를 검지로 매만졌다.
“누트 멤피스가 상이라면서 이것도 주고 갔어요. 뭘 엄청 고민하더라구요.”
탁상 위에 손이 닿는 것만으로 무너져 내릴 듯 낡은 보드게임 상자가 하나 있었다. 누트 멤피스의 것처럼 황금으로 만들어지지도, 청금석으로 치장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 낡은 세네트 상자는 참나무로 만들어졌다. 말은 일곱씩 한 쌍이 들어 열네 개가 꼭 맞았다.
“어떤 신전 유적에서 발굴된 거라는데, 세네트의 명수에게 주어지는 상품이래요. 원래는 왕이 대회에서 우승해 상품으로 받았었는데 그 사람을 제가 이겼으니까 이 참나무 상자의 주인은 저라던데요.”
“같잖은 수작을 부리는군요.”
“그 사람 저한테 사심 없는 거 알잖아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나는 비뚜름하게 응대하는 말룸의 팔뚝을 찰싹 때려주었다.
“자꾸 그럴 거예요? 굳이 말하자면, 왕은 나라 일구는 데 정신이 팔려서 사랑을 시시콜콜한 일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저도 그랬습니다, 오필리아. 그리고 보통 그런 자들이 상대에게 빠지면 걷잡을 수가 없죠.”
내가 한 번 노려보자 말룸이 한숨을 쉬며 세네트를 관찰했다.
“뭐, 좋아요. 그나저나 이 상자…… 낡아 보이는데. 이걸로 세네트를 할 건가요?”
“아뇨. 가끔은 괜찮겠지만 함부로 굴리기에는 귀해 보여서요. 왕에게 은으로 된 세네트 상자를 따로 받았어요.”
아무래도 유물에 가까운 물건이라 게임을 하기에는 망설여졌다. 저 세네트 상자는 손에서 놀아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유물을 관리하는 박물관에 있어야 할 듯했다.
“특이한 건 참나무 상자에 말을 넣는 공간 말고 밑에 수납공간이 하나 더 있다는 거예요. 조각을 끼워 넣으라는 것처럼 아홉 개로 나뉘어 있는데, 비어 있고요.”
“보석이라도 넣어 두는 곳이었나 보죠.”
“하지만 왕의 세네트에는 그런 공간이 없는 걸요.”
“그자는 탐욕스러우니 개인 금고를 수십 개쯤 만들어 두지 않았겠어요? 수납공간이 따로 필요하진 않겠죠.”
그는 시종일관 시큰둥했다.
말룸은 가끔 이해가 힘들 만큼 호불호가 뚜렷해 어떤 부분에서는 나와 잘 맞지 않았다. 게다가 개인 금고라니. 나는 자기소개 하는 중이냐 쏘아붙이려다 말았다. 어쨌든 남편과의 언쟁은 피하고 싶었다.
“기분 상했어요? 흥미 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당신 말이니 허투루 넘기지는 않을게요.”
말룸이 수건을 건네받으며 나비처럼 웃었다. 그는 나를 바라볼 때만은 햇살에 누그러지는 안개처럼 자신을 낮추었다.
“수인족은 고대의 신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은 종족이었습니다. 그런 유물이 하나둘 발굴되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엘프는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신을 숭배하지 않았고, 인어들은 워낙 일족의 권위가 높은데다 신과도 왕왕 교류했기 때문에 신을 숭상하기는 했지만 수인족처럼 신전을 세우지는 않았죠. 지금의 유적지에 구세계 신들의 이야기가 아직 보존되어 있는 것은 놀랍지만, 누트 멤피스의 곁에는 학자 기질이 짙은 모리구가 있으니 영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럼 용이 실존했을 수도 있겠네요. 말룸은 궁금하지 않아요? 옛날 신들이나 꿈에 나온 용에 대해서요.”
“별로. 내 동화는 여기 있는 당신이니까.”
지구에서 온 외계인은 동화 속에서 살았지만 그는 현실에 살았다. 말룸은 평범한 행복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동화를 바라고 있었지만, 손에 넣은 이상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더 이상 동화가 아니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묘한 대화로 부드러운 분위기가 물에 쓸려 사라졌다.
하지만 특별히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이 딱 붙으면 내가 그인지 그가 나인지 알 수 없어지고 말아 적당한 선이 있는 편이 나았다.
수건이 흠뻑 젖어버렸다. 말룸이 주술을 활용해 채 마르지 못한 머리칼을 배싹 말렸다. 그는 어디론가 향하려다 말고 뒤로 돌아 침대 위에 앉은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내 이목구비를 조각하듯 그렸다.
“좋아요. 알렉산더나 모리구에게 용에 대한 걸 따로 물어보겠습니다. 그럼 되는 거죠?”
“응, 고마워요.”
“하지만 알렉산더에게는 기대하지 말아요. 그 사람은 요르나스와 자기 일족에 대한 얘기를 지나치게 아끼니까. 용에 대해 알고 있을 게 틀림없지만, 이야기를 들려주진 않을 겁니다.”
말룸이 애틋하고 따뜻한 눈동자를 하곤 내 살결을 매만졌다. 나는 물러 흐르지 않는대도, 썩지 않는대도 그는 믿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보. 일기 아직도 써요?”
“일기도 쓰고 기록도 해요.”
허벅다리 옆에 놓아 둔 검은 공책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 끝의 지문과 가죽 표지의 결이 맞물렸다. 처음부터 한 쌍인 것들이었다.
“기록할 게 더 남았나요? ‘말룸 관찰 일지’의 소재는 다 떨어진 줄 알았는데.”
짓궂은 웃음이었다.
커다란 사내가 내가 걸터앉아 있던 침대에 올랐다. 푹신한 바닥이 출렁였다.
“당신 일 안 가요?”
당황해서 아무렇게나 이야기했다. 말룸이 대꾸 없이 몸을 붙여 침대에 풍랑을 내렸다. 그는 내가 균형을 잡지 못해 모로 기울자 허벅다리 위로 나를 눕게 했다.
“조금 늑장 부리는 건 일정에 지장 없어요.”
요즘 그의 땡땡이를 부추기는 사람이 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말룸은 밤까지 일을 하니 좀 쉬어야 했다.
“무리하지 마요. 일 안 해서 파산하면 인형 눈이라도 붙여서 책임질게요.”
“그럴 일 없으니까 돈이나 펑펑 써요. 사치하라고 열쇠를 주었더니 사는 것도 없어 보이고.”
“어색해서요……. 절약하면 좋은 거잖아요.”
“절약할 필요가 없는데도 절약하잖아요. 당신이 많은 걸 누렸으면 합니다. 나 참, 사치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할 줄이야. 경매에 참가해보는 건 어때요?”
“성에 있을래요. 외출할 정신이 있는 건 아니라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금빛 머리칼이 시야를 가렸다. 나는 치워내지 않았다. 기다리면 그가 시야를 밝게 해줄 것이다.
“그래서, 오필리아. 연구 관찰 현황은 어떻죠?”
“말룸 관찰 일지는 마무리됐어요. 이제는 ‘오필리아’랑 모리구, 그리고 요르나스 관찰을 하는 중이에요.”
“관찰할 게 많이 늘었네요.”
“그래도 기뻐요. 할일이 생긴 거잖아요. 가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봐 무섭기는 하지만.”
“요르나스도 관찰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괜찮아요, 만약 그런 일이 있어도 함께 감당해줄게요. 요르나스 연구는 썩 잘 되나요?”
“응, 거의요.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요.”
공감하지는 못하겠지만 남편은 그대로 내 입술을 머금어 산뜻한 응원을 건넸다.
숨이 맞닿을 정도로 지척인 거리에서 말룸이 낮게 속삭였다.
“당신 다리가 다 나으면, 불꽃을 쏘아 올려요. 불꽃놀이를 하는 겁니다. 불꽃은 어느 때고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죠. 불은 모든 문명의 근원이라서,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갈망하게 되니까……. 고리타분한 세네트 같은 것보다 훨씬 아름다우니 당신 마음에 깊이 흔적을 남길 거예요.”
“바쁜 것 같던데 괜찮아요?”
말룸은 황금 사냥이 끝났는데도 쉬지 않았다. 영지의 일을 처리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라딘라티 처치와 관련된 연구를 계속하는 듯했다.
말룸은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내게 말을 하는 법이 없었지만, 특별히 진전이 없다는 것만은 좀 알겠다. 참다못한 말룸은 연구의 진전을 위해 모리구의 뒷덜미를 잡아 사람 눈이 비치지 않는 지하로 숨어들기까지 했다.
“전 늘 방향을 찾아냅니다.”
그가 내 일기장에 시선을 주었다.
“당신 연구에 도움을 좀 줄게요. 지금까지 저는 라딘라티가 불사를 영위하게끔 한 주술을 해제하기만 하면 그자를 흙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세계와 분리하는 주술을 연구하고 있었죠.”
그의 샛노란 눈동자가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지식의 바다를 여행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확실해요. 그자는 신의 자리를 대체했어요. 모리구가 공언하더군요. 녀석은 이전부터 어떤 것을 읽어내는 데 타고났죠. 조슈아가 지닌 파편의 능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지만, 모리구의 것이 조금 더 상위의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라딘라티를 죽일 수 없는 건가요?”
“신이 아닌 우리의 능력으로는, 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