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91화
왕의 손에 이끌려 황금 비공정으로 향하면서도 모리구 생각이 물감처럼 번졌다. 누트 멤피스는 어쩌다 모리구를 만나게 되었을까? 모리구가 누트 멤피스에게, 누트 멤피스가 모리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그들은 서로를 지렛대 삼아 살아가는 것 같았다. 황량한 사막의 열사바람을 견디기 위해 상대를 천막으로 여겨 열기를 따돌리는 일이었다. 누트 멤피스의 수행원 중에서도 모리구는 왕과 오롯이 돈독했다.
“일컫자면 헛똑똑이인 셈이지. 모리구는 소심한 데다 사교성도 없어 일을 그르치는 데 천부적이다. 봐줄 만한 건 어여쁜 외모와 엄살떠는 뾰족한 성격, 기함할 만한 천재성과 오랜 시간 쌓아올린 연구지식뿐인데, 뭐, 그 정도면 데리고 살기에 충분치 않은가.”
왕의 어조가 경쾌했다. 그는 손목에 걸린 저주 팔찌를 매만지며 회상하듯 말했다.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모리구를 왜 그렇게까지 소중히 여기게 된 건가요?”
왕은 사막에 우뚝 선 대추야자처럼 씁쓸한 표정이었지만 여전히 위풍당당했다.
“짐은 태생부터 비천했다. 절멸한 수인족의 피를 조금이나마 계승했기 때문에 노예 상인들의 인기 품목이었지.”
왕의 미소가 폭풍처럼 지천에 떨쳤다. 그는 과거의 아픔을 이야기하면서도 태양처럼 눈부셨다.
“모리구는 짐을 구더기 굴에서 건져 올려 강하게 만들었다. 멤피스 재건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누트 멤피스는 더는 자세한 사정을 풀어 놓지 않았다.
“짐에게 있어서 그런 대상이다, 모리구는. 하여 요정이여, 그대가 모리구의 행동을 제지하고 싶다면 짐이 아니라 모리구에게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짐은 모리구가 하는 일이라면 천륜을 벗어난 일이라도 옹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왕의 발밑으로 여러 잡풀이 깔려 스러졌다. 누트 멤피스의 발자국을 따라 풀잎이 뒤틀렸고 허리가 꺾였다.
왕은 비공정이 주차된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모리구도 당신을 그렇게 생각할까요?”
저 멀리 거대한 배가 나무 군집에 가리어져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누트 멤피스의 비공정은 누런빛으로 빛나 태양이 지면에 뜬 것 같았다.
“글쎄, 무관하다. 짐이 모리구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트 멤피스는 일전의 호쾌한 모습으로 돌아와 달처럼 거대한 비공정에 대해 연신 찬사를 쏟아내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와 모리구의 관계를 땅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다. 가족놀음에 집착하는 모리구를 말려 달라는 청탁을 덧붙이지도 않았다. 누트 멤피스가 정해둔 선이 강철처럼 단단했다.
산등성이 너머로 태양이 넘어갔다. 노을이 사방에 깔려 하늘과 땅이 연결되었다. 나는 황금 배에만 시선을 주었다. 청금석으로 곳곳을 장식한, 금빛 찬란한 태양의 항해선은 주인을 쏙 빼닮았다.
“이 배의 엔진 구조는 현대의 비행기와 흡사하네요. 이것도 생산 인프라가 확실하지 않은 건가요?”
“인프라? 모르는 단어이나 어떤 뜻인지 대강 예상이 가는군. 그렇다, 이것 역시 자체 제작만이 가능한, 세상에서 단 한 대뿐인 짐의 이동수단이다!”
왕이 호쾌하게 웃었다. 비공정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썩 마음에 드는 소일거리인 듯했다.
사막왕의 비공정이 대단치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도 감탄사를 꺼내 왕의 장단에 맞추었다. 필기하고 싶은 것은 주머니에 쏙 들어갈 크기의 노트를 펼쳐 휘갈기듯 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모리구와 왕의 기묘한 관계에 대한 공상이 공간을 차지했다.
새장 속에 상대를 가두어 두고 있는 쪽은 모리구일까, 아니면 누트 멤피스일까.
누트 멤피스는 모리구가 자신을 거두었다고 이야기했지만, 내가 보았을 때 이 영리한 왕은 모리구가 스스로 자신을 선택하도록 만들었을 것 같았다.
신관님들의 귀환이 늦어졌다. 조슈아 님과 카사블랑카가 누트 멤피스와 마주하지 못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렉스 님의 부재로 말룸은 또 서류 폭탄을 맞았다.
엘로힘에게 전해 듣기로는 신관 살인범 체포에 진전이 있었다고 한다. 장례 도중 살인범으로 추정되는 자가 나타나 생포했다는 것이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실력이 뛰어난 고위 기사였다. 딸의 치료를 거부당하고 앙심을 품어, 대신관들이 방심한 틈을 타 파편을 사용할 새도 없이 살해했다는 것이다.
말룸의 표정이 사금파리처럼 날카로웠다. 황금 사냥과 항만 유치 사업이 매듭지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는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했다.
“범인이 꼼짝없이 아라크네인 줄 알았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행동력을 너무 얕본 탓이겠죠.”
이른 아침, 말룸이 넌지시 일의 정황을 묻는 내게 흐린 눈빛으로 답했다. 나는 그의 품으로 한껏 파고들었다.
“신전은 적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라크네를 의심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었어요.”
말룸이 내 등을 감싸 안고 아이 어르듯 했다. 그는 내 위로 이불을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치고 표정이 밝아 보이지는 않네요.”
“당연하죠. 추측이 빗나간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니까. 아주 뜻밖의 일이에요……. 아라크네는 정말 칩거하고만 있었을까요? 의심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말룸은 나와 딱 붙어 있었지만 홀로 항해를 시작했다. 그가 붉은 입술을 짓씹으며 공연히 괴롭혀댔다.
심장이 거칠게 쿵쾅거렸지만 그에게 작은 입맞춤을 건넸다. 말룸이 이불째로 나를 끌어안고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당신이 있어서 기뻐요, 오필리아.”
“그건 다행이네요. 음……. 그럼 당신은 모리구와 아라크네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말룸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성가신 녀석들이지요.”
“싫지는 않은 거죠?”
“그럴 가치도 없어요. 거슬릴 뿐입니다.”
“말룸…….”
“멋대로 가족놀음을 강요하는 것 자체가 진력이 나요.”
말룸이 쭉 기지개를 켰다. 목소리가 햇빛에 늘어졌다. 나는 그의 짙은 남빛 머리칼을 가만가만 매만졌다. 말룸의 입매가 굽은 가지처럼 만족스럽게 휘었다.
“오필리아, 조금 더 깊이 닿고 싶은데. 어때요? 허락해주지 않을래요?”
말룸이 능청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날 숨겨줄 이불을 찾아 눈을 굴리자 머리 위에서 뱀이 또 소리 내어 웃었다.
“저기, 지금은 아침인데요.”
“여보, 우리는 부부인데요.”
“으으, 정말…….”
그가 내 어깨를 작게 덧그리듯 간지럽혔다. 나는 태양신의 손이라도 맞잡은 것처럼 속절없이 무너졌다.
결국 내 쪽에서 먼저 말룸을 끌어당겼다. 얌전히 끌려온 사내가 내 살결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자신의 것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처럼 그는 요새 자주 키스했다.
그가 내게 매달리는 동안 나는 말룸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가는 남색 실의 감촉이 부드러워 버릇이 들릴 것 같았다.
말룸의 얼굴이 위로 바짝 드리워졌다. 나는 그의 화려한 이목구비를 천 년이 지나도 잊지 않기 위해 가슴에 꼭꼭 담았다.
“사랑해요.”
말룸의 목소리는 평소에도 저녁에 잠긴 파도 같이 우아했지만 그가 직접 사랑을 발음할 때만은 못했다. 나도 그에게 화답을 해주기 위해 입을 달싹여 이야기하려던 찰나였다.
“저도요, 말─”
“─아, 이런. 그, 죄송해요.”
진심 없는 사과가 삐걱 하고 마루청의 비명과 함께 들렸다.
“…….”
모리구였다.
점점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급히 불어난 물살에 휩쓸려 사라졌다. 까마귀가 물을 죄다 퍼마시는 바람에 강의 하류는 물론이고 바다까지도 메말랐다.
모리구는 노크 소리도 없이 문을 반쯤 열어낸 채 있었다. 그자가 멋쩍은 듯 밉살맞은 미소를 지었다.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더니 정말 자신이 소년인 줄 아나 본데…….
나는 그만 너무 황당해 눈만 깜빡거렸다. 나를 품듯이 하고 있던 말룸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성은 난리가 났다. 심벌즈 소리가 요란했다. 천장과 바닥이 뒤집히는 것 같은 굉음이 내벽을 침식했다. 작은 벌레의 잠까지 깨울 성싶었다.
1층 로비, 사용인들은 아침부터 벌어진 대공의 기행과 학대당하는 까마귀를 애써 외면하고 자신의 업무에 집중했다.
수석 요리사 헬버트 씨가 못 본 꼴을 보았다는 양 주방으로 황급히 자취를 감추었다. 티샤가 내 곁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모아는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되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밋밋하게 웃으며 티샤와 모아를 안심시켰다.
로보가 층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지 직접 살피러 온 것 같았다. 그는 잠기운이 씻기지 않은 낯으로 쩍 하품을 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시끄러워서 깨버렸잖아.”
인어의 건장한 구릿빛 상체가 사용인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파격적인 디자인의 꽃무늬 셔츠는 단추를 하나도 잠그지 않아 탄탄한 초콜릿색 복근과 그 위에 새겨진 오래된 흉터들을 그대로 전시했다. 로보는 잠기운에 묻혀 차림새를 살필 틈이 없어 보였다.
“어쩐지 어젯밤에 육지 황자가 귀마개를 주고 가더라. 미리 봐서 알고 있었나 봐.”
로보가 내게 성큼 다가왔다. 나는 눈을 어느 곳에 두어야 할지 몰라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아함, 졸려라……. 오필리아도, 지렁이 녀석도 여기 다 모여 있고, 어디보자, 까마귀도 있네. 이건 또 참신한 꼴인걸.”
아이바르가 그에게 물이 든 컵을 내밀었다.
“아, 고마워. 아이바르라고 했었지? 오래간만에 보네.”
로보가 감사를 표하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셔 잠을 쫓으려 했다. 나는 간신히 천장에서 시선을 떼어 로보를 보았다. 아침에도 푸른 상록수처럼 청량한 사람이었다. 울긋불긋한 꽃무늬 셔츠가 구릿빛 피부와 참 잘 어울렸다.
“상황 좀 설명해줘. 게다가 오필리아, 무척 화가 나 보여…….”
넌지시 묻던 로보는 내 시퍼런 낯과 정면으로 마주치자 겸연쩍게 시선을 빗겼다. 심벌즈 소리에 골이 다 아팠지만 나는 냉랭한 표정을 바꾸지 않고 벽에 비스듬히 기댔다.
“방해했어요.”
목소리가 빙하처럼 차갑게 났다. 이 소란스러움은 일종의 형벌이었는데, 나도 형벌 집행에 일조하고 있었다. 로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양 ‘음……’ 따위의 신음을 내었다. 나는 힌트를 더 주기로 했다.
“부부 사이의 일을요.”
“아하.”
전말을 짐작한 그가 뒷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뭐, 그렇다면야. 그래도 이건 너무 요란하지 않아? 게다가 의외야. 지렁이가 이럴 녀석은 아니잖아. 차라리 썩게 만들거나 공격하는 게 녀석답다고 생각하는데.”
“누트 멤피스가 상하게 하지 말라고 해서요. 안 그래도 모리구의 어깨 관통상이 다 낫지 않았대요. 그래도 말룸이 모리구를 공격하려고 해서, 대신할 만한 방법을 제시해 준 것뿐이에요.”
“네 아이디어였어? 어쩐지. 나 참, 그 사막왕도, 지렁이 녀석도 팔불출이라니까. 하긴, 내 창의 저주가 통하지 않는 게 상처가 간단히 아문다는 의미는 아니지. 말끔히 나으려면 꽤나 걸릴걸?”
로보는 말룸의 보복을 구경할 셈인지 한쪽 다리에만 힘을 실은 어정쩡한 자세로 관망했다.
새장 속에 갇힌 까마귀의 붉은 외눈이 절박함을 품고 로보를 올려다보았지만, 로보는 양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취할 뿐 모리구를 도우려 나서지 않았다.
로보는 현명했다. 만약 그가 모리구를 구하겠답시고 말룸을 저지했다면 나는 잔뜩 화가 나서 깊이 쏘아붙였을지도 몰랐다.
챙, 채챙, 채쟁, 챙…….
심벌즈가 경쾌하게 입을 쩍쩍 다물어댔다.
새장을 높이 든 말룸은 심벌즈 챙강대는 소리를 빠르게 했다. 말룸의 주술로 불이 붙은 악기가 허공에서 넘실넘실 춤을 추었다. 거대한 철판 둘이 이를 쩍쩍 맞부딪혔다. 악기 바로 밑, 새장에 갇힌 까마귀의 고막을 가루만 남도록 부숴 버릴 듯했다.
“깍, 가악, 까악─!”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애처롭게 각각거렸다. 말룸의 설명으로는 모리구에게 악기 소리가 몇 배는 증폭되어 들리도록 술수를 부렸다는데, 그의 말마따나 까마귀는 소음에 먹혀 고개를 털어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