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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88화 (88/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88화

가물어 쩍쩍 갈라진 농지를 개간하는 이주민이 된 것 같았다. 죽은 흙을 옆으로 치워내다 보면 하던 생각이나 계획을 폐기해 버리고 사랑해요 따위만 발음하고 싶어졌다. 식물에게 좋은 말을 해주면 잘 자라는 법이니 사람도 그러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다리가 욱신욱신 당겨 인상을 찌푸렸다. 말룸이 약초 물이 가득한 유리잔을 손에 쥐여 주었다. 한 방에서 생활한 이후 일상이 된 행동이었다.

그는 내가 약간의 고통이라도 느낄라치면 귀신같이 눈치채고 먼저 조치를 취했다. 물을 모두 삼켜 내고 인상을 찌푸리자 사탕 하나를 입에 넣어주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햇살이 점점이 방 안으로 내렸다. 말룸은 환한 빛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거렸다. 그를 볼 때마다 외모 찬양에 매몰되어 다른 것을 헤아릴 틈이 없었다.

“오늘은 일 안 해도 괜찮아요?”

머리를 올려 묶던 말룸의 흰 목덜미가 남빛 실타래에 가려 사라졌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자연스럽게 빠져나온 잔머리가 새어 들어오는 겨울바람에 맞춰 살랑 춤을 추었다.

“휴가입니다.”

말룸이 대수롭지 않은 양 어깨를 으쓱였다.

“대공도 휴가가 있어요?”

“제가 쉬고 싶으면 휴가인 거죠.”

“쉬고 싶은 날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당신 일 중독인 거 모르는 사람 이 성에 없을 텐데.”

누가 말룸을 바꿔치기 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눈을 가자미처럼 게슴츠레하게 뜨고 관찰하는 시늉을 했다.

“들켰네요. 변명이라 쳐요. 당신이 너무 따뜻해서, 안고 있다 보면 침대 밖으로 벗어나기가 힘들어요.”

용도는 다르지만 죽부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나는 일을 하라 종용하는 대신 그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잔머리가 비죽 튀어나왔다.

“오필리아. 머리 헝클어뜨리기, 누가 이길지 맞춰 볼래요?”

말룸이 헛웃음을 짓고 아예 머리를 풀어 내렸다. 그러더니 내 머리 위로 이불을 푹 뒤집어씌웠다. 그러고는 나를 이곳저곳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나는 눈물이 쏙 빠질 때까지 깔깔거렸다. 간간이 말룸의 웃음소리도 높게 들떴다.

장난이었다……. 연인들이나 부부 사이에서 오갈 법한 외마디 장난. 상대에게 장난을 치다 보면, 그리고 장난을 받아내다 보면 상대와 사슬로 단단히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을 받을 때가 있었다.

일방적인 장난은 어색하거나 곤란한 상황을 만들었지만 나와 말룸이 서로에게 치는 장난은 물웅덩이에 빠져도 깔깔거릴 수 있는 기쁨을 번지게 했다.

“무거워요!”

“하하, 무거웠어요? 좀 더 자요. 당신은 자는 모습도 예뻐.”

아직도 그의 달콤한 말은 적응이 되질 않는다. 한 번 몸서리 친 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쨌든 안 돼요, 늦었어요. 저도 일이 있다구요.”

나는 이불에서 머리와 양 팔만 내민 상태로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오늘부터 누트 멤피스와 이야기해볼 거예요. 엘로힘 오빠도 제가 뭘 하나 보고 싶다고 했고요.”

“그건 좋을 대로 해요. 알렉산더가 관심을 보이는 건 의외지만요.”

“감시 목적으로요.”

“아하…… 그럼 그렇지.”

말룸이 이부자리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단단히 디뎠다. 등허리가 곧게 선 모양새마저 유려했다. 건장하게 잘 짜인 근육이 적나라했다. 창백한 피부 위로 내린 남빛 머리칼이 설원에 비친 밤하늘처럼 고왔다.

잠자코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사과나무 가지가 무성히 엉긴 천장이 마음 구석구석을 투영해 갖가지 향기를 풍겼다. 나는 차라리 다른 괴물 생각을 하는 편을 선택했다.

“모리구는요?”

“알렉산더가 새장에 가둔 걸 아직 안 풀어준 모양이에요. 그의 방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카사블랑카와 조슈아, 렉스는 희생된 대신관의 장례 건으로 아침부터 나가서 며칠 바깥에 머무른다더군요.”

“오히려 낫네요. 누트 멤피스가 카사블랑카를 보면 분명 달려들겠죠? 그리고 카사블랑카가 부글부글 끓든 말든 수인족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해주길 종용할 거예요.”

말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미리 빼 둔 간단한 옷을 갖추어 입었다.

“둘이 마주치지 않게 하는 게 좋겠어요. 카사블랑카는 감정 조절을 잘 하지 못하죠.”

“아…….”

“휴화산 같다가도 언제 용암을 분출할지 몰라요. 정상은 아닙니다.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화를 내고, 그러다가 금방 조용해지죠. 충동이 심한 작자라, 그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주의하도록 해요.”

마지막으로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말룸은 평소 성 안에서 만날 때처럼 멀끔해졌다.

“성에서 얌전히 지내는 것도 의외입니다. 카사블랑카는 조슈아보다도 주술 폭탄 같은 존재거든요. 그 증오가 옅어질 리 없을 텐데도, 이렇게 보면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 같기도 해요. 아니면 이미 다 타버리고 재만 남았거나.”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말룸과 라딘라티이겠지.

말룸이 가구 위에 올려 두었던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그는 꼭 집사를 흉내 내는 사람처럼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과장된 인사를 건네었다. 곰실거리는 웃음도 함께였다.

“좋은 하루 보내요, 오필리아. 저는 이만 일을 하러 갈게요. 동쪽 지방의 수로가 얼었다는데, 식수를 공급해야 할 것 같아요. 인간들 사는 곳은 바람 잘 날이 없군요.”

“큰일인 것 같은데요. 어서 가 봐요.”

“보고 싶으면 집무실로 오고. 알겠죠? 오늘은 사안이 사안인지라 대집무실에서 일을 보니까 그쪽으로 와요. 보좌관을 더 고용해야 할 것 같은데, 조만간 대집무실을 지금보다 넓은 곳으로 옮겨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말룸이 침대로 다가와 내 양 볼과 입술에 작은 키스를 남겼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말룸은 카사블랑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신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늘 그렇게 고립된 세계에서 자신이 일구어 낸 감정만을 쥔 채 살았다.

나는 그가 거론했던 카사블랑카의 결함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고 있었다. 카사블랑카의 보금자리를 헤쳐 낸 것은 라딘라티였고, 위치를 알린 자는 말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한 톨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세계는 이다지도 넓을진대 말룸은 입맛에 맞춰 기워낸 요소가 아니면 쓰레기 대하듯 등한시했다.

“……당신 진짜 악당 같아요, 말룸.”

이불에 푹 머리를 박았다. 어디론가 떠내려가면 나을 것 같았다.

“당신을 사랑해서 이따금 죄를 지은 기분이에요. 우리는 함께 불타 사라지게 될까요? 너무 해지고 낡아 버려진 난파선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걸까요?”

내가 보았던 원작의 푸른 수염은 라딘라티였고, 말룸은 라딘라티처럼 강박적으로 생명체 전부를 갈아내고 싶다는 듯이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말룸의 망가진 심상이 보일 때면 절벽 사이의 좁은 틈에 끼인 듯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모두가 이야기하기를, 말렉시우스 라딘라티는 순리를 벗어난 괴물,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한 뱀.

라딘라티 처치가 우선이기에 카사블랑카와 조슈아 님, 렉스 님, 그리고 엘로힘 오빠가 우리에게 협력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말룸이나 라딘라티에게 검푸른 앙화를 가진 이상 말룸을 새로운 숙청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나는 착잡하고 서러워 한숨만 푹푹 만들었다. 말룸의 사과 한 마디로 끝날 일이 아니었던 데다, 그는 자신이 한 일들을 잘못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점심, 가볍게 외출복을 입고 바깥으로 향했다. 엘로힘과 누트에게 점심 즈음 시간이 괜찮은지 물으니 둘 다 흔쾌히 그렇다 답했었다.

약속 장소인 유리 온실은 2번 정원에 있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후일 작명 잘 하는 사람을 불러 1번 정원이니 3번 공터니 하는 성의 없는 이름을 개명하고 말 것이다.

차분해지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나는 갓 태어난 망아지였다.

검은 글씨가 빼곡한 낱장 종이들이 손아귀에 잡혀 구깃구깃했다. 나는 말룸을 배웅한 이후, 누트 멤피스에게까지 생각이 닿아 알던 것을 황급히 적어 내렸었다. 왕이 어떤 것을 필요로 할지 몰라 일단 알고 있는 지식 대부분을 요약했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 요소가 태반이었다. 누트 멤피스와 이야기하다 보면 잃어버렸던 부표가 떠오르듯 치즈 한 조각만큼이라도 생각이 날 것이라 희망을 걸었다.

목발을 빠르게 놀려 앞으로 쏘아져 나가듯 했다. 티포주 성의 지리도 상당히 익숙해져 따로 사용인을 대동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종이를 옆구리에 끼운 채로 이동해야 해서 동작이 깔끔하지 않았지만 그 점이 설렘을 덜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광이 나도록 계단을 닦던 사용인이 기겁했다.

“비전하, 이곳은 막 청소를 끝내 미끄러우니 조심하셔야…….”

나는 최근 익기 시작한 귀족 말투를 흉내 내며 점잔을 떨었다.

“아, 그렇지. 수고가 많아, 자네.”

중년의 사내가 한껏 허리를 숙였다. 적응이 되지 않은 인사법에 목덜미가 뜨거워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목발을 빠르게 움직여 자리를 벗어났다. 보는 눈이 많은데 너무 들떴나 싶다가도 종이 뭉치가 다시금 흥분을 불어넣었다.

유리 온실은 사시사철 저물지 않는 선인장과 꽃나무가 들어차 있다고 했다. 나는 그곳에서 내 가치가 만개하기를 바랐다.

겨울의 찬바람이 횡횡했다. 뜻밖으로 나는 크로노와 동행하게 되었다. 그와는 1층 로비에서 딱 마주쳤는데, 오늘 내가 누트 멤피스와 엘로힘을 만나는 것을 미리 보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누트 멤피스와 얘기를 해보고 싶어요?”

크로노는 정곡을 찔렸는지 목각인형처럼 딱 굳어버렸다. 나는 그의 목에 피기 시작한 단풍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유리 온실로 향하는 길은 겨울임에도 잡풀이 무성했다. 말룸은 이런 풍경을 두고 ‘시간을 고정했다’고 표현했다. 시시각각 줄어드는 육신의 시간도 고정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굳이 말룸에게 이 주제로 내 생존율을 묻지는 않았다.

둥그스름한 온실 유리에 두 사람 분의 그림자가 비쳤다. 온실 내부는 풀과 꽃나무가 밀림처럼 무성해 태초의 자연을 연상케 했다.

“도착했군. 어서 와라. 이자와 단둘이 있는 것은 곤욕이었어.”

나를 반긴 엘로힘이 크로노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 애송이도 함께 딸려 왔군.”

누트 멤피스가 너스레를 떨었다.

“비범한 자여, 둘이 있는 것이 곤혹스러웠다니. 친해진 줄 알았는데 짐만의 착각이었나?”

엘로힘은 누트 멤피스를 상대하지 않았다. 사막왕은 이후로도 몇 번 사람 좋게 굴었으나 한편으로는 침입자를 대하듯 크로노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자는 누구지?”

왕의 경계 어린 시선이 칼날처럼 딱딱했다. 꿈속에서 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누트 멤피스에게는 왕의 면모도 명백히 있었다.

나는 크로노를 소개했다.

“이쪽은 레시우스 제국의 3황자, 크로노모르테 레시우스예요. 갑작스럽게 죄송하지만, 혹시 크로노가 함께 있어도 괜찮을까요?”

“나는 상관없다.”

엘로힘이 지루한 듯 턱을 괴었다.

“나도 관객 입장이고, 보이는 것이 있어 합류하려고 했을 테니까.”

나는 단번에 그렇다 답을 내리지 못했다. 크로노는 그저 안정제를 찾아 동행을 부탁했는지도 몰랐다. 크로노도 대꾸가 없었다.

“그런가…… 레시우스의 황자인가.”

누트 멤피스는 크로노가 덧붙여지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그의 관심을 끈 부분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왕이 의자 깊이 몸을 묻었다.

“그러고 보니, 레시우스에는 발타사르 대공이나 피티아 공작 말고도 인상적인 인물이 더 있었지.”

크로노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누트 멤피스가 굶주린 사자처럼 맹렬히 웃었다.

“태자는 잘 있는가? 그는 레시우스에서 유일하게 내 즉위식에 참석했었다. 레시우스가 광대한 영토를 가지게 된 것에는 그자의 공이 아주 크다지? 다정하기가 봄과 같고, 예의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닌 듯했는데 그토록 숱한 전쟁을 벌이다니……. 아주 흥미롭군.”

누트 멤피스가 크로노를 도발하듯 떠보는 말을 남겼다.

“듣자하니 친형제인 둘째 황자마저 전쟁터에 내몰았다는데.”

그의 형님 이야기를 하는데도 크로노의 얼굴이 회색 빛깔로 질렸다.

“우선 첫 번째. 포이보스 형님에 대해서 나는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없소. 그분은 항상 내 앞에 계시지…….”

크로노의 은백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부서졌다.

“그리고 두 번째. 아가멤논 형님께서는 전쟁터에 떠밀린 것이 아니라 자원하셨소. 겁쟁이에게는 도피처가 필요하지. 그는 황성보다 전쟁터가 더 편했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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