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93화
말룸은 진심을 내보이지 않는다는 측면이 나와 닮지 않은 듯 닮았다. 말룸과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어린 속을 추산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와의 관계가 발전할 수 없었다.
모리구는 풀이 무성한 흙바닥과 하나가 된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비상한 머리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했던 것만큼 화가 나진 않았다. 말룸을 친애하고 있는 존재라서 그런 걸까?
소년이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백합이 피어나는 모습과 닮았다.
그가 썩어버린 나무뿌리처럼 낡은 웃음을 지었다.
“형수님은 형을 사랑하시네요.”
“당연하죠.”
“뱀인 걸 알고도 도망치지 않을 정도로.”
“네, 여러 일이 있었지만 결국은 이렇게 되었어요.”
“……제가 어리게 굴었어요.”
모리구가 힘껏 제 눈가를 비볐다.
“그렇지만 이 천진을 선물해 준 사람이 소중해서, 애처럼 굴기를 관두진 않을래요. 정작 그 애는 저를 싫어하지만요.”
나는 잠깐 멈칫했다.
“그 애요? 누트 멤피스?”
“누트는 아니에요. 누트를 만나기 훨씬 전에 함께했던 사람이니까.”
모리구가 부정하지 않았다.
“그 애와 있으면 이상해진다니까요. 가뭄이 들었던 마음에 샘물이 돌기도 하고, 샘물이 돌아 천진하던 게 그 애를 만나면 다시 가물기도 해요. 어느 쪽이든 날 바꿀 수 있는 사람인데, 인생의 유일이란 건 그런 애를 두고 할 수 있는 말이겠죠.”
소년은 바닥의 청록색 이끼와 하나가 되듯 몸을 웅크리고서 흙바닥만을 응시했다.
“하여튼 제게도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그러니까…… 괜찮아요. 형이 없어도, 영원히 나를 칭찬해주지 않아도. 미련을 버릴 때가 된 거겠죠.”
소년이 익은 벼처럼 고개를 푹 수그렸다. 깔끔하게 잘린 검은 단발이 얼굴을 가리는 천막이 되었다.
모리구는 미로 중앙의 풀을 모두 뽑아낼 듯 잡초를 엉성히 뭉쳐 즙을 내었다.
“체념할 계기를 찾고 있었어요. 형수님이 그 계기가 되어주셨네요.”
검정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소년의 볼이 희었다. 오백이 지나도 흘려 내지 못한 까마귀의 순수였다.
미로 깊이 스며든 새가 지저귀기 시작했다. 그 울음은 까마귀라기보다는 참새, 겁 많은 자의 호소였다.
울음이 지난 후, 모리구가 조금 나아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형수님, 형이 당신께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우리 가족에 대해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양 다시 서럽게 물길을 내기 시작했다.
풀 위로 때늦은 이슬이 점점이 피었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풀 냄새 대신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한 맺힌 울음 냄새가 알싸했다.
“전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나 봐요. 형은 형수님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 그걸 실행해 판을 짜는 걸 좋아하거든요. 자기 세계에 우리 같은 괴물이 끼어들길 원하지 않았던 거겠죠. 쓸모없음 판정을 받은 거예요, 우리는.”
소년이 넌지시 고개를 들었다. 한쪽만 남은 그 시선이 살짝 아름다웠고 한편으로는 기묘했다.
괴물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요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들은 생명을 훔쳐낸 것도 모자라 봄기운마저 약탈해 저마다의 육신 속에 박제했다.
“전부터 형은 쌀쌀맞았어요. 가을에 애써 일군 곡식을 남김없이 훑어가는 검은 태풍처럼 매서웠지. 자기에게 정을 주게 해 놓고는 절대 우리에게 곁을 내주는 법이 없었어요.”
때마침 바람이 불어 까마귀의 머리칼이 나풀거렸다. 모리구가 끝없이 묵은 감정을 털어놓았다. 나는 과학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말을 주의 깊게 주워 담았다.
“아버지는 어두운 동굴에 틀어박혀서 뭘 죽이라 명령이나 내렸지 우릴 신경 쓰지는 않으셨어요. 아라크네에게만 조금 누그러지셨는데, 그게 낯설 정도였죠.”
모리구가 흔들의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기꺼이 몸을 옆으로 움직여 앉을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그는 의자에 접착제가 붙은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한참 머뭇거렸다. 말의 물꼬를 열어도 직접 살을 맞대고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형이 저희를 맡게 되었어요. 아직도 생생하네요. 아버지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는 형에게, ‘네가 데려온 쓰레기는 네가 책임져라’ 하는 아버지 목소리가요. 그래도 저는 아버지보다는 형과 함께 있는 편이 더 좋았어요. 형은 저를 구해준 사람이거든요.”
모리구가 살며시 의자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는 조금만 툭 옆으로 밀어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듯 불안정한 자세를 고수했다.
나는 굳이 그를 곁으로 끌어당기지 않았다. 모리구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내가 모르는 말룸의 과거를 소년에게서 파헤쳐내고 싶다는 이기심 때문이었다.
“저는 멤피스의 인간거주지대 잉겔룸에서 태어났어요.”
나는 생소한 지명에 눈을 깜빡였다. 모리구가 눈치 좋게 설명했다.
“과거 멤피스는 수인족의 땅이었어요. 척박한 사막은 인간이 견디기엔 너무 뜨거웠죠. 수인족들은 인간을 위해 그늘이 잘 비치는 땅을 나누어주었는데, 그곳이 인간거주지대 잉겔룸이에요. 지금은 폐허가 되었죠.”
모리구가 덧붙였다.
“어쨌든, 저는 결국 잉겔룸에서 버려졌는데……. 처음부터 부모님이나 마을사람들과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었어요. 단지 제 잘못이 수십 번 반복되었던 거죠……. 그것뿐이었어요.”
그 어조가 약간은 씁쓰름하고 약간은 빛이 바랬다.
“저는 만성적으로 사교성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과 어울리는 것보단 천문학 연구를 좋아했어요. 수인족의 생태에도 관심이 있었죠. 그렇게 연구만 하다 배척당했는데, 그래도 성간대지를 떠나진 않았어요.”
“……자꾸 모르는 지명이 나와요.”
모리구가 작게 웃었다. 그 미소가 말룸이 이른 아침 짓곤 하는 미소와 제법 닮았다.
“성간대지는 수인족들이 사는 땅을 말해요. 사막 중에서도 바위로 이루어진 고지대에 위치해 있죠. 별들 사이에 있는 땅이란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붙여 불렀는데, 바로 위에 신들의 거처가 있다는 전설을 간직한 폐허와 유적의 땅이죠.”
모리구가 기꺼이 화관을 써주었다. 독기 빠진 외눈의 소년은 씁쓸한 듯 말을 이었다.
“저는 버려진 후에도 계속 연구만 했는데, 음식과 물 없이는 좀처럼 버틸 수가 없었어요. 결국 사흘을 못 견디고 땅에 쓰러졌어요. 모래를 너무 먹어 폐가 병이 들었는지 핏방울까지 울컥 치솟았죠. 그런데, 숨이 끊어지겠다 싶을 때쯤, 미간을 찌푸린 아름다운 사내가 나타나서 제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리는 거예요.”
모리구가 자조 어린 말을 했다.
“형이었어요. 아직까지 왜 날 죽음에서 건져 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가 맞기는 했어요. 신이라도 강림한 줄 알았지 뭐예요.”
혹시, 모리구가 폐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말룸이 그를 살리겠다 마음먹게 되지 않았을까? 그의 할아버지도 비슷한 병에 걸려 있었으니까.
나는 말룸의 행동 원인을 헤아리다 그만두었다. 말룸에게 그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으면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양 아리송한 표정만 지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었다.
말룸은 이후 모리구를 라딘라티에게 데려가 불사를 부여하게끔 했다고 한다. 모리구는 그 밖에도 라딘라티와 자기 나름대로 거래를 더 했다고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스콜피오도 마찬가지였어요. 힘을 주체하지 못해 레시우스 접경지대의 쓰레기장에 버려졌던 걸 형이 주워 왔죠. 나중에 이유를 물어 보니 그냥 거슬려서래요, 거슬려서. 우린 형이 부끄럼을 타는 줄만 알았죠.”
“그건 아닐 텐데요…….”
“알아요! 이젠 안다구요, 형은 정말 아무 생각 없었다는 거. 나중에 아라크네를 아버지가 어디선가 데리고 와선, 그렇게 우리 가족이 완전해지기는 했는데……. 형은 수집품 모으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우릴 방치하더라고요. 전 형이 신경질적이라서 그런 줄만 알았어요.”
모리구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청명한 하늘이나 바라보았다.
본의 아니게 보육원 원장이 된 말룸을 생각하다가 흩어버렸다. 도저히 그가 괴물 돌보기에 성실히 임했을 것 같진 않았다.
“형은 우리를 정서적으로 신경 쓰지 않았어요. 대신 영생을 얻으며 머릿속에 주입된 주술의 사용법을 알려주었죠. 살갑게 말을 거는 법도 없었지만, 그래도 다들 결핍 비슷한 게 있어서, 우릴 죽음에서 건져 올린 형이 좋아서, 그 사람이 ‘잘했다’ 한 마디를 해주길 바라서 주술이고 뭐고 열심히 했어요.”
나중엔 아버지를 썩게 만든 채 훌쩍 떠나 버렸지만. 모리구가 어설프게 웃었다.
“형수님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보면 우린 형에게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였나 봐요.”
나는 소년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모리구는 묵묵히 손길을 감내했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었다. 나는 온 마음을 바쳐 상대를 염원하고 그의 친애 한 조각이나마 소원해 헐떡거렸는데, 상대는 마음이 청동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했는지 온기를 품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나는 모리구와 오래도록 말없이 있었다. 소년이 발을 굴러 의자를 가끔 흔들거리도록 했다.
“오필리아, 거기 있나요?”
저 멀리 말룸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늑대가 자기 무리를 찾는 소리와 닮았다. 석양이 하늘을 주홍빛으로 단장했다. 말룸은 곧 우리를 찾아냈다.
“오필리아, 너무 늦었잖아요. 저녁 식사도 거르고.”
모리구가 흔들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말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말룸은 그를 무시할 뿐 한 줌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모리구는 저주 팔찌를 착용하고 있어서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만……. 저 녀석이 당신의 심기를 건드린 건 아니죠?”
“괜찮아요, 우리 이제 친해요.”
말룸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이상하네요, 따위를 덧붙이며 모리구와 내가 나눈 대화 내용을 유추하는 듯했다. 그러나 계속 내 머리카락에서 죽은 나뭇잎을 골라낼 뿐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의 어깨 너머를 흘끗 보니 모리구는 이미 미로의 바깥으로 향하고서 없었다.
까마귀는 끝내 황금 사냥에 실패했다. 다른 황금을 찾아내지 않는 이상 결국 시체나 쪼아 먹으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모리구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도, 말룸과의 사이가 좋아지도록 중재할 수도 없었지만 그 소년이 마음을 추스르길 염원했다.
내게 다정히 미소 짓는 말룸은 신과 같아 속절없이 아름다웠다.
신은 원체 불공평해서, 누구에게나 태양빛을 내려주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