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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92화 (92/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92화

인간보다 기감이 예민한 로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주머니에서 귀마개를 꺼내어 귓속 깊이 찔러 넣었다. 로보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는 다시금 하품을 하며 모리구가 벌을 받는 모습을 느긋하게 관찰했다.

이윽고 한 사람이 더 내려왔다. 셔츠 차림의 크로노였다. 잠옷으로 얇은 차림을 선호하는지 살이 반투명한 천 뒤로 죄다 비쳐 보였다.

로보도 그렇고 크로노도 그렇고 자신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자각이 없는 듯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해서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또 샹들리에 크리스탈이나 올려다보았다.

로보가 옆에서 킬킬거렸다.

“오, 육지 황자 잠이 덜 깬 모양이네. 레시우스 전통 잠옷을 그대로 입고 다니는 걸 보면.”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중얼거렸다.

“레시우스 전통 잠옷……. 저 헝겊 조각이요?”

“참, 처음 보겠구나. 레시우스의 전통복은 보통 눈 둘 곳이 없는 편이지. 등 파인 혼례복이라든가, 하늘하늘한 잠옷이라든가……. 신체의 건강함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나 뭐라나. 요즘 레시우스인들은 잘 안 입던데. 황자라서 전통을 지키라는 둥 교육받았던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나도 어릴 때 이래저래 참견 많이 받았지.”

로보 때와 마찬가지로 곳곳의 사용인들이 그를 흘끔거렸다. 그러자 크로노는 선인장에 찔린 사람처럼 경계하며 팔을 교차해 상체를 가렸다.

“왜 그렇게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군. 오필리아 님, 그만 말려주시오…….”

“여, 좋은 아침, 육지 황자. 아니지. 떠들썩한 아침인가? 어쨌든 이 귀마개 효과 좋더라. 육지 황자는 안 써?”

한 쪽 귀마개를 빼낸 로보가 한 손을 넓게 흔들었다. 층계에 붙박인 듯 서 있던 크로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는 차라리 자신의 목소리가 심벌즈 소리에 묻히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황성에서 챙겨온 것은 그것 하나뿐이오. 나는 애초 예민해서 귀마개 없이는 잠들지 못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인간인 나보다 귀가 힘들 테니 대신 쓰는 것이 낫겠다 싶었소……. 단지 그것뿐이오.”

“육지 황자! 날 생각해준 거야?”

“왜 그런 반응이오? 착각하지 마시오! 당신 고막이 나가 버리면 오필리아 님이 슬퍼할 테니까…….”

“그래, 그래, 고마워. 그럼 계속 사용할게.”

로보는 장성한 동생을 보는 것처럼 감격에 젖어선 도로 귀마개를 착용했다. 나도 덩달아 마음이 풀려 살짝 웃었다.

크로노가 황금 사냥에서 로보에게 상처가 될 법한 말을 한 이후 둘은 부쩍 사이가 가까워졌다. 크로노가 로보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크로노. 시끄러워도 조금만 참아줄래요?”

나는 크로노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크로노는 짜증을 참아낸 일의 칭찬을 갈망하듯 나를 응시했다. 나는 기꺼이 크로노를 한 번 꼭 안아주었다. 그런 다음 그의 뻗친 옆머리를 살며시 정리했다. 크로노는 아침에 머리가 잘 뻗쳤다.

“모리구, 기절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 이 정도로 기절하지 않는다는 것, 전부 알고 있으니까.”

말룸이 엄포를 놓았다. 까마귀는 휘청대는 척하다 말고 다시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공이 추위에 정신을 놓아 죄 없는 까마귀를 괴롭히는 줄 알 듯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자비로운 처사였다.

모리구의 방해는 분명 고의였다. 머리끝까지 짜증이 오른 말룸이 제대로 사과하라 다그치자 모리구는 잘못한 것 없다 잡아떼기까지 했다.

모리구를 보면 결혼한 형의 관심이 그리워 안달 난 어린아이가 떠올랐다. 지금도 모리구는 비척비척 약한 척을 하며 말룸을 애절하게 올려다보았다.

말룸은 분노로 눈이 벌게져 심벌즈마저 내동댕이쳤다.

말룸이 하도 심하고 집요하게 굴어 쌀쌀맞게 치밀던 화도 어느새 가라앉았다. 보다 못한 내가 소맷자락을 잡아당겼을 때에야 말룸은 심벌즈에 걸린 주술을 거두었다.

한참동안 이마를 짚던 말룸은 그대로 내게 키스했고, 나는 그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새장 바닥에 널브러진 모리구에게 시선을 주었다.

새는 심장에 총알이 박힌 것처럼 차가운 새장 속에서 미동이 없었다. 상처는 육신에만 나는 것이 아니었다.

말룸은 훌쩍 집무실로 올라가 버렸다. 로보는 크로노를 이끌고 승마를 하러 가겠다며 저택을 비웠다.

모리구와 남겨진 나는 조심스럽게 새장을 열어 까마귀에게 청량한 자유를 주려 했다.

까마귀는 검은 새장 문이 열린 후에도 요지부동이었다. 소리에 힘에 부쳐 기력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수치스러움에 차마 내 얼굴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저기, 모리구…….”

나는 작게 그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가악.”

비실거리는 울음소리를 뱉어낸 까마귀가 작은 날개로 얄미웁게 손을 쳐내었다. 아프진 않았으나 기분이 괜찮지도 않았다. 그러나 말룸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신경전이라기보다는 형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동생처럼 보여 속이 너그러워졌다.

“말룸이 뭘 좋아하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빈말이라는 것은 까마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리구는 못 이기는 척 어물거리며 새장 바깥으로 총총 걸어 나왔다.

그는 풀이 죽어 거의 소나기에 젖은 듯했는데, 조심스럽게 안아 들자 손바닥에 쓰러져 투정을 부렸다. 부드럽게 쓰다듬으니 애정이 고팠는지 그는 쪼거나 쳐내지도 않았다.

“일단…… 제 방으로 갈까요?”

까마귀가 날개를 퍼덕이며 거부 의사를 보였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 마구 울었다.

울음소리에 함축된 뜻을 알 것 같았다. 추측하자면, 모리구는 ‘형과 형수의 달콤한 공간’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달래줄 장소는 하나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도 없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어도 문제없는 장소.

“그럼 우리 미로 정원으로 가요.”

모리구를 어깨 위에 올렸다. 까마귀가 반항하지 않고 속없는 거죽처럼 늘어졌다. 날다람쥐 따위의 작은 동물을 키우는 듯해 맘이 녹았다.

얄밉고 괘씸한 기분이 마디게 닳았지만, 모리구가 오백 살 넘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형을 빼앗긴 작은 소년이라고 생각하니 그나마 낫기는 했다.

나는 미로 정원을 향해 산보했다. 걸음마다 계절이 바뀌는 듯했다. 웅장한 대리석 길을 따라 몇 발 걸으면 겨울이 펼쳐졌고, 텃밭으로 향할수록 주술의 기운이 짙어져 녹음이 물씬 드리워졌다.

까마귀는 색색 숨만 쉬었다. 나는 그가 검은 그림자에 휩쓸려 아래로 추락하진 않을까 몇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살폈다. 어깨 언덕이 불편했는지 그가 몇 번 들썩거렸다. 어색한 상대와의 고요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미로 안으로 굽이굽이 들어섰다. 한동안 걸음하지 않았더니 입구부터 낯선 기운이 물씬 났다. 구불구불한 길은 용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험했다.

낮이었는데도 어두침침했다. 빽빽하게 자란 나무가 하늘을 가렸다. 손바닥만 한 잎이 무성했고, 잔가지들이 자꾸만 앞으로 드리워졌다. 곳곳에서 엘프가 만든 조각상이 위용을 드러냈다.

이끼가 잔뜩 앉은 돌담과 길을 찾을 수 없게끔 사람을 압도하는 고풍스러운 장식, 그리고 어깨 위에 매달린 세 발 달린 까마귀, 목에 걸린 작은 황금 열쇠……. 그림자가 살아나 나를 먹어치울 것만 같은 이질감이 들었다.

왼쪽 손으로 벽을 짚고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순간 우리는 중앙 심장부에 닿았다. 공동처럼 텅 비어 연못과 휴식 공간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곳은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한 뱀과 이브의 낙원이었다.

주술로 순환하게끔 한 연못에서 물이 퐁퐁 솟았다. 만발한 꽃향기가 코끝을 톡 쏘았다.

나는 향기에 잠식되어 조심스럽게 모리구를 땅에 내려주었다. 그러고는 말룸이 만들어둔 흔들의자에 슬그머니 가 앉았다.

비틀거리던 까마귀가 연못의 물을 부리로 쫑쫑 쪼아 마시는 시늉을 했다. 그는 물을 마실 수 없을 텐데도 인간처럼 굴었다.

나는 까마귀가 속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렸다.

모리구는 그저 정리하고 싶었던 듯했다. 속으로 치미는 애탐을, 가족이라 생각했던, 형이라 생각했던 자에게 거부당하면서 활활 타오르게 된 슬픔과 설움을.

이윽고 까마귀가 다시 소년이 되었다. 맨몸에 옷가지가 따라붙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신비했다.

목덜미에서 살랑거리는 단발이 일전보다도 더욱 검었다.

바람이 한 가닥 두 가닥 나뭇잎에 닿아 못으로 끌어당겼다. 영원히 푸를 이파리가 하늘빛 호수 위를 동동 항해했다.

소년이 짓무르듯 눈을 비볐다. 그래도 진정하지 못하자 그는 땅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입을 맞추듯 잔디 위에 볼을 비볐다.

그의 작은 어깻죽지가 격랑을 만난 것처럼 벌벌 떨렸다. 숨넘어갈 듯 헐떡대는 소리가 절박했다.

눈물의 근원이 그에게 있는 듯했다. 용서받지 못할 죄라도 지은 것처럼 면구스러워졌다. 모리구가 진짜 아이였으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동화 같은 것을 좋아해 고릿적 전설이라도 들려주면 대개 눈물을 그쳤다.

나는 소년의 옆으로 커다란 꽃송이와 알록달록한 독버섯을 피웠다.

까탈스러운 소년은 홱 고개를 돌린 채 아직도 눈물바람이었다. 가뭄이 든대도 이 까마귀만 있으면 일 년 농사가 거뜬할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모리구에게서 슬픔이 주렁주렁 열렸다.

사실 나는 모리구에게 공감하지 못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말룸의 기분이었으니까. 그래도 누군가 우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슬픔이 옮겨 붙을 것만 같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모리구……. 미안해요. 아침에는 너무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어요.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텐데.”

상냥하게 말씨를 꾸몄다. 가지를 둥그렇게 틔워 소년의 머리둘레에 맞는 크기의 화관까지 만들어냈다. 하지만 모리구에게 다가가지는 않았는데, 다가오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가 되는 것이 관계에 이로울 듯했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뜻밖의 사과였다.

“미안, 잘못했어요. 심술 부렸어요. 형이 그렇게 생기 있게 웃는 건 처음이어서……. 제가 알던 형이 아닌 것 같아서, 또, 저희가 형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증거를 발견한 것 같아서……. 우리는 형과 친해지려 노력했었는데, 되질 않아서.”

그가 설운 맘을 낱낱이 풀어 놓았다. 아무리 오백 년 산 괴물이래도 감정이 메마른 것이 아닌 이상 참담함과 슬픔이 사라질 수는 없었다.

꼭 쥔 흔들의자의 쇠줄이 차가웠다. 날이라도 맑았으면 싶었지만 눈구름인지 비구름인지가 무성한 나무줄기에 지붕처럼 얹혀 하늘이 깨끗하지 않았다.

“형수님이 마땅찮은 건 절대 아니에요. 저는 형에게 화가 난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상냥하게 굴 수 있는 사람이면서 왜 우리에게는 그렇게 매몰차게 행동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나는 과거 했던 걱정을 상기했다. 다른 이를 대할 때 말룸의 태도가 그를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박탈감을 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형수님과 저희가 다른 게 뭘까요?”

“저는 처음부터 말룸이 사랑하겠다고 작정한 상대고, 당신들은 아니었던 거죠.”

“그럼 당신께 향하는 형의 사랑은 진실한 사랑일까요? 미리부터 사랑하겠다고 정한 다음 당신을 마음에 품은 거라면 그건 기만이잖아요.”

이제 모리구의 목소리는 젖어 있지 않았다. 그는 낡아 찢어진 낙엽을 닮았다. 손가락 하나만 가져다 대어도 톡 부서질 듯 가물어 쩌적 쩍 갈라진 목소리가 황량했다. 검정 머리칼 몇 가닥이 그의 얼굴을 가렸다.

“형은 당신이 아닌 다른 여자라도 사랑했을 거예요. 난 그 뱀의 선함을 믿지 않아요. 형이야말로 아버지보다 교활하고 악독해요.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남자지.”

나는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얼어붙었다.

“사랑이라는 게 형에게 필요한지도 잘 모르겠어요. 형은 혼자인 게 어울리고 본인에게도 이로워요. 형은 혼자만의 세계에서 살아요. 그 세계는 앞도 뒤도 모두 닫혀 영원히 폐쇄되었고요…….”

“그건 아니에요. 가족이라면서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가라앉았던 화가 치밀었다.

모리구는 말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보고 싶은 말룸의 모습만을 보고, 그 모습을 말룸에게 강요하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투정을 부렸다.

그네를 잡은 손에 깊이 힘이 들어갔다. 손끝에서 담쟁이가 피어올라 의자를 온통 뒤덮었다.

“가족이라면 알았어야죠. 그 사람, 구해달라고, 힘들다고, 가라앉아 썩어버릴 것 같다고 소리치고 있었잖아요. 말하지 않아도 온몸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잖아요.”

모리구는 답하지 않았다.

“당신들이 그걸 알지 못했으니까 가족이 될 수 없었던 거예요. 말룸이 여유가 없는 사람인 건 맞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제가 봤을 때 이거예요.”

말룸을 똑바로 보려 하지 않았던 것.

내가 범했던 실수였다. 그 때문에 나는 말룸의 진심을 보지 못하고 한참동안이나 그의 다정을 외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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