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86화
크로노는 병이 중첩되어 걸린 사람처럼 가늘게 몸을 떨었다. 나는 그가 당장이라도 픽 죽어버릴 듯해 시야가 하얘졌다. 가슴을 종이 뭉치로 막아 놓은 것 같았다.
나는 크로노 얘기라면 설령 거짓이래도 의심 없이 신뢰할 것이고, 그럼 그는 나를 아무렇게나 휘두를 수 있을 텐데 크로노는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마차가 삼림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다시 민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앙상한 겨울나무가 마차 창문으로 팔을 뻗쳤다.
말룸은 나를 제 다리 사이에 앉혀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 로보는 아몬드만 씹어대는 채로 유리창 너머를 끊임없이 보았다.
나는 진리의 답을 구하는 주승처럼 끊임없이 크로노에게 말을 붙였고, 그는 끙끙 앓으면서도 도리질을 쳤다.
마차 내부에 찬 공기가 돌아다녔다. 온기도, 형체도 없었다.
바퀴가 진흙탕에 빠졌는지 몸체가 크게 추락했다가 도로 올라왔다.
마침내 크로노의 쿠션이 아래로 슬쩍 미끄러져 내려갔다. 물기가 그의 눈가부터 시작해 얼굴 곳곳에 반질반질하게 달라붙었다. 억센 장마전선이 적막한 평야를 휩쓸고 지나갔다.
나는 그의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수해 복구 작업을 하는 것 같았는데 고되지는 않았다.
이 재건 작업에 대해 그가 어떤 명령을 내릴지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크로노는 이불을 갈망하듯 쿠션을 만지작거리더니 눈을 느리게 감았다.
“조만간, 공예재료를 사러 외출하고 싶소. 이곳 영지에 보석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광산과 원석을 판매하는 시장이 있다고 들었소…….”
나는 반색하며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래요. 아무 곳이라도 다 좋아요. 저는 여기 사는데도 동굴이 있는 줄 처음 알았는데, 크로노는 참 대단하네요.”
급히 답하자 크로노가 푹 잠긴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 황량한 밤에 둥지를 찾는 새가 낼 법한 웃음소리였다.
“그렇게 아이 대하듯 할 필요는 없소만…….”
찔끔해 그런대로 수긍하니 크로노가 눈가를 정리했다.
“요즘은 원석을 가공해 무언가를 만들어 보고 싶소. 팔찌를 구상하고 있는데, 앞날의 행운을 빌어주는 용도지.”
“응, 무척 예쁠 거예요. 크로노가 가질 건가요?”
“나 하나 하고, 오필리아 님 것도 하나 만들 생각이오.”
그가 머뭇거리다 입을 작게 달싹였다.
“거기 두 사람 몫도, 그리고 엘프의 것도 만들어주겠소. 앞으로 험난할 테니.”
그러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첨언했다.
“미래가 바뀌는 것은 지금껏 몇 본 적이 없는데, 그런 의미에서 로보, 당신은…… 신기한 사내요. 나 같은 것과는 판이하리만치 강해…….”
로보와 나는 두루뭉술한 화법 속 숨겨진 의미를 알아채고 서로를 바짝 응시했다. 그것은 크로노의 인정이었다. 로보의 미래가 좋은 방향으로 달라졌다는 인정.
한편 말룸의 표정이 생강을 씹은 듯 이상했다. 자신에게도 팔찌를 준다는 가짜 조카의 속내를 헤아리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는 밤을 밝히는 횃불처럼 총명했지만 사람의 감정과 관련해서는 종종 길을 짚지 못했다.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뭉근히 찔렀다. 말룸은 고집머리를 거둘 생각이 없는지 부루퉁한 어조로 응대했다.
“그렇게 아부해도 네 사정 살필 생각 없다, 크로노. 너는 처음 약속과는 달리 예언 뒤에 숨어 두루뭉술한 정보만 뱉을 뿐, 그 무엇도 또렷하게 이야기하지 않아. 내가 관대하게 참아주고 있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 간 크게 사기를 치다니…….”
“나 참.”
로보가 말룸의 입안으로 아몬드를 던져 넣었다. 창을 잘 다루기 때문인지 투척 솜씨가 뛰어났다.
얘기 도중이었던 말룸은 음식물이 혀에 닿자 기겁하며 뱉었다. 로보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크로노를 응시했다. 크로노가 휑하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버렸다. 멋쩍어서 저런다는 걸 우리는 전부 알았다.
나는 살살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슬픔과 불안감을 미소로 덧대고 오늘은 잠시 이렇게 있고 싶었다.
말룸이 이마를 짚었다.
“확실히 하는데, 팔찌. 나는 필요 없다. 계속 거절했는데도 주면 버릴 테니 알아두도록.”
로보가 말룸에게 쏘아붙였다.
“그러지 말고 받아줘. 이것 참. 우리 집 셋째가 독립하겠다고 선언했을 때의 그 기분인데. 육지 황자, 팔찌 만드는 법도 알아? 장하다. 기대하고 있을게!”
“기대하지 마시오! 그리고, 이만 자겠소. 속이…… 울렁거려서.”
안색이 나아진 것이 빤히 보이는데도 크로노는 다시 쿠션을 얼굴 위로 올렸다. 그러나 로보는 크로노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싶었다. 그가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팔찌와 관련해 이것저것 운을 떼었다.
“어떤 원석으로 만들 거야? 재료비가 필요하면 말만 해.”
“네놈 지금 태평히 재료비 운운할 때가 아닐 텐데.”
말룸이 성이 나서 로보를 쏘아보았다. 입맛을 가다듬는 것으로 보아 그는 진흙 맛을 떨쳐 내지 못한 것 같았고, 그 점이 말룸의 심기를 뾰족하게 만든 듯했다. 그의 인간성을 거두어 갔을지도 모르는 저주는 해결이 불가능했다.
로보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왜, 네가 재료비 대신 내주게?”
끝내 참지 못한 말룸이 로보에게 맹렬히 달려들었다. 로보는 불쾌한 기색으로 썩은 내가 난다며 아몬드를 집어던졌다. 말룸이 로보더러 나이는 어디로 먹었냐고, 마차 청소는 네가 다 하라며 역정을 냈다. 드잡이질을 할 기세였다.
나는 그 요상한 광경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크로노가 운운한 끝을 생각하느라 불길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잊으려 노력하는 작업이었다.
그저 크로노가 한 발자국 더 내디뎌 날을 잡아준 것만 해도 감사했다. 나는 내 친애하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천장에서 꽃비가 송송 쏟아지기 시작했다. 말룸도, 로보도 다툼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꽃잎이 손바닥과 정수리에 진득하니 내려앉았다.
샛노란 빛 메리골드…….
나는 마차가 더러워질 것을 알면서도 능력을 제어하지 않았다. 꽃송이가 세 사람을 전부 덮어 쿠션을 끌어안은 크로노까지 향기를 맡을 수 있었음 싶었다.
티포주 성이 둥지처럼 느껴졌다.
엘로힘은 1층 로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인세티아 건으로 최근 그와 어색한 상태였는데, 다행히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슬렀는지 지금은 껄끄러움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엘로힘은 타오르다 만 장작처럼 노상 문드러져 있었으나 그것을 특별히 티내지 않았다. 숨기는 것이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인내심의 단단한 정도 따위가 아니었다. 엘로힘의 면면에 곧 폭발할 것 같은 짜증이 가득했다.
나는 물레에 찔린 것처럼 그를 응시했다. 엘로힘이 자신의 오른편 머리를 비틀듯이 꾹꾹 눌렀다.
“오필리아…… 대체 성에 뭘 들인 거냐.”
나는 짚이는 구석이 있어 멋쩍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누트 멤피스가 벌써 이곳에 도착했나요?”
“…….”
엘로힘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늙지 못하는 사람일 텐데도 한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뒤편으로 실내복 차림의 누트 멤피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펑퍼짐한 백색 반팔 셔츠에는 어떠한 장식도 없었다. 사막의 복식이었는지 레시우스의 옷과는 양식이 달랐다.
겨울에 반팔이라니. 보는 사람이 다 쌀쌀했지만 옷을 입은 것만 해도 호재였다.
“이제야 도착했나. 짐과 모리구는 그대가 제안한 대로 저주 팔찌도 잘 착용했는데, 손님 대접에 소홀하군.”
아닌 게 아니라 누트 멤피스의 팔에는 투박한 쇠 팔찌 하나가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말룸이 이야기한 그 저주가 담긴 팔찌인 듯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다고 이야기하려던 찰나였다. 말룸이 누트 멤피스에게 다가가 윽박질렀다.
“내려놓지 못하겠나!”
“호오, 이것 말인가.”
누트 멤피스가 영롱하게 눈을 빛내며 무언가를 전리품 들듯 들어 올렸다. 왕은 어떤 석상 비슷한 것을 트로피처럼 쥐고 있었다.
말룸은 성에 불이 나 재물이 다 타버린 사람처럼 황망한 표정이었다. 트로피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손자국 날 텐데.
누트 멤피스가 떠들썩하게 웃었다.
“수인족의 유물이라……. 게다가 저자는 귀가 뾰족한데. 전설 속에 나오는 엘프인가? 물어도 답이 없고, 짐의 모리구를 새장 속에 가두어 버리지 뭔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내다.”
“일단 그 석상이나 내려 놔라. 네 물건도 아닌데 손버릇도 나쁘군. 그러고도 왕이라 칭할 수 있는 건가?”
말룸이 자신의 수집품을 건드는 남자에 아주 눈이 돌아 씩씩거렸다. 모리구를 위협했을 때처럼 매서운 기세였다.
크로노와 로보는 이 소란에서 빠지겠다는 양 재빨리 몸을 물려 이미 자리에 없었다. 남은 것은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엘로힘의 서늘한 눈초리와 옥신각신하는 두 사내, 그리고 덩그러니 남겨진 나뿐이었다.
엘로힘이 팔짱을 꼈다. 허리춤에 자리해 있던 장검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설명해라. 저자는 왜 이 곳에 머물게 되었고, 딸려 온 모리구는 어디서 주워 온 건지. 그 까마귀, 잡아 죽이려 한참 찾아도 보이질 않더니 멤피스에 있었던 건가?”
“저, 일단…… 카사블랑카가 저자 눈에 안 띄게 하는 게 좋겠어요.”
맥락을 알 수 없는 부탁이었는지 엘로힘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계속되는 누트 멤피스의 수인족 타령에 알 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수인족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그가 진짜 수인족인 카사블랑카를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조금만 생각해도 훤히 들여다보였다. 누트 멤피스는 십중팔구 카사블랑카의 성미를 거슬러 떠들썩한 난리를 만들 사람이었다.
소란이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누트 멤피스와 말룸이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계속했다.
중앙 로비에서 발생한 소란에 사용인 여럿이 기웃거렸다. 말룸은 그들이 할당된 일을 하도록 날 선 명령을 내렸다.
눈 녹은 물에 한기가 찾아왔다. 나는 비실비실 떨었다. 털이 물을 먹고 얼어버리는 바람에 옷감이 송곳처럼 빳빳했다.
나는 엘로힘 쪽으로 은근슬쩍 다가갔다. 엘로힘이 민들레를 선물 받은 사람처럼 잠시 누그러졌다.
그러나 설명해야 할 것이 있었다. 나는 자금을 빼돌리기 위해 과장된 사업 계획을 설명하는 사람처럼 긴장해 목이 빳빳해졌다.
“왕을 초대한 건 하고 싶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에요.”
“하고 싶은 일? 네가?”
볼에 나뭇잎이 앉은 듯 간지러웠다. 나는 오른 뺨을 매만졌다.
“누트 멤피스는 세기의 천재예요. 제 세계에 있던 기술을 개발해 사용할 줄 아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관련 분야를 배웠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그에게서 무언가를 받아내었나?”
역시 엘로힘이다. 한때 왕이었던 엘프는 석연찮은 설명에도 단번에 핵심을 파악했다.
“모리구가 어떤 저주를 타고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자의 협조와 일이 수틀렸을 때를 대비한 도피처 제공, 그리고 수익금의 배분을 대가로 받아낼 생각이에요. 함부로 성을 돌아다닐 수 없도록 말룸이 저주 팔찌도 채워 두었고요.”
“저쪽이 한참 손해 보는 장사군. 그걸 감수할 만큼 절박했거나, 아니면 라딘라티 처치가 목적에 부합했던 거겠지.”
엘로힘이 셔츠 목깃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의 시큰둥한 표정에서 왕의 혜안을 읽었다.
“좋다, 대신 추후 저자와의 자리를 주선해서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내게 보여라. 삼자대면인 셈이지. 그러는 동안 나는 누트 멤피스가 협력하는 것의 쓸모를 재어 보도록 하겠다.”
“네, 그럴게요!”
엘로힘이 그제야 푸른 수풀을 닮은 웃음을 지었다.
“계약서 쓰는 거 잊지 말아라.”
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활짝 핀 미소도 함께였다. 그간 포인세티아의 흔적이 밖으로 드러나고 있어 엘로힘을 대하기 미안했는데 기우였던 듯했다. 그의 마음은 잘 벼려진 한 자루의 검과 같아 묵직했고 휘어짐이 없었다.
“골치 아픈 작자입니다.”
말룸이 누트 멤피스의 통제를 마친 듯 이쪽으로 걸어왔다. 사막왕은 턱을 치켜들며 오만한 몸짓으로 층계를 올라 사라졌다.
말룸의 표정이 첨예하게 날이 섰다.
“저자를 암살하지 않도록 날 잘 감시해야 할 겁니다, 오필리아.”
화가 사무쳤는지 말룸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잘 빚어진 도자기가 빛을 품은 듯했다. 그의 선명한 남빛 머리칼은 눈 녹은 물에 푹 젖어 있었다.
“오빠, 잠시만요.”
엘로힘에게 양해를 구하고 말룸의 옷자락을 비죽 잡아당겼다. 따지고 보면 누트 멤피스는 내가 초대한 셈이었으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