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90화
그는 내게 멤피스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천 년 전 불타버린 땅을 재건하겠노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종이 뭉치에서, 말라붙은 검은 잉크에서,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삐뚜름한 레시우스어에서 그가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는지는 또렷하게 그릴 수 없었다. 그저 왕의 눈동자가 맹렬히 타오르는 푸르스름한 불길을 닮아, 그가 하는 일에 베팅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왕은 그야말로 천재였다. 유리 온실에서의 시간이 영원했으면 싶기도 했다.
누트는 하나를 설명하면 열을, 백을 깨우쳤다. 누트 멤피스야말로 축복 받은 재능을 타고났다.
세계가 마지막으로 틔워낸 최고의 가능성.
황금 사냥 당시 크로노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과장된 표현이 결코 아니었다. 대화를 나누어 보니 인격적으로도 쾌활하고 상대하기에 지루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로보가 왕족으로서의 자부심과 오만함을 지녔다면 누트 멤피스와 닮지 않았을까? 정작 로보는 누트 멤피스와 닮은 구석이 있다고 한다면 학을 떼겠지만.
“소름이 끼치는군. 물론 나쁜 의미다. 네가 그럴 줄은 몰랐는데……. 정정하지. 너는 포인세티아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그 애는 무엇이든 포용하고 넓게 관심을 갖는 식이라 한 가지에 몰두하는 법이 없었지.”
엘로힘은 누트 멤피스와 나의 대화가 끝없이 이어지자 이렇게 평하고는 도중 자리를 떴다. 미래 감상이 모두 끝났는지 만족스러운 얼굴의 크로노도 함께였다.
나는 배웅의 뜻으로 설렁설렁 고개를 까딱인 후 누트 멤피스와의 토론에 열중했다.
나와 누트 멤피스는 각각 말룸과 살라딘에게 붙들려 떼어내질 때까지 유리 온실을 떠나지 못했다.
멈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처럼 지구의 이야기를 편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내 말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말룸과는 살짝 다른 구석이 있었다.
말룸에게 지구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설명을 해야 했다면 누트 멤피스와는 설명을 생략한 대화가 가능했다. 그는 냉장고에 대해 설명해도, 비행기에 대해 설명해도, 자동차, 컴퓨터에 대해 설명해도 단번에 척척 알아들었다.
누트 멤피스는 모래바람에 묻힌 값비싼 유물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감격해서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누트 멤피스의 천재성에 휘말려 고무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왕이 내게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우리는 며칠 동안 말을 나누었다. 복도에서, 중앙 홀에서, 때로는 함께 산책을 하면서, 말룸의 사나운 눈초리를 스리슬쩍 빗겨낸 채로. 엘로힘이 유리 온실에서의 품평으로 의심을 한 꺼풀이나마 거두었는지 풀려난 모리구도 함께였다.
카르나크와 알 카이라, 살라딘은 곁에서 메모를 하고 각자의 사업에 적용하기 바빴다. 그들이 나누는 사업 이야기까지는 차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천재들이 기상천외한 변화를 끌어내려니 하고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 땅이 하나의 큰 자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의미죠, 비전하?”
살라딘이 명랑히 이야기했다.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거론할 때의 소년은 거추장스러운 수줍음을 벗어던졌다. 나는 영특한 아이의 머리칼을 잔뜩 헤집었다.
“맞아, 살라딘.”
모든 아이들이 살라딘과 같다면 이 세계는 고통 받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순수가 자라 너른 나무가 되어 세상을 지탱할 테니까.
“오필리아, 먹으면서 해요.”
말룸이 한숨을 쉬며 포도주잔을 건네주었다. 저녁 식사 시간, 서류를 펼쳐 놓은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말룸은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 식사를 등한시하는 어린아이 대하듯 이야기했다.
“고마워요, 말룸. 음, 그리고 그걸 이용하면 나침반이라는 것도 만들 수 있어. 자기장을 이용한 물건인데, 방위를 가리키도록 해서 사막이나 바다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하는 거야.”
“저희도 나침반은 사용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주술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거예요. 자연과 공명해 앞의 장애물을 미리 보아 시야를 넓게 하는 식이거든요.”
“잠시, 요정이여.”
누트 멤피스가 끼어들었다. 그가 수프를 떠먹다 말고 은 숟가락을 지휘봉처럼 들어 휘젓기 시작했다. 버릇인 것 같았다.
“원자핵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전자들은 원자핵과의 결합력이 약하다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원자핵을 초월해 물질 내부에서 자유롭게 박동할 수 있겠군.”
“맞아요, 그런 애들을 자유전자라고 해요! 아니면 전도전자라고도 불러요. 전기로 이루어지는 여러 현상들은 자유전자의 이동에 의해 벌어지는 거라고 해도 무방해요. 지식이 얕아 잘은 모르겠지만요.”
말룸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자유전자가 반려 고양이 이름이라도 되는 줄 알겠군요.”
“이국의 대공이여, 그런 말 마시게. 이건 아주 획기적이야! 그리고 자네 아내는 엄청난 사람이지. 참, 회로를 미리 구상해보았는데, 한번 훑어보지 않겠는가?”
“좋아요. 세상에, 이건 클램퍼 회로잖아요!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경우는 별로 없긴 하지만, 당신이 직접 만들어낸 건가요? 교류신호에 직류전압 값을 더해서─”
“─오필리아! 그만하고 식사해요. 조금 있다 이야기해도 되잖아요.”
말룸이 머리를 짚었다. 식탁에 앉은 이들 중 제대로 음식물을 입에 가져가는 사람이 몇 없었다.
그제야 열이 식어 멋쩍게 웃었다. 차라리 개술하는 것이 나았을까? 막상 말룸의 진력난다는 표정이 내게로까지 향하니 기분이 개운하지만은 않았다.
“그게, 들뜨는 바람에…….”
“혼을 내는 게 아니에요. 아니,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식사 자리에서는 식사만 해야죠. 몸도 안 좋은데……. 당신은 반드시 식사를 챙겨야 하는 입장이란 말입니다. 저를 생각해서라도 먹어줘요.”
말룸이 샐러드를 포크로 한가득 집어 내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자. 아, 해요.”
단호하게 굳은 호박색 눈동자에 대고 차마 스스로 집어 먹겠다 할 수 없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얌 샐러드를 한가득 받아먹었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는 슬금슬금 식탁 밑으로 내려 엉덩이에 깔고 앉은 채였다.
“둘 다 똑같아요. 왕도, 형수님도요.”
모리구가 개신개신 한숨을 쉬었다.
소년의 얼굴에는 말룸과 같은 피로가 가득했다. 피로를 영원히 짊어져야만 하는, 행성의 저주가 내린 까마귀.
그는 로보의 창에 꿰뚫린 어깨가 채 낫지 않았는지 왼손으로 어색하게 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까마귀의 부리가 오물거렸다.
“형, 이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속에 다른 사람 들어앉은 건 아니지?”
“어디서 파리가 윙윙거리는군. 한 번만 더 그 형이니 뭐니 하는 호칭이 들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
“흥, 그러지 않을 거 알아. 형은 형수님 말이라면 뭐든 따르니까. 그리고 참지 못할 만큼 거슬렸다면 재고 없이 검은 안개를 풀어서─”
“─마지막 경고다.”
모리구의 입이 딱 붙었다. 나는 빵 한 쪽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모리구가 말룸에게 형이라 하고 말룸이 모리구를 혐오하는 패턴이 거의 고착화되었다.
“형수님, 저는 형수님이 마법을 부린 줄 알았어요. 형은 형수님을 대할 때만큼은 고성을 지키는 기사처럼 고결하고 사막의 그늘처럼 안온해지네요.”
우리를 주시하던 미형의 소년이 모래알처럼 고운 미소를 띄워 보냈다. 한쪽만 내어둔 붉은 눈이 개암나무의 구조를 분석하듯 호기심을 품고 반짝거렸다. 모리구의 눈동자는 석류처럼 붉었고 인간의 생명력을 한데 밀어 넣어둔 듯 다채로웠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라. 내 아내는 연구 대상이 아니니까.”
말룸이 경계하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모리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거부가 계속되면 속이 상할 만도 했는데 모리구는 참으로 끈질겼다.
그는 말룸이 애지중지하는 내게 악감정이 없어 보였다. 나는 모리구가 삼림에서와는 달리 어린아이처럼 구는 낌새가 무진 수상해 한동안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말룸, 아라크네, 모리구, 라딘라티.
신전 측에 사냥당해 죽은 스콜피오를 제하고 세계에 현재 남아 있는 괴물들이었다.
라딘라티는 엘로힘과 함께 천 년 전 구세계서부터 존재했고, 말룸은 칠백, 모리구는 오백 묵었다. 아라크네는 얼마나 살았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몇백은 훌쩍 이승에서 지냈을 테다.
이들은 긴 시간 존속하며 라딘라티의 명령만 받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룸을 제외하고서는, 모리구가 말했던 것처럼 가족놀이를 즐기기도 했겠지.
모리구는 티포주 성에 도착한 이후 가만가만 나를 주시했다. 시선이 느껴진다 싶을 때 주변을 둘러보면 범인은 어김없이 모리구였다.
그는 내게 들킨 이후로도 벽 뒤나 모퉁이 너머로 숨지 않았다. 그는 천진난만한 소년을 흉내 내면서 재간을 부렸다.
나를 향할 때 모리구의 눈동자는 소년의 순수를 담아 달처럼 빛나다가도 섧게 일그러져 울분을 삼켰다. 그러나 원수를 보는 시선은 아니었고, 나를 향한 시선도 아닌 듯했다.
모리구의 눈길은 항상 내 뒤편으로 향해 말룸을 좇았다. 가족이라 생각한 상대가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에서 나오는 서러움이 짙었다.
모리구는 말룸이 나와 보폭을 맞추어 걷거나 불편한 다리를 대신해 나를 번쩍 안아 올렸을 때, 좋은 아침이라며, 당신이 보고 싶었다며 내 입가를 어루만지다 이마에 입맞춤했을 때 가장 비참하다는 얼굴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개염을 부린다는 정도로 단정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모리구는 명백히 말룸에게 가족의 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설령 그 감정이 불살라져 재로 변했대도 잔상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말룸은 모리구와 끝까지 평행선을 달렸다.
나도 말룸과 모리구 사이를 중재할 생각이 없었다. 모리구를 받아들이고 말고는 말룸의 선택에 달린 일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모리구를 말룸에게서 떼어놓고 싶었다. 모리구의 가족놀음이 겉으로 드러날 때면 말룸은 송곳으로 심장이 들쑤셔진 사람처럼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영 말룸이 관심을 두지 않자, 급기야 모리구는 나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는 출입을 허가받은 미로 정원에 자주 걸음 하는가 싶더니 식물과 친하다는 듯 머리에 꽃잎을 잔뜩 묻히고 복도를 돌아다녔다.
고의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엉성한 실수도 했다. 음식물이 필요치 않으면서도 물을 마시는 척 컵을 주물거리다 옷깃에 흘리기도 했고, 누트 멤피스의 앞으로 가 자신이 발견한 수식을 좀 보라고 칭얼거리기 일쑤였다.
성안의 사용인들은 아름답게 잘 빚어진 미소년이 처연한 듯 구니 보듬지 못해 안달이었다. 요즘 모아의 관심은 로보에게서 모리구에게 옮겨간 것 같았는데, 얼마 전 나는 모리구가 모아가 선물한 스웨터를 보란 듯 입고 다니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결말은 이미 매듭지어져 있었다. 모아는 시커먼 동굴 속에 갇힌 것과 진배없었다. 부디 오백 묵은 늙은이가 소녀의 순정을 짓밟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언제까지 저렇게 둘 거예요?”
겨울의 중앙이라기에는 햇살이 따사로웠다. 성의 바깥, 현관으로부터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나는 목발을 짚고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누트 멤피스가 비죽 솟은 청금석 고양이 귀를 툭툭 건들며 얹힌 먼지를 털어냈다.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양 앞서나갔다.
“누트, 제 말 듣고 있나요?”
내 채근을 이기지 못한 누트 멤피스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짐의 모리구가 만족할 때까지다, 요정이여.”
“비정상적인 건 알죠?”
왕이 희미하게 웃었다. 새벽녘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닮았다.
“나름의 치료 방식일 테니 너그러운 맘으로 재롱 떤다 여겨주었으면 하는군. 모리구는 긴 시간을 살았으면서도 자라지 못해 항상 위태롭지. 본디 여문 사람이었다가 어린아이처럼 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자라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리구의 속내에 짐조차도 알지 못하는 그만의 상념이 깃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짐을 아비라 생각해도 좋다 이야기했건만, ‘네가 아니라 내가 네 아버지겠지!’ 하며 젠체하는 게 아닌가. 참 손이 많이 가는 신하로다.”
모리구에게 향하는 왕의 친애가 선연했다.
왕은 오랫동안 함께한 스승을 그리듯, 혹은 카사블랑카를 바라보는 조슈아 님처럼 구원자를 대하듯 모리구를 회상했다. 모래바람조차 흩어내지 못할 친애와 그들이 함께 보냈을 시간이 왕과 까마귀의 유대를 쇠사슬로 칭칭 동여맸다.
괴물과, 인간.
누트 멤피스와 모리구는 꼭 말룸과 나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