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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95화 (95/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95화

08. 시간의 끝

겨울이 매몰차지는가 싶더니 때 이른 훈풍에 기세가 꺾였다. 3월 초, 쌀쌀맞은 봄은 차림새 꾸리기를 어렵게 했다.

아이바르가 두꺼운 모피 망토와 목도리를 입혔다 벗기기를 반복했다. 나는 털을 몸에 이면 급히 더워했고, 벗으면 떨어댔다. 엘로힘은 몸이 자정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황금을 닮은 고대의 엘프가 이끼 낀 낯으로 내 털옷을 받아 팔에 걸쳤다.

나도, 엘로힘도 포인세티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와 나 사이의 벽이 마른 핏물처럼 뚜렷했다. 엘로힘은 내심 나의 끝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무심했다.

“좋지 않다. 아무리 더워해도 땀이 나질 않는 걸 보면. 몸이 어서 나아야 할 텐데…….”

엘로힘이 종종 짓는 애수 어린 미소나 다정한 말씨는 이승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내 곁에 있었으나 저승에 살았다.

“감기에도 걸리지 않고.”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원하는 차림을 해라. 속박당하지 않는 옷을 좋아하잖나.”

엘로힘은 만약 그렇게 하면 춥고 추워하지 않고는 내 선택에 따른 일이니 누구도 책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무거운 옷가지를 바닥에 내렸다.

티샤가 옷가지들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티샤는 신방이 어질러지는 꼴을 잠시나마 두고 보지 못했다. 나는 흔적을 남기지 못해 아쉬워했다.

티샤만큼 일에 충실한 사용인은 흔히 볼 수 없었지만 충실의 목적이 내 안위임은 불확실했다.

유리감이 들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폭풍에 휘말린 듯 나무 이파리까지 빠짐없이 회전했다. 그런데 나만이 어떤 역할도 배정받지 않았다.

나는 해가 뜨면 검정 노트를 집어 상황을 추렸고, 머리 위로 불공이 옮겨 가면 누트 멤피스와 토론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희미한 달빛이 대지를 온건히 적시면 노트를 뒷장부터 펼쳐 일기를 썼다. 기록과 삶 전부 느슨한 권태에 젖어 나는 꿈속에 있었다. 이것이 평화라면 삭막했다.

말룸도, 누트 멤피스도, 엘로힘도, 다른 사람들도 바빴다. 대신관 장례 주도 건으로 신전에 머무르겠다던 조슈아 님과 카사블랑카, 렉스 님은 무슨 일이 더 있는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로보는 케이론 호를 따로 출항시키고 인어 선원들을 통해 아틀란티스 내부 사정에 관여하겠노라 했다. 그는 쉼 없이 나아가는 청색 파도보다 역동적이었다.

티샤는 여동생 결혼 준비로 부쩍 수척해졌다. 여동생의 짝 되는 자가 도벽이 있다는데, 잡혀갈 때 가더라도 손목을 끊어 놓아야 하는지 고민이란다. 아이바르는 여전히 수줍음을 타 말이 없었고, 모아는 모리구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쿠키를 내오다 말고 눈물바람이었다.

까마귀가 속을 다잡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초조함과 결핍을 걷어 내었지만 자유롭지는 않았다. 모리구는 마치 속박당한 것처럼 항상 왕의 곁에 있었다.

왕은 업무를 보지 않는 때 황금 찬란한 비공정에 사람을 초대해 보드게임을 즐겼다. 태양빛 배는 하늘을 나는 공중정원이었고 왕의 연회장이었다.

누트 멤피스가 비숍을 닮은 보드게임 말을 손에 넣고 굴렸다. 말은 눈에 띄는 에메랄드빛이었다. 화려함이 누트 멤피스의 굳건함을 닮았다. 누트가 계속 말을 움직이는 바람에 말은 좀처럼 왕의 손 안에 머물지 못했다.

누트 멤피스가 승기를 거머쥐었다.

“네 칸 전진, 짐의 승리로다.”

청색 말이 승기를 잡고 흰 말을 넘어뜨렸다.

카르나크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모든 백색 말이 누트 멤피스에게 잡혀 죽었다. 왕은 희롱하듯 도전을 강요해 놀이에 끌어들인 자신의 신하를 단죄했다. 소일거리 치고는 카르나크도, 누트 멤피스도 보드게임에 진심이었다.

모리구는 옆에서 수식을 풀고 있었다. 그는 누트 멤피스와 카르나크가 말을 거둔 와중에서도 역시 두 눈이 있었을 때보다 피로가 심하다느니 투덜거렸다. 그 틈을 타 왕이 다시 승리했다. 모리구가 햇살처럼 뜨거운 자부심을 갖고 어깨를 쭉 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 가르쳤어! 누트를 세네트로 이길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니까.”

“모리구여, 그대는 짐에게 세네트를 가르쳐준 지 나흘 만에 항복했잖은가. 이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 꼬마 짐에게 져서 시무룩한 꼴이란, 다시없을 구경거리였다!”

누트 왕의 짓궂은 언사에도 모리구는 기분 상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만큼 네가 잘한다는 거지. 형수님, 누트는 정말 잘해요. 저는 누트를 어릴 때부터 알았는데, 세네트 신의 축복이라도 받는 건지 처음 배울 때를 제외하곤 지는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라니까요.”

“확실히 잘하는 것 같아요. 카르나크 씨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옆에서 커피를 홀짝였다.

머릿수대로의 커피 잔이 호위하듯 게임 판을 둘러쌌다. 호위할 만큼의 값을 지닌 물건이었다. 부와 영광을 사랑하는 누트 멤피스답게 직사각형 게임 판은 황금이었고 말은 보석이었다.

커피 한 잔씩을 추가로 비운 왕과 카르나크가 다시 세네트에 열중했다. 나는 누트 멤피스와 카르나크의 겨루기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세네트는 윷놀이와 닮았지만 그보다 심화된 게임으로, 머리를 잘 써야 했다. 운과 지혜 모두가 없으면 승리할 수 없었다.

누구나 즐길 수 있을 만큼 쉬우면서도 신비로운 문자가 새겨진 다섯 개의 칸이 있어 단조롭지는 않았다. 나는 그 문자들도 주의를 기울여 관찰했다. 언어에 조예가 깊지 않아 기원을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일정한 형상을 띤 것을 보니 상형문자 같았다.

호기심이 치밀었다. 엉덩이가 의자에 딱 붙고 눈앞에 세네트 놀이판이 어른거려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나는 누트 멤피스에게 규칙 설명을 부탁하기로 했다.

“어떻게 하는 건가요?”

그러자 누트 멤피스가 안내집이라도 발간하려는 사람처럼 세세히 설명했다.

놀이판은 모두 서른 개의 칸으로 나누어졌다. 1번 칸에서 출발해 ‘ㄹ’자 모양으로 경로를 잡아 서른 번째 칸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말은 총 일곱 개였다. 전진 방법은 한쪽 면이 검게 칠해진 네 개의 패를 던져 결정했다. 한 개가 뒤집어졌을 때는 한 칸 전진, 두 개가 뒤집어졌을 때는 두 칸 전진하는 식으로, 모두 뒤집어졌으면 네 칸 전진하거나 말 하나를 네 번째 칸에 올렸고, 아무것도 뒤집어지지 않았을 때는 여섯 칸 전진하거나 말 하나를 여섯 번째 칸에 올렸다. 첫 번째에서 세 번째 전진에서는 말을 판 위로 올리지 못했다.

그는 다섯 개의 특수 칸에 대해 설명할 때 특히 기운을 쏟았다.

“이 특수 칸들이야말로 놀이의 승패를 가르니 새겨들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누트 멤피스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너그러운 미소를 띠었다.

“열다섯 번째 칸에 있는 문자는 심장, 생명을 상징한다. 이 칸에 위치한 말은 잡지 못하지.”

그는 열다섯 번째 칸 위에 백색 말을 하나 두고 청색 말로써 그것을 지나쳤다.

“스물여섯 번째 칸에 있는 것은 악기. 세상만사 쾌락을 상징한다. 이 칸에 닿으면 한 번 더 패를 던질 수 있다.”

누트 멤피스가 손바닥 길이 정도로 비죽 솟은 패를 가리켰다.

“스물일곱 번째 칸에 있는 문자는 강물. 생명의 추락, 즉 죽음을 상징한다. 이 칸에 놓인 말은 첫 번째 칸으로 되돌아가야 하지.”

청색 말 하나가 첫 번째 위치로 옮겨졌다.

“스물여덟 번째 칸에 있는 글자는 새를 표현하기도 하고 영혼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칸에 위치한 말은 패가 세 개 뒤집어졌을 때 도착점으로 보낼 수 있지.”

그가 말 하나를 도착 지점으로 치웠다.

“스물아홉 번째 칸에 있는 것은 천칭이다. 가끔 사람 셋으로도 표현되지. 천칭이 그려진 세네트도 있고 사람이 그려진 세네트도 있으니 취향에 따라 골라잡으면 된다. 특히 사람 형상으로 된 문자는 생전의 업을 심판하는 판관을 상징하지. 스물여덟 번째 있는 칸과 효과는 같지만, 패가 두 개 뒤집어졌을 때라는 조건만이 다르다.”

나는 누트 멤피스 대신 스물아홉 번째 칸의 말을 도착점으로 보냈다. 왕이 치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서른 번째 칸의 태양. 도착점이다. 삶의 여정이 끝나 태양에 귀의했음을 의미하지.”

나는 세네트 판을 빤히 바라보다가 평했다.

“신화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바로 보았다! 이 세네트는 고대 태양신을 섬기던 수인족에게서 유래했지. 모리구의 말에 의하면, 과거에 세네트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일종의 제례 의식이었다는군.”

누트 멤피스가 내 쪽으로 세네트 판을 밀었다.

“어떤가. 한 번 해보겠나? 너무 일만 하면 진전이 없는 법이니, 가끔 머리를 식히는 것도 좋겠지.”

나는 기꺼이 일곱의 청색 말을 받아들었다.

세네트가 오후의 태양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새 것인데도 세월이 느껴지는 기묘한 물건이었다. 태양을 받으니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왕이 제 몫의 백색 말들을 정렬했다. 그의 입매가 굳게 다물렸고, 눈빛이 단정하게 가라앉았다. 출정을 앞둔 백전노장이 따로 없었다. 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일곱 말을 한데 뭉뚱그려 왼편에 두었다.

새 게임에 들뜬 왕의 목소리가 커졌다. 목소리가 깊고 단정해 오후의 태양을 닮았다.

“세네트는 까마득한 고대에 기원한 놀이다.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여정을 상징하지. 수인족은 죽음을 맞이하면 태양신 아낙시만드로스의 보좌, 메헨과 세네트 게임을 해 이겨야만 죽은 영혼이 태양신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는군.”

왕이 신이 나 패를 높이 던졌다. 세 개의 패가 뒤집혔다.

“재미있는 옛이야기 아닌가!”

게임이 시작되었다.

왕의 말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누트 멤피스가 보드게임 신의 가호를 받는 것 같다는 모리구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숙련된 플레이어였고, 나는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초보자였다. 하지만 왕에게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확신이었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거듭 들렸다. 내 몸은 보드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앞으로 굽어들었다.

누트 멤피스가 먹구름을 만나 비행 궤적을 놓친 사람처럼 점차 여유를 잃어버렸다.

게임은 단숨에 끝났다. 파도가 배를 집어삼키듯 나는 누트 멤피스의 백색 말을 남김없이 처형했다.

“아……. 제가 이겼어요.”

목소리가 먹먹했다. 내 청색 말은 어수룩한 듯 굴면서도 하나도 빠짐없이 도착 지점을 통과했다. 모리구가 옆에서 누트 멤피스의 어깨를 툭 쳤다.

“봐주면 어떡해? 아무리 형수님이 처음이라지만.”

왕의 얼굴이 금 간 바위처럼 갈라졌다.

“봐주지 않았다.”

“뭐?”

“다시, 다시 승부를 겨루자, 요정이여!”

왕은 승복하는 법이 없었다.

“요정이라고 하지 말라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기꺼이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판이 거듭해도 누트 멤피스는 나를 이기지 못했다.

왕의 실력은 분명 뛰어났고 기교도 화려했지만 그는 특수칸에 발이 묶이거나 패를 잘 뒤집지 못해 말을 판 위로 올리지 못했다.

나는 누트에게 열 번을 내리 이겼다.

비공정에 엄숙한 고요가 내렸다.

손에 들린 청색 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머리라기보다는 용머리를 보는 듯했고, 원뿔형 몸통에는 비늘까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어 멋스러웠다. 그것이 꼭 내게 미소 짓는 듯했다.

이후 내게 도전한 모리구도, 카르나크도 단번에 졌다. 그들은 누트보다도 나를 당해내지 못했는데, 판에 말을 올리고서 열 칸을 채 다 움직이기도 전 내 말에 잡혀 버렸다.

규칙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결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하는 게임인지라 그저 직감적으로 패를 던지며 말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질 것이라거나 승부의 방향을 알 수 없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직 승리만이 내 길이라는 양 세네트는 내게 태양을 쥐여 주었다.

나는 곧 세네트에 흠뻑 빠져들었다.

세네트를 할 때면 머리가 요람에 잠긴 듯 고요히 가라앉았다. 이제는 째깍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만의 챔피언을 격파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모리구가 살짝 입을 벌려도, 카르나크가 진귀한 구경을 했다는 듯이 샐쭉 웃어도, 누트 멤피스가 자존심이 상해 세네트 판을 정리했을 때에도 나는 아궁이 앞에 앉은 듯 편안함을 느꼈다.

“기이한 일이로군.”

왕이 사막의 밤처럼 고요히 중얼거렸다. 그의 청색 눈동자는 방치된 보석처럼 텁텁한 먼지에 둘러싸인 듯했다.

“요정이여. 세네트는 상대를 꺾어내는 놀이다. 그 대상이 신이든, 인간이든, 수인족이든 항복하게끔 만들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할 기회를 얻어내는 것이지.”

“상대를, 꺾어내는 놀이…….”

나는 훑어내듯이 따라 발음했다. 누트 멤피스는 생각에 잠겼는데, 그의 얼굴에는 손님맞이에 대한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후 왕은 내가 비공정을 떠날 때까지 침묵했다. 징그러운 말거미가 손등 위에 떨어져도 미동조차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저 고고한 누트 멤피스의 반응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세네트 말의 머리는 단정한 미소만 지을 뿐으로, 나는 오랫동안 그 무생물과 눈싸움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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