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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87화 (87/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87화

“누트 멤피스의 체류 말인데요. 정말 괜찮아요? 당신이 그렇게 꺼리니까 마음에 걸려서.”

목소리가 절로 기어들어 갔다. 기껍게 웃음을 보이는 말룸이 사랑스러웠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요. 새삼스럽게 신경 쓸 일도 아니죠. 그냥 투정 좀 부려본 거예요.”

말은 괜찮다고 하지만 누트 멤피스 같은 부류 상대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좀 안아줄래요?”

“응, 물론이에요.”

주문대로 말룸의 허리를 한껏 끌어안았다. 내 키가 너무 작아 그가 나를 안은 형태였지만 말룸은 만족했다. 동굴에서 불빛을 찾은 것 같은 안정감이 들었다. 내 허리를 두른 말룸의 팔이 특히 단단해 열이 올랐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팔에 힘을 주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말룸. 이번에는 저도 힘내볼 테니까요. 엘로힘 오빠에게는 전에 조금 이야기했어요. 감시를 도와주지 않을까요?”

그러나 말룸은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외부인의 침입을 꺼려하는 알렉산더의 성격이라면 그렇겠지만……. 한순간에 일거리가 사라지니 불안하군요. 누트 멤피스가 제 수집품을 건들면 어쩌죠?”

“사용인들에게도 왕을 잘 살피라고 일러둘게요. 참, 살라딘이나 알 카이라, 그리고 누구였죠?”

“카르나크요.”

“아, 맞아요. 카르나크. 어쨌든, 그 사람들한테도 부탁해둘게요. 누트 멤피스보다는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았으니 주의해줄 거예요. 어쩌면 그 사람들이 왕을 말려줄 수도 있겠네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말룸이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가 분노와 강박에 사로잡혔을 때 곧잘 튀어나오는 버릇이었다.

나는 말룸의 머리칼을 미지근하게 쓸어주었다. 그러자 말룸이 앓는 소리를 냈다. 한창 바깥에 있어서인지 그도 나도 구석구석 차가웠다.

나는 엘로힘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말룸에게는 엘로힘의 타박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가 필요했다. 엘로힘은 못마땅했는지 혀를 차면서 자리를 떠났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 당신 엄청 멋있었어요.”

내게서 살짝 떨어진 말룸이 낮게 웃었다. 눈 밑 음영이 부각되어 퇴폐적이었다. 우아하게 밤을 유영하는 갈까마귀 같은 사람이었다. 말룸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정교한 생김새를 타고나 대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

“무리하는 거 아니죠?”

내 속을 모르는 말룸이 태연히 말을 받았다.

“절 유리 대하듯 하지 마세요, 오필리아. 누트 멤피스가 저와 맞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더니 그가 살짝 품에서 떨어져 나와 나를 응시했다.

“왜 그래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제가 아니게 되는 것 같아요.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말룸의 시선이 땅을 향했다. 첨탑처럼 뾰족하고 예민한 그의 본성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룸은 내 앞에서만큼은 한껏 수그러들었다. 가지를 밑으로 내리는 버들처럼, 태양만을 바라보다 끝내 고개를 숙이고 시들어 버리는 해바라기처럼.

강아지풀이 깃든 양 명치가 간지러웠다. 대꾸하지 못하고 있으려니 말룸이 머리카락을 올려 묶었다.

“어리광 피우는 남자는, 싫습니까?”

답하는 대신 나는 발뒤꿈치를 들어 말룸에게 키스했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꽃들이 옮겨 피었으면 싶었다.

“싫을 리가요.”

사랑하는 상대가 생기면 본인의 취향이야 어떻든 그 사람이 가장 예뻐 보이고 보석보다도 찬란하게만 느껴졌다. 나도 그랬다.

“어리광 피운다는 건 저한테 기댄다는 뜻이잖아요. 많이 부족하지만, 제 곁에서라도 편하게 쉬었으면 좋겠어요.”

말룸이 오래도록 말을 골랐다. 그는 흐르는 강줄기 속 사금을 찾아내듯 자신의 마음을 헤아렸다. 말룸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섣불리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나를 돌아갈 곳이라 생각해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말룸이 조곤조곤 속삭였다. 들녘에 나뭇잎이 내려앉는 소리를 닮았다.

“사랑해요.”

“말룸…….”

“이 말, 제대로 해준 적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나는 라딘라티가 보낸 폭탄 같은 존재일 텐데도 그는 어김없이 사랑을 속삭였다. 샹들리에의 눈부신 빛이 별처럼 드리워졌다.

3층 신방은 여전히 새것 냄새가 한창이었다. 언젠가 이 냄새가 시간에 녹아 포슬포슬해질 때까지 말룸과 오손도손 살고 싶었다.

말룸이 나를 흰 나무 의자 위에 조심조심 앉혔다. 코끝이 간질거리는 것이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다리를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실내화까지 눅눅히 젖는 바람에 나는 신을 의자 옆에 벗어두곤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서로 감기 걸리면 어쩌나 걱정하며 번갈아 씻기로 했다. 말룸은 내가 먼저 씻도록 양보했다.

나는 씻는 동안 조금 뜸을 들였다. 증기가 잔뜩 뭉쳐 촘촘히 올라와 시야를 가렸다. 천을 풀어낸 오른다리는 굳이 공을 들여 살피지 않았다.

눈 녹은 물과 수돗물이 섞여 애매모호해졌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는 내 처지도 비슷하지 않을까?

머리를 수건으로 돌돌 말고 샤워 가운을 걸친 채 외발걸음으로 나왔다. 그런 다음 침대에 폭 박혀들었다.

말룸이 이불을 내 턱 밑까지 꼼꼼히 둘러 준 후 자신도 욕실로 향했다. 습기가 차 불편할 텐데 그는 굳이 내 뒤에 씻기를 청했다.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오지의 폭포처럼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신전에서의 느낌과는 또 달랐다.

나는 이 공간을 말룸과 온전히 공유하고 있었다. 새 부부방은 나 하나만의 방이 아니라 말룸과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감상할 수 있는 새장이었다.

함께 생활하게 된 후 두려움 때문에 보지 못했던 말룸의 버릇과 그 특유의 거슬거슬하고 예민한 성격이 선명해졌다. 그는 누군가와 생활의 합을 맞추는 것이 생경했는지 한 쌍씩 자리한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나는 말룸이 가장 공을 들이는 중업이었다.

이따금, 달도 뜨지 않은 새벽. 내가 불면에 뒤척이면 말룸은 일을 보다 말고 내 등을 토닥였다. 공부를 하다가 하품을 하면 커피를 내려주었고, 한동안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후에는 애탄 얼굴의 그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는 좋은 것은 몽땅 내게 넘기려 했고, 날이 너무 추워지거든 말없이 두꺼운 이불을 꺼내 놓았다. 말룸이 나를 얼마나 배려하고 신경 쓰는지 선명했다.

나는 이불 안으로 푹 숨었다. 왜 나를 위해서만 행동하는지 속이 아렸다. 더 이기적으로 굴어도 괜찮을 텐데, 자존감이 하나도 없는 사람 같았다.

말룸은 자신의 육체가 완벽하다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육체의 강인함을 두고 하는 말이었지 자신에 대한 존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가치를 내게 헌신하며 발굴했다.

“오필리아, 자요?”

나와 같은 향을 몸에 두른 그가 성큼 다가왔다. 그의 샤워는 길지도, 짧지도 않고 딱 적당했다.

“바보 멍청이.”

나는 미움 없는 심술을 부렸다. 말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갑자기요?”

“이리 와요, 머리 말려줄게요.”

“지구에는 그런 풍습이 있나요? 주술로 말리면 되는데.”

“자연 건조하면 머리 빳빳해져요. 오라고 할 때 오는 게 좋을 걸요.”

“그래서 주술로 말리잖아요.”

“나 삐져요.”

말룸이 어긋난 표정으로 침대 옆 의자에 가만히 앉는다.

“가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다른 세계에서 와서 그런가?”

“당신이 바보라서 그런 거예요.”

“그럴 리가. 나처럼 똑똑한 남자 찾기 힘들 텐데.”

말룸이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그의 동그란 뒤통수만 노려보았다.

헝클어진 남색 머리칼이 물기를 머금고 축 늘어졌다. 나는 그가 있는 쪽으로 어기적어기적 이동해 머리칼의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말룸은 키가 너무 커서 의자가 낮은데도 팔을 약간 올려 뻗어야 했다.

그의 머리를 말려주는 것은 내 고집이었다. 주술로 말리는 쪽이 말룸에게도, 내게도 편할 테지만 그래도 말룸과 많은 것을 나누고 싶었다.

남빛 커튼 틈새로 보이는 말룸의 귀 끝이 빨갰다. 이것 보라, 당신도 싫지만은 않으면서.

“오필리아.”

“네?”

“안 졸려요?”

그가 반쯤 잠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말룸은 고개만 살짝 뒤로 돌려 나를 보고 있었다. 내게 떨어지는 눈빛이 은근했다.

조금 고집을 부리기는 했지만, 기분이 상할 만한 구석이 있었나?

나는 지레 겁을 먹고 말룸의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속을 알 수 없을 만치 반들반들한 낯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크게 당황해 엉성해진 말씨로 답했다.

“피곤하기는 한데 졸리진 않아요. 왜요? 아직 잘 때 안 됐잖아요. 초저녁이고.”

“그래요? 잘됐네요. 다른 게 아니라, 당신이 참 예뻐서.”

정신이 번쩍 섰다. 말룸의 눈동자가 전등 빛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속의 열기를 발산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영롱하게 빛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류가 통해 숨이 멈췄다. 손끝이며 발끝 빠진 구석 없이 간질거렸다.

“말룸, 잠시만, 저…….”

“제 얼굴 좋아하는 거 다 알아요. 이 얼굴을 물려준 라딘라티는 끔찍하기 그지없습니다만, 저는 제 외모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천성을 타고났죠. 그러니 이리 와요. 가까이에서 날 봐요.”

말룸의 입가에 초승달 같은 호선이 둥실 떠올랐다. 나는 머릿속에 구름이 낀 것 같아 이렇다 할 말을 내려두지 못했다.

말룸이 침대로 훌쩍 건너와 나를 팔 안에 가두었다. 잘 빚어진 그의 이목구비가 크게 다가왔다. 지고의 예술품이 따로 없었다. 고즈넉하고, 우아했다.

“이, 이, 이 능구렁이가…….”

뜨겁게 들뜬 말룸의 체온이 내 볼을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좋아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일단 구렁이가 맞긴 해요.”

그가 멋들어지게 웃으며 이마를 콩 부딪쳤다. 나는 정신을 빼 놓은 채 허공에 퐁퐁 꽃이나 틔워댔다. 너무 달아서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워 온 거람. 이 사람 숙맥이 아니었던 건가?

나는 친애 어린 심술을 담아 불퉁한 낯을 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꽃잎을 잔뜩 쌓아주었다. 종류 가리지 않고 무지갯빛으로 어우러진 꽃잎이 말룸의 수려한 외모와 위화감 없이 어우러졌다.

말룸이 꽃잎을 털지 않고 입을 맞춰왔다. 그의 체온은 시시때때로 널뛰었지만 키스를 할 때만큼은 항상 뜨거웠다.

기절할 것만 같은 아찔함이 하릴없이 밀려들었다. 말룸의 숨이 깊어질 때마다 내 심장도 함께 깊어졌다.

하루의 시작이 늦었다. 몸이 석고로 이루어진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분이 좋아지는 약을 먹은 것처럼 웃음이 비식비식 샜다.

사랑에 들떠 냉정을 잃지 말아야 하는데, 말룸을 처음 만난 이후 냉정이란 뿌리째 뽑혀 나간 잡초와 다름없었다.

내 것 아닌 이름을 발음하는 말룸의 목소리는 노래로 사람을 홀려 잡아먹는 새의 지저귐이었다. 그 노래를 들으면 불길이라도 맨발로 걸어낼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말았다.

곱게 휘어지는 황금빛 눈동자는 또 얼마나 고아한지, 말룸이 자신에게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수집품들은 무용해져 성 밖을 나뒹굴었을 것이다.

잠기운을 이기지 못하겠다.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디선가 뻗친 단단한 팔이 허리를 옭아맸다. 나는 말룸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볐다. 천지 분간 못 하고 목동을 어미로 착각하는 양의 행실이었다. 말룸도 충족감을 느꼈는지 목청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소리를 냈다.

“오늘 늦잠 잤어요, 오필리아.”

머리를 들어 그의 팔을 베개처럼 취급했다. 높아진 시야에 그의 얼굴이 잘 보였다. 말룸은 잠을 자지 않기 때문인지 아침에 보아도 완벽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정리했다.

“당신은 잠이 꼭 필요한 나 같은 사람을 배려해야 돼요.”

말룸이 작게 미소 지었다. 자연스럽게 반쯤 접히는 눈매가 사랑스러웠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웃음이었다. 중간 지점의 미소는 크게 화려하진 않았지만 술렁이는 마음에 안정감을 가져왔다.

말룸이 이렇게 새싹 닮은 미소를 틔워 낼 때마다 나는 하던 일이나 생각을 멈추고 등불 바라는 날벌레처럼 날갯짓만 하게 되었다. 그의 웃음에는 자본주의의 맛을 알아버린 지구 출신의 인간조차도 휘어잡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희귀한 것을 가려냈다. 나를 만나기 전의 말룸은 필시 웃음의 한 조각이라도 알지 못했을 텐데, 딱 그만큼의 값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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