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89화
“둘째 형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한 것 아닌가.”
“난 인간의 본질을 보고 판단할 뿐이오. 아가멤논 형님은 철저하게 평범하고, 그 때문에 포이보스 형님의 그림자에 덮여 마모될 운명이지. 깎여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 상호 이롭소.”
누트 멤피스는 의아한 기색이었다. 나 역시 처음 듣는 둘째 황자 이야기에, 그리고 그를 품평하듯 하는 크로노의 태도에 냉기를 느꼈다.
“혈육이 아닌 남을 대하듯 이야기하는군.”
“아가멤논 형님께서는 날 동생이라 생각하지 않소.”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받은 만큼만 베푸는 사람이오.”
크로노는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누트 멤피스는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크로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왕과 황자의 눈빛이 각자의 함의를 담고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먼저 고개를 돌린 쪽은 크로노였다. 그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살짝 늘어뜨렸는데, 현 상황이 시간 쏟을 가치가 없는 단막극처럼 다가온 모양이었다.
“어쨌든, 형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도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오……. 하물며 우호관계도 아닌 멤피스인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더더욱 없지. 혹시 당신이 내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싶다면, 내가 아니라 형님을 직접 대면하고 협상을 벌여야 할 것이오.”
“헬리오스 황제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실권자는 형님이오. 폐하께서는 5년 전쯤 대부분의 일선에서 물러나셨지.”
자칫 반역을 도모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었음에도 크로노는 가차 없었다. 누트 멤피스가 흥미를 품고 깊이 웃었다.
“만약 태자의 인정을 받아 레시우스와 우호관계가 되면, 자네는 내게 말을 높일 텐가?”
“그렇겠지. 오합지졸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일국의 왕으로써 형님께 받아들여진다면, 나는 따를 것이오……. 하지만 당신은 레시우스의 밑으로 숙이고 들어와 우호관계를 맺을 인간군상이 아니지. 떠보기는 그만두시오…….”
크로노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의 형과 관련해 취하는 태도가 몹시 배타적이었다.
포이보스 레시우스라면 나도 몇 번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크로노가 유폐 생활을 할 때 뒤를 봐 주었다는, 레시우스 제국의 황태자. 크로노는 그를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여러모로 궁금증을 자극하는 인물이었다. 누트 멤피스는 그자가 봄처럼 다정하다 평했으나, 만약 그가 정복전쟁을 주도한 인물이라면 나는 그 견해에 동의할 수 없었다.
예언자의 은빛 눈이 먼 하늘을 헤아리며 반짝였다.
“누트 멤피스, 인간 아닌 자들의 왕. 당신은 까마귀를 새장 속에 가둔 것도 모자라, 사막의 모래와 함께 태어난 거인의 사랑을 받고 있소……. 행성이 직접 빚어낸 인간이 아니라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지.”
누트 멤피스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의 표정이 별을 담고 아름답게 피어났다.
“아몬아크사를 아는가? 별항아리를 짊어진, 나의 유일한 벗……. 하지만 그 녀석은 날 사랑하긴커녕 매번 신경질만 내는데. 이번만 해도, 귀환이 늦어진다 연락했을 때, 돌아오면 날 활화산 분화구 속으로 밀쳐 버리겠다고 얼마나 날뛰던지.”
“아몬아크사가 누구인지는 내 알 바 아니오. 보이는 것만 읊었을 뿐이니, 좀, 대화에 집중하시오.”
크로노가 불만스러운 눈치로 크리스탈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렸다. 누트 멤피스는 사람 내면을 긁어 본심을 끄집어내는 데 천재적이었다.
“당신은 좋은 운명을 타고났소. 성공할 수밖에 없는, 메마른 대지에 번영을 불러일으키는 행성의 왕이지. 하지만 그 운명이 당신에게만 주어졌다 착각하면 곤란하오…….”
누트 멤피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것 참 영광이군! 자신이 예언을 할 수 있다 떠드는 레시우스 3황자의 소문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헛물켠다는 세간의 평과는 달리, 그대는 제법 정확한 눈을 가진 듯싶어.”
크로노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웠다. 하지만 나는 곧장 깨달았다. 방금 누트 멤피스의 그 말로 크로노는 적대감을 상실했다. 모래폭풍이 가신 자리에서 길 잃은 청년이 별자리를 헤아렸다.
“내가 인간 아닌 자들의 왕이라면, 인간의 왕은 누구지?”
누트 멤피스가 흥미를 품고 이렇게 물었을 때, 크로노는 가차 없이 답했다.
“나의 형님이시오.”
“재미있군, 레시우스의 3황자여! 그대를 곁에 두면 심심하진 않을 것 같다.”
“난 놀잇감이 아니니 모래밭에서나 헤엄치시오.”
나와 엘로힘은 누트 멤피스에 대한 평가를 살짝 상향조정했다.
크로노도 그의 예언을 나 외의 다른 이에게 인정받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았다. 크로노가 누트 멤피스를 일찍 만났더라면, 내게 깊이 집착하는 성향도 다소 수그러들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크로노는 말소리를 내지 않았다. 누트 멤피스와 가까워지려 하지도 않았다.
자작나무 숲에서, 크로노가 자신의 신은 하나로 족하다며 로보를 밀어냈던 상황이 떠올랐다.
크로노가 테이블의 무늬를 눈으로 따라 덧그렸다. 그는 자신의 형님을 아예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크로노는 연거푸 탁상만 바라보다가도 열사지대의 찬란함을 보고 싶을 때면 누트 멤피스를 빤히 관찰했다.
왕이 어떤 부분을 들쑤셨든지, 크로노는 심신안정제 정도로 왕을 대했다. 이는 크로노가 누트 멤피스의 영광만을 찬양할 뿐 누트라는 인간 자체에는 관심이 없음을 뜻했다.
말룸도, 크로노도 모두 자신의 세계에 높다란 담장을 둘러쌓고 살았다. 동굴에서 풀어주어야 하는 사람이 여기 한 명 더 있었다.
문답이 시작되었다. 나는 크로노를 신경 쓸 여유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종이를 풀어낼 때가 되었다. 십여 년 간 땅에 묻어두고 외면했던 타임캡슐을 여는 것이다.
종이더미가 손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과장을 보태면 이 검은 글씨야말로 내 가치였고 누트 멤피스에게 보이는 출품작이었다.
테이블 위에 종이더미를 올려두었다. 육중한 소리가 났다. 엘로힘과 크로노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많은 양의 종이 뭉치를 뜻밖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누트 멤피스만큼은 곧은 청색의 눈으로 나를 탐색하듯 주시했다. 왕은 나를 알지 못해 되레 선입견이 없었다.
“저기, 크로노, 그리고 엘로힘 오빠.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상관없다.”
엘로힘이 홍차를 느긋하게 한 모금 마셨다. 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강물처럼 가라앉아 가치를 쟀다. 그것 또한 왕의 시선이었다. 부디 우리의 교섭이 엘프의 성에 차 누트 일행을 용인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편 크로노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예언을 통해 미리 알았는지 자신의 앞 공간에 마른 꽃잎과 작은 통나무, 둥글둥글한 자갈 같은 공예 재료를 펼쳤다. 엘로힘도 눈치 좋게 자기 앞으로 티백 여럿을 끌어다 놓았다. 하긴, 엘로힘과 크로노가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해서 왕과 나를 둘만 남겨둘 사람들은 아니었다.
종이 뭉치를 누트 멤피스 편으로 밀었다. 지면이 먹물로 세탁한 듯 얼룩덜룩했다. 찻잔이며 홍차 든 유리 주전자도 한쪽으로 치웠다.
작열하는 태양을 닮은 사막의 청년이 오묘한 빛깔의 눈동자를 날카롭게 벼렸다. 청명한 하늘 아래 자리한 황금이 이해타산적으로 번쩍였다.
“일단 기억나는 것만 적었어요. 틀린 게 있을지도 모르고, 쓸모없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도움이 될 법한 걸 골라 보았으면 해요. 그런 다음 그 부분에 대해 심도 깊은 얘기를 나누면 효율적일 것 같아요.”
자료는 모두 레시우스어로 적혔다. 비뚜름하니 예쁜 글씨는 아닌데다 군데군데 철자 틀린 곳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누트 멤피스는 레시우스어에도 능통한 것 같았으니 전달에 어려움은 없을 듯했다.
“열심히 준비했구나, 요정이여.”
“……그 요정 소리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요.”
누트 멤피스는 머리칼을 쓸어 넘길 뿐이었다. 유아독존의 사내였다. 언성 높여 대거리하기도 애매해 그냥 두었다.
“잠깐 살피겠다.”
왕이 몸을 바짝 세워 종이를 낱낱이 훑었다. 하늘이 내린 집중력이었다. 누트 멤피스의 손가락이 줄글을 쓸어나갔다. 그가 정보를 받아들일수록 왕의 동공 깊은 곳에 이채가 아롱졌다.
왕은 오아시스를 만난 사막의 표류자였다. 또는 오랜 유적을 발견한 고고학자였다. 환희가 왕의 얼굴을 조각했다. 긴장이 돌아 나는 손바닥에 손톱을 박는 식으로 진정했다.
누트 멤피스가 말을 아꼈다. 대신 하나하나 필기를 분류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내용일 텐데도 그는 망설이거나 멈칫하지 않았다.
나는 내심 놀라 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지만 일렁이는 표정이 그의 심경을 대변했다. 나는 이 거래가 성공할 것임을 직감했다.
“어때요?”
누트 멤피스는 첫 배를 가진 항해사처럼 요동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것 같았다. 그는 종이를 보고 있었지만 흰 직사각형이 담고 있는 것보다 더 넓은 세상을 그렸다. 애당초 나와 시야각이 다른 사람이었다.
“쓸 만한 게 있나요?”
나는 답을 미리 알았지만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겉치레에 불과했지만 물건을 출품한 사람으로서 견뎌야 하는 과정이었다.
누트 멤피스가 종이 몇 장을 골라 한데 묶었다. 그는 완성 작품이 든 캔버스를 매만지는 화가처럼 햇살 물든 면으로 종이 뭉치를 내게 주었다.
“어떠냐고, 쓸 만한 것이 있냐고 물었던가? 그저 쓸 만한 수준이 아니다. 짐은 이것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원한다.”
왕이 집어낸 것은 전기와 관련된 필기 뭉치였다. 그는 전기전자공학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누트 멤피스는 동력원의 기반을 흡수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내가 느슨하게 웃었다. 그가 늙은 가젤을 발견한 초원의 사자처럼 발톱을 세웠다. 기세가 날카로운 창검보다도 거칠었다.
“기계라는 것도, 설계도면도, 컴퓨터라는 것도 전부 흥미가 있느니라. 허나 지금의 멤피스에는 무용지물, 기반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란 판단이다. 그러나 이것이라면 빠른 시일 내에 멤피스에 도입할 수 있겠지. 짐의 말이 틀렸는가? 전류야말로 주술의 대체제가 되어줄 것이다.”
“확신하진 못하겠어요. 저는 멤피스의 기술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몰라요.”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나 레시암 대륙과 다를 바 없다. 짐과 다른 수행원들이 가지고 있는 창힐의 눈은 제작이 쉽지 않아 소수의 사람만 사용 가능하지. 짐이 가진 것, 짐의 수행원들이 공동으로 가진 것, 짐이 부재하는 동안 왕위를 맡아줄 친우가 가진 것. 이렇게 세 체가 전부다.”
누트 멤피스가 창힐의 눈을 탁상 위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살피라는 양 내 쪽으로 기계를 밀었다. 어설프게 손을 뻗자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창힐의 눈을 집어 낱낱이 살폈다.
홈 버튼이 있고 그것을 누르면 작동되는 것까지는 스마트폰과 비슷했다. 그러나 순전히 연락용인 듯 다른 기능이 없었고, 주술을 통해 동력을 공급하는지 배터리 표시칸도 찾을 수 없었다.
누트 멤피스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빛의 띠를 흩어버리자, 창힐의 눈은 방전된 것처럼 작동을 멈추고 철제 날개를 접었다.
나는 누트 멤피스가 새로운 기술에 집착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저 기계는 생산 인프라가 없었다. 창힐의 눈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누트 멤피스와 같은 주술 사용자가 없으면 고물에 그쳤다. 대량생산에는 차라리 무전기가 더 나을 듯했다.
굳건한 수려함을 품은 왕의 얼굴이 모래가 고인 것처럼 메말랐다.
“눈치챘겠지만 창힐의 눈은 그저 통신, 추적, 탐색용이다. 이런 고도의 기술보다는 사막을 개간하기 위한 기반시설의 개발이 더욱 급하다. 멤피스인들은 몸을 불태워 버릴 것 같은 더위에 시달린다. 기온이 최고로 치솟는 지역은 발을 들여놓기만 해도 육신이 발화하기 때문에 출입을 통제하고 있지. 당장 마실 식수조차 마련하지 못해 먼 강의 물줄기를 끌어와 관개 사업을 추진해야 했다.”
누트 멤피스의 음성이 움푹 가라앉았다. 비죽 솟은 청금석 고양이 귀가 축 늘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멤피스에서 주술을 부릴 수 있는 자는 단 일백이다. 짐은 그것을 극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전기는 곧 동력이에요. 하지만 만능은 아니에요.”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요정이여.”
왕이 씩 웃었다.
“그것은 짐이, 모리구가, 미래를 향해 걸어갈 멤피스의 백성들이 할 일이지. 그대는 그저 단초를,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것이다.”
누트 멤피스가 바다를 닮은 청색 눈을 반짝였다.
“짐의 왕국은 미래를 향해 항해하는 황금의 방주일지니! 그대가 협력한다면 결코 후회할 일 없을 것이다.”
허황한 꿈을 따르는 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트 멤피스는 허풍선이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