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94화 (94/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94화

「까마귀의 둥지」

멤피스가 태양빛에 불타 사라진대도 저토록 울어대진 않을 것이다.

모리구가 침대에 고개를 푹 처박았다. 작고 예쁜 뒤통수가 둥그스름했다.

까마귀는 숫제 사냥감을 빼앗긴 사냥꾼처럼 엉엉 울었다.

마음이 떠내려갈 듯했다. 저 눈물을 열사지대의 하늘 위로 드리우면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기도에 화상을 입진 않겠지.

각종 방책으로 지면의 온도를 내리눌러 이제는 숨 쉬는 것만으로 열에 녹아 죽어가지는 않았지만 누트 멤피스는 그런 상념을 품었다.

왕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붙인 뾰족한 청금석 귀를 의미 없이 매만졌다. 차가운 금속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그를 속박했던 지하 감옥의 환영이 사라졌고 유약한 비명도 물러갔다. 그러나 모리구가 해다 준 이 귀보다야 까마귀의 머리칼을 손바닥에 바짝 가져다 대고 싶었다.

누트 멤피스가 물의 깊이를 가늠하듯 모리구를 한참 응시했다.

“모리구여, 요정에게서 더 많은 지식을 얻어 왔는데 보지 않을 텐가.”

“이 눈치 없는 놈, 아예 나가버려!”

“요정이나 대공에게는 부리를 얌전히 놀리면서 어찌 짐에게는 매양 뾰족 쏘는 말이나 하는 것이냐.”

“네가 눈치가 없어서 그래!”

“참, 아이 키우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군. 이래서 짐이 가정을 꾸리지 않는 것이다, 짐의 자녀들이 한 고집 할 것이 분명해서.”

“바람둥이!”

“응? 짐은 상대와 사귀며 단 한 번도 바람을 피운 적이 없을진대.”

모리구는 대꾸할 가치를 잃었는지 계속 훌쩍훌쩍 울며 처량한 척을 한다.

“헛소리 하지 마. 안 속는다구, 난 바보가 아니야. 내가 널 만들었어. 왕과 신하라는 상하관계와는 또 다른 문제야. 내가 널 선택한 거야, 누트. 이름도 내가 붙여주었어……. 그 이름은 우주와 재생과 부활을 의미하지. 그리고 내게 있어서 굉장한 의미를 갖는 명칭이야. 나는 네가 멤피스를 재건할 수 있단 걸 단번에 알아봤단 말이야. 산꼭대기의 경매장에서부터 알아봤다고. 넌 멤피스를 살려야 해. 그게 네 전부야!”

“짐은 네 안목을 얕보는 말이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시끄러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그 이야기는 또 오래간만이구나. 벼랑 끝에 몰리긴 한 모양이지? 발타사르 그자는 과거의 연이 아닌가. 모리구여, 너와 함께 미래를 걸을 자는 다름 아닌 짐이다.”

그러나 모리구는 이불을 제 위로 덧대어 왕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숨어 버렸다.

왕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사내의 무게를 따라 이불이 움푹 꺼졌다.

티포주 성이 아름다워 산책을 권할까 싶다가도 말룸 발타사르가 감시를 심어 두어 쏘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오필리아는 대공이 하는 짓거리에 대해 영 모르고 있는 듯싶었으나 그는 누트 자신과 모리구, 그리고 수행원들의 시시콜콜한 행태를 빠짐없이 보고받고 있었다. 속내는 더욱 음습하겠지.

왕은 대공에 대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말룸 발타사르는 모리구의 장기를 빠짐없이 녹여 버리는 강산성이었다.

“멤피스를 낙원으로 가꾸어주겠다고 약조했잖느냐. 짐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냐? 그만 울거라, 응? 목이 상한다.”

“인어의 창이나 아버지의 노여움, 그리고 신관들이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아버지의 신성 조각이 아니라면 나는 다치지도, 아프지도 않아.”

“육신이라기보다는 맘이 상한다.”

“정말 귀찮게 하네!”

소년의 주변으로 불길한 기운이 소용돌이치듯 운집했다. 그것도 잠시, 까마귀는 도리어 자신이 놀라 저주를 흩어 버렸다.

누트 멤피스가 팔짱을 끼고 비음을 흘렸다.

“나를 해체할 셈이었나? 그런 다음 네 입맛대로 재조립하고. 너는 무엇이든 해체하고 재조립할 수 있는 저주를 타고났잖느냐, 모리구. 그것이 천성이든 기억이든 무엇이든.”

“아냐, 그게 아니야. 나는 널 상하게 하지 않아…….”

“시장에서 비싸게 주고 산 실험체이기 때문에?”

“어어엉, 몰라, 아닌 거 다 알면서, 바보!”

소년이 칼칼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이불 속에서 여태 나오지 않은 모양이 구름 뒤로 숨은 달처럼 소심했다.

“농이다. 이전처럼 이야기책이라도 읽어주랴?”

모리구는 답하지 않았다. 왕은 그것이 까마귀 나름대로의 긍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모리구와 함께 한 지가 오래 되었다.

“먼 옛날 비가 오지 않는 대륙이 있었다. 신의 날개가 용의 이빨에 찢겨 행성을 돌보지 못한 탓이다. 대륙의 이름은 멤피스, 얼어붙은 엘드라코와 마찬가지로, 신과 행성이 결별하며 재앙이 내린 땅. 물을 구하기 위해 수인족은 기도가 타들어가는 아픔을 간직하고 비를 내리는 황금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었다…….”

“그 얘기 싫어. 다른 거 해줘. 너무 많이 들었단 말이야.”

“내 구연이 맘에 들지 않은 모양이구나.”

누트 멤피스가 모리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둥그스름한 뒤통수는 어느 한 구석 넓적한 면이 없었다.

모리구여, 네 부모는 네가 태어나 굉장히 기뻐했을 것이다. 작은 머리 한 구석 눌려 모양이 상하지 않도록 밤새 자세를 바꾸어주며 심혈을 기울였을 테지.

인간 마음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토록 공을 들여 키웠으면서, 결국 배척하고 쫓아내어 유적을 전전하게 만들었어.

“너는 상냥하다, 모리구야.”

“듣기 싫어.”

“네가 짐의 스승이고 형제고 어버이다. 응?”

청년이 깊이 웃었다. 까마귀가 맘이 풀린 듯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붉게 달뜬 눈가를 왕에게 보였다.

“이제야 얼굴을 보여주는군. 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좀체 자라지 않아. 그렇게 영원히 아이처럼 순수하여라.”

“싫어. 내가 애라니, 누가 들으면 비웃겠어. 넌 아무것도 몰라.”

“상관없다. 적어도 짐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라지 못할 것이 아닌가. 이 누트 멤피스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왕이 사막을 뒤덮은 풀이며 강줄기를 마주한 것처럼 곱게 웃었다. 모리구는 한때 자신의 실험체였던 왕의 면면을 기억하듯 빤히 응시했다.

“네 맘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너는 있지, 누트, 나 같은 녀석을 경계해야 해. 나야말로 돌에 기생하는 이끼거든. 개울물에 떠밀리듯이 사는 거머리거든.”

모리구는 이따금 누트 멤피스를 자신의 왕으로 선택한 것이 잘한 결정인지 의문이 치밀었다.

능력에 하자가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누트 멤피스는 노예 시장에 실험체를 사들이러 갔을 때부터 온전히 빛났다. 모리구 자신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스스로 왕위에 올라 멤피스의 열기를 가라앉혔을 인간이었다.

모리구의 잘못이 있다면, 저자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만 것이었다.

누트 멤피스는 천성이 고귀해 한 번 정을 주면 물리는 법이 없었다. 모리구는 자신의 죄까지 그가 책임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인간은 인간의 삶을 살면 그만이었다. 다른 것까지 짊어지기에 그치들의 시간은 아름다운 만큼 짧았다.

“……형수님을 납치할까?”

모리구는 떠보듯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다.

“그것도 좋겠지. 그자는 풀을 땅에 내릴 수 있는 축복을 타고났으니 멤피스의 부흥에도 쓸모가 있겠구나.”

“거짓말하지 마, 그럼 형이 땅을 온통 썩게 만들 거야. 인어는 널 사흘 만에 죽게 만들 테고, 황자는 우리에게 불길한 미래만이 남았다며 거짓이라도 입에 올려 불안에 떨게 하겠지.”

그러자 누트 멤피스가 본심을 꺼냈다. 이 까마귀는 바람에 한들거리는 갈대처럼 맘이 쉼 없이 바뀌는데다 까다롭기가 이루 말할 데 없어 장단을 맞추려면 이렇게 빙 돌아가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인간 외적인 이야기는 관심 없다. 모리구여, 네가 인간의 땅에서 살고자 한다면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일굴 각오를 해야지.”

“이 세계가 거의 절멸했다는 건 너 빼고 다 알아.”

“그래서 짐이 왕을 자청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분명 레시우스에도 짐과 같은 이념을 지닌 자가 있을 것이다. 그래……. 그자는 인상적이었지.”

“포이보스 레시우스?”

누트 멤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청량했다. 그러면 까마귀는 이자가 새삼 왕이었지 생각했다. 위협이 될 법한 제국의 황태자를 입에 올리면서도 저토록 맑게 갠 표정이라니.

“난 그 인간이 우리보다도 괴물 같은 마음을 지녔다고 생각해. 따르기 좋은 인간상은 아니야.”

“하지만 유능하지 않은가?”

“그게 문제야. 스스로 유능하다는 것을 아는 괴물은 얼토당토않은 짓을 종종 저지르거든. 아버지를 썩게 만들고,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일구기 위해 결혼한 형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구나.”

“이해해달라고 할 생각 없어. 형이 형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진실이겠지. 하지만 형은 정말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거야.”

까마귀가 잠을 자듯 몸을 둥글게 말아 이불 속으로 푹 묻혔다.

“형수님은 착각하고 있어. 형은 절대 누그러지거나 교화될 수 없는 존재야. 감정에 빈 구석을 발견하면, 혹은 형수님을 사랑하는 데 자기 나름의 기준에 미달하면, 형 스스로가 노력해서 나아지기보다는 대체품을 찾아 형수님의 곁에 붙여줄 사람이라고. 형은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발전할 수 없어.”

“너무 단정 짓지 말거라, 모리구여. 대공은 요정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퍽 인간처럼 보이더군.”

“됐어. 내가 형을 알아온 시간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두고 봐, 형은 결국 형수님 곁에 다른 남자가 존재하는 걸 용인하게 될 거야. 왜냐하면 형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지녔고, 형은 간혹 애틋한 우울에 잠겨 울부짖곤 하시는 아버지보다도 괴물 같은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야. 순전히 필요에 의해서 형수님의 곁을 맴도는 자들을 수단처럼 활용하겠지……. 그렇게 해서 모든 걸 손에 넣은 사람이니까.”

누트 멤피스가 탁상 위에 놓아두었던 토론거리를 집어 왔다.

모리구는 자는 것을 흉내 내며 규칙적으로 숨을 쉬었다. 누트 멤피스는 그것을 비웃거나 모리구의 발버둥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야윈 까마귀의 등줄기를 보며 과거의 흔적을 회상할 뿐이었다.

이름 없던 소년은 산꼭대기 노예 시장의 최고 등급 상품이었다. 타는 듯한 통증을 견디다 못해 정신을 놓고 태양을 갈망하게 된 인간들은 그만큼 기질이 음침해져 해서는 안 될 짓을 왕왕 했다.

잡혀온 소년은 수인족의 피를 조금이나마 품었다. 행성늑대였는지, 검은땅표범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털이 숭숭 난 귀는 보기 흉하다 뽑혀나갔다. 뭉툭하게 반쯤 자라 퇴화한 꼬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놓고 잘 길들여진 수인족이라 팔아대는 꼴이 우습고 하찮았다.

그러나 지하 경매장의 흙색 천정, 작게 난 환풍구 틈새로 스며드는 태양이 얼마나 따스하고 누르스름했는지, 수인족도 인간도 아니게 된 이름 없는 노예 소년은 저 태양을 갈증 없이 누리고 싶다 염원하게 되었다.

이후 소년은 개미만큼 배급되던 식사를 거르지도, 상인에게 반항하지도 않았다. 대신 눈매를 요요히 가라앉힌 채 때를 노렸고 글자를 익혔다.

경매가 시작되고 그가 주인을 만난 순간이 탈출의 기회였다. 소년은 그렇게 손꼽아 주인 살해의 날을 기다렸다.

거의 개처럼 기어 경매장 바닥에 섰을 때, 소년은 자신을 상품 취급하며 훑어 내렸던 까마귀의 붉은 외눈을 똑똑히 기억했다.

하여 그자에게 팔려나가 살기를 머금은 회심의 단검 찌르기가 저지당하고, 수인족의 힘을 끌어올리는 실험을 받고, 인공적인 귀를 달고, 청력을 회복하고, 어설프게나마 수인족의 강인한 육신과 영혼의 기감을 갖추었을 때, 멤피스를 영광의 길로 끌어올린다는 목표와는 별개로 모리구에게의 복수를 염원하고 말았던 것이다.

“모리구여.”

“으응.”

“짐을 사들여 실험체 삼은 것을 후회하느냐?”

“아니.”

“그런가. 그것 참…….”

“넌 내가 밉지. 멋대로 사들여서 실험체로 만들고 이것저것 아프게 했으니까.”

“그 덕분에 이렇게 강건한 신체를 얻을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수인족의 육신은 참으로 대단하더군. 반쪽짜리도 못 되는 신세이지만 기온에 구애받지도 않아 추운 겨울 발가벗고 돌아다녀도 얼어 죽지 않으니 말이다. 하여 짐은 수인족을, 정확히는 그 강인함을 계승해 멤피스의 신조로 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 강인한 일족이 절멸한 것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지.”

왕이 씩 웃었다. 모리구는 왕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누트 멤피스가 어떤 면면을 하고 있는지 능히 짐작했다.

“넌 날 망가트려도 돼. 형조차 안 되지만 너는 괜찮아.”

“이미 망가트렸으니 복수는 끝난 셈이다. 그리고 그 실험에는 짐 역시 찬동하지 않았느냐. 고통과는 별개로 짐은 만족하고 있다.”

“…….”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수인족이 왜 작열통을 느끼고 단명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마저도 네가 작열통의 저주를 해결했다 하지 않았느냐. 단명의 저주는 내가 완전한 수인족이 아니라 해당되지 않는다 했고. 문제가 더 남았느냐?”

왕이 태양처럼 이야기했다. 속에서 끓는 감정이 복잡하게 엉겨 용암 속으로 가라앉았다.

왕이 흘리듯 생각했다.

나는 네가 스스로를 재건하게끔 두지 않을 것이다, 모리구여. 영혼이 성장하게끔 두지 않을 것이다. 영영 내가 만든 새장 속에서, 내가 일구는 사막의 신록과 찬란한 영광을 죽을 때까지 관찰하거라. 그렇게 험한 풍파나 폭력과는 단 한 방울도 닿지 못한 채 박제되어라…….

“얻을 것을 모두 얻고 멤피스로 돌아가도록 하지. 대공 내외가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그들 스스로 멤피스에 닿을 테니, 그 전까지는 신경 쓸 일 없을 것이다.”

“당연하지. 설마 평생 있을 생각이었어?”

“글쎄……. 모리구여, 짐은 네가 아닌 다른 자가 미래를 바라보고 살고 있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반했어?”

“어떨 것 같은가?”

“치정 싸움은 질색이야……. 형수님은 무서워. 게다가 내 눈동자에 잡히는 것이 있는데 너무 거대해서 감히 읽어낼 수가 없어.”

뜻밖의 이야기였다. 누트 멤피스가 알기로 모리구는 모든 것을 재단하고 읽는 데 천재적이었다.

“네 그 눈 말인가. 적색거성이라는?”

“그래. 이 눈은 별과 별 사이의 궤적을 읽는 눈이야. 행성의 흐름까지도, 사람의 근원까지도 파악할 수 있지. 그렇지만 형수님은 아니야.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없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형의 생년월일과 별자리조차 읽을 수 있는데 말이야.”

“다른 세계에서 와 그런 것이 아닌가?”

“말이 좋아 다른 세계지, 이 우주에 다른 차원이나 다른 세계 같은 개념은 성립할 수 없어. 수천 수백 광년쯤 떨어진 다른 행성 사람일 거야. 어쨌든, 형수님은 인간인 척하지만 분명 완전한 인간은 아니야. 하지만 이상한 점은 자신이 그걸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거야.”

모리구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그 사람은 꼭 속을 파헤치려 해. 초연함이 있어서 막 대할 수가 없어. 상냥한 것 같지만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관찰하고 꿰뚫어 본 다음 이것저것 멋대로 짐작한다고.”

“평가가 박하구나.”

“박할 수밖에 없지 않아? 게다가 너무 유약해……. 다른 사람이 정의로 생각하지 않는 일을 자기 정의로 삼아서 쓸데없이 행동과 마음에 제약을 만드는 것 같아. 봐, 굳이 나를 달래주거나 친한 척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모리구가 이불을 더욱 끌어당겨 몸에 둘둘 말았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어. 내 눈이 제대로 기능했다면 좋을 텐데 말이야, 생년월일과 별자리를 따라 형수님의 운명을 엿볼 수 있게……. 아버지마저도 이 눈을 유용하게 사용하셨는데, 대체 그 사람은 어떤 존재이기에 간파할 수 없는 거야?”

이후 대화가 뚝 끊어졌다. 한참 투덜거린 탓에 속이 좀 풀린 덕이었다.

모리구가 뜬 눈으로 새벽을 견뎠다. 연구거리에 푹 매몰된 누트 멤피스도 잠을 자지 못하는 괴물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

모리구는 가끔 눈을 두어 번씩 깜빡였다.

형은 꼭 자기 같은 사람을 아내로 맞이한 것 같다.

그러나 모리구는 자신이 알아낸 것에 대해 다시는 입 밖으로 내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각자도생이었다.

말룸은 모리구의 비상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라딘라티를 함께 무찌르자느니 저물어가는 형수의 육체를 재건하자느니 하지 않았다. 라딘라티가 어디에 봉인되어 있는지도, 오필리아의 육체가 왜 그렇게 힘이 없는지도, 다른 세계에 대한 것도, 어째서 그자가 풀이며 나무며 꽃가지 따위를 다룰 수 있는지도 그 무엇 하나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래, 응, 맞아. 자기 둥지는 따로 지켜야지.”

모리구가 책상 앞에 앉아 흰 종이에 열중한 누트 멤피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저런 유약한 걸. 시간에 풍화되어 사라질 인간을 둥지 삼다니. 차라리 별과 달빛 줄기를 애정 삼아 시간을 견디는 것이 이로웠을 텐데.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불사를 줄 수가 없어, 왕……. 인간에게는 인간만의 시간이 있으니까. 다만 당신이 원하는, 그리고 그 애를 위한 재건을 도울 뿐이야.

“날 형처럼 버리지 않을 거야?”

사막에 바람이 불듯 웃음소리가 붕 떴다.

“그대가 끝의 끝까지 짐을 원한다면, 모리구.”

왕이 비수를 숨긴 채 까마귀를 토닥였다. 모리구는 어두운 모래에 휩쓸리면서도 차마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모리구에게 있어서 누트 멤피스는 수단이었지 목적이 아니었다.

모리구를 살게끔 하는 자는 따로 있었다. 적색거성을 담은 그의 눈동자를 잃어도 좋을 법하다 생각했던, 모리구의 유년기를 통째로 가져간 존재가.

그는 모리구의 동력이었고, 멤피스 재건의 근원이었다. 그가 없으면 모리구의 모든 것이 거품보다 무의미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