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84화
숲에서 빠져나와 모습을 드러내는 우리 일행에 이목이 여기저기서 가파르게 모였다.
사회자는 거칠거칠한 사포 같은 낯으로 울먹이고 있었는데, 우리가 산짐승에게 해를 입거나 조난당한 것은 아닌지 마음을 졸인 모양이었다.
하긴 축제 진행을 책임지는 사람인데 대공 내외가, 그것도 사막의 귀빈과 함께 땅으로 꺼진 듯 사라지면 문책을 피할 수 없겠지.
“아이고, 전하! 기사들이라도 꾸려 보낼 참이었습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말룸은 다가와 굽실거리는 그자가 귀찮았는지 시큰둥한 태도였다. 보는 내 속이 다 불편했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자 쪽에 있지 않았다. 공터에 눈사람처럼 선 사람들이 폐막식을 바라고선 말룸을 태울 듯 바라보고 있었다.
말룸은 대수롭지 않다는 양 단상 위로 올라가 내가 1위를 하게 된 경위와 삼림 안에서 일어난 ‘가벼운 사고’에 대해 설명했다.
삼림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나머지 영상 송출이 차단되었고, ‘비린내 나는 짐승’의 공격으로 왕의 애완 까마귀가 다쳤다는 것이다. 그 까마귀를 마음씨 좋은 대공비가 성심껏 치료해 왕은 자신이 사냥한 황금을 선사했고, 친교의 뜻으로 그들 일행을 티포주 성으로 정식 초대한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얼토당토않은 소설이었다.
“저 꽃밭 동화는 누가 구상한 거야? 그리고, 뭐? 비린내 나는 짐승? 굳이 꼭 비린내라는 말을 붙여야 했어?”
로보가 언짢은 듯 눈을 발로 쿡쿡 헤집었다. 기실 말룸은 이렇다 할 대본이나 대책 따위를 미리부터 생각해 두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연기나 거짓말이 몇 백 년 동안 살며 체화되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술술 지어내는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사람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말룸의 언변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약간의 궁리 끝에 로보의 도움을 받아 무대 가까이 다가갔다.
“오필리아? 무슨 일인가요?”
말룸이 살짝 허리를 숙여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의 귓가에 무어라 속살거리고는 무지개처럼 맑게 웃었다. 말룸은 잠시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다시금 자세를 바로 했다.
“대공비가 추위 속에서 기다린 그대들이 가여워 거두어들인 금화를 배분하고 싶다더군. 참가자 전원에게 말이다.”
황금에 욕심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누트 멤피스라는 더 값진 것을 얻었으니 이 정도는 싼 대가였다. 황금은 앞으로 온 대륙의 밭을 꽉 채우도록 일구어 낼 수 있을 테고, 나는 금보다 중요한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말룸이 강박적으로 쌓아올린 권위와 대외적인 면모에 상처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말룸이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이라면, 설령 공감하진 못할지라도 최대한 바른 형태로 지켜주고 싶었다.
추위를 이겨내려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처음엔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서로의 얼굴만 허둥지둥 보았다. 숨이 가쁘게 트이는지 입김이 나고 사라지는 빠르기도 여름철 불어난 계곡 상류의 물살 같았다.
이윽고 상황 파악이 끝난 사람들이 칼바람에 발개진 얼굴로 배실배실 웃기 시작했다.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우레처럼 울렸다. 모자를 벗어 하늘 높이 던지고 또 받잡는 몸놀림이 꽁꽁 언 눈이라도 녹일 듯 활기찼다.
그들이 연신 내 이름을 연호했다. 호수 밑바닥이라도 좋으니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나는 말룸이 덮어준 재킷 끝자락만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황금 사냥 축제가 성황리에 끝이 났다.
말룸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가 로보에게서 나를 빼앗아 안는 것으로 소용돌이치는 성미를 가라앉혔다.
말룸은 호흡기를 대고 근근이 살아가는 듯했다. 사람 앞에서 꾸며내길 잘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오필리아, 돌아가요. 우리 집으로…….”
말룸에게서 사과꽃 내음이 한창 났다. 나는 그의 등허리를 세게 그러안았다. 주변으로 기사들이 포진해 장막이 되어 우리 모습을 숨겨주었다.
오늘 참 일이 많았다. 내가 미래에 도움이 될 행동을 한 거라면 좋을 텐데.
말룸은 내가 휘말린 사람에 불과하다고, 피해자일 뿐이라며 편히 있으라곤 하지만, 그가 고생하는데 어떻게 맘 편히 마카롱이나 먹고 있을 수 있을까? 말룸에게만 맡기기에는 미안했을 뿐더러 그런 염치없는 행동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말룸과 내가 온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누트 멤피스와 그의 어깨 위에 쓰러지다시피 늘어진 핏빛의 모리구, 그리고 그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세 사람이 이곳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누트 멤피스와 마찬가지로 잘 여문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개성이 뚜렷해 같은 서로 민족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개선장군처럼 눈 바닥을 딛고 선 여자가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했다. 눈동자는 매의 눈동자처럼 횡횡한 황금빛이었고 머리칼은 누트 멤피스와 같은 검정빛이었다. 단정히 기른 머리카락이 여자의 가슴께에서 살랑였다. 여자의 강인한 표정이 내게 바람을 불어넣었다.
“알 카이라입니다. 도시 계획 사업의 요직에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긴 백발을 하나로 땋아 등 뒤로 나린 남자가 말을 이었다.
“카르나크. 누트 왕과 까마귀 모리구의 연구 보좌와 기술 고문 역할을 맡고 있소. 앞으로 그대는 까마귀 모리구와 나, 그리고 왕과 함께 기술 관련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오.”
마지막으로는 수줍음이 꼭 아이바르를 닮은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사, 살라딘입니다. 관개 사업을 관리해 멤피스에 물을 대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어요. 수차도 만들 줄 알아요!”
말룸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들을 살폈다. 새로운 식물 종이 독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판별하는 모양새였다.
누트 멤피스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룸이 그들을 살피게 두었다.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향하는 경의였고, 아끼는 신하에게 지도자가 가질 법한 자부심이었다.
누트 멤피스는 그 이상 사막의 사람들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사막의 사람들도 굳이 자신의 능력에 대해 첨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설명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직책과 할 수 있는 일을 소개하는 문장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비범한 자들이었다. 알 카이라라는 여자, 카르나크라는 남자, 살라딘이라는 소년 모두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 세계는 주술의 다양성에 지나칠 정도로 의존했다. 차려 입는 드레스를 제외하면 의복도 근대 서구식이었고, 건축 양식도, 시장도, 도시도 발달되었지만 근원은 전부 주술이었다.
건물을 올리는 것도 주술이었고, 날씨를 살피는 것도 주술, 무언가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마저도 주술이었다. 이런 세계에서 주술 없이도 원활히 굴러가는 세상을 바라는 자들이라면 필시 선구자였다.
누트 멤피스가 레시암 대륙에 들락거렸던 것도 시찰을 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뛰어난 수행원들을 데리고 제국의 발전 상태를 살펴 자기들 식으로 해석한 후 멤피스에 적용하려는 속내가 선명했다.
누트 멤피스는 내 생각 이상으로 계획적이었다. 대책 없이 호탕한 것 같기도, 일곱 살 아이처럼 무모한 것도 같았지만 그에게는 세계를 감싸는 계획표가 있었다.
이쯤 되니 얕은 지식으로 사막 손님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알싸한 걱정이 치밀었다. 그들은 지구에 있던 기계 문명에 대해 무지했이지만 물꼬만 트여주어도 순식간에 수로를 만들 수 있을 듯했다. 설령 능력이 한 끗 부족해 방황한다 해도 누트 멤피스의 뚝심이 일을 가능하게 만들겠지.
내가 속으로 고평가를 내린 것도 모르는 채 누트 멤피스는 마차를 얻어 타고 가겠다느니, 아니, 됐다 분수에 맞게 걸어오라느니 하며 말룸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마차 대여비가 아득할 만큼 아까웠다, 대공이여. 먼 곳에서 온 손님에게 인심을 쓰는 것 역시 지배자의 덕목 아닌가.”
누트 멤피스가 허리에 손을 짚어낸 채 명령하듯 종용했다. 말룸이 일정한 호흡을 내뱉었다. 인내심을 발휘하려는 것 같았는데, 잘 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팔푼이 같은 저 왕이 크로노가 그렇게까지 후한 평가를 내렸던 대상이라니.
낯이 팔렸는지 정수리를 쿡쿡 쪼아대는 모리구를 가만 두는 것을 보면 천성인가 싶기도 했다. 구김 없는 아이나 때 안 탄 어른이야말로 세상이 제 것이라는 양 살았다.
나는 말룸과 누트 멤피스의 대치를 구경하며 크로노를 기다렸다. 관중석의 인파가 썰물처럼 한 번에 자리를 떠났다. 크로노가 움직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주술을 이용해 미아 찾기 방송을 해야 하는지를 염두에 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가느다랗게 끊어지듯 힘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추위를 비집고 들렸다.
“오필리아 님, 사막의 왕을 데려오셨군. 할 수 있을 줄 알고 있었소, 그러니 어서, 어서 성으로…….”
나는 기함했다. 크로노는 외출 첫 순간의 모습일랑 온데간데없었고 추레한 기색만이 가득했다. 몸과 얼굴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고 살갗이 바위처럼 거칠거칠했다. 그는 사람 속에서 멀미를 하는 것 같았다.
“크로노! 괜찮아요? 많이 안 좋아 보여요!”
성에 돌아가고 싶다고 투덜거리던 로보가 질겁해선 크로노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육지 황자, 쓰러지면 안 돼!”
대꾸조차 하지 못한 크로노가 뱃전의 오징어처럼 비실비실 늘어졌다.
“정신 좀 차려봐!”
로보가 크로노를 한껏 지탱했다. 그는 체격이 큰 크로노의 무게에 짓눌렸지만 잠시라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누가 보면 육지 황자가 황금 쫓아서 온종일 뛰어다닌 줄 알겠어. 눈 토끼처럼.”
“눈 토끼는 모르겠고, 토끼처럼 뛰었던 것은 맞소. 저들은 그야말로 각다귀요. 오 초에 한 번 꼴로 말을 거는데…….”
크로노는 아직도 바로 서지 못했다. 그는 자꾸만 아래로 주저앉으려 했다.
원래도 대인 기피 성향이 짙었는데, 우리를 기다리느라 관중석에 있으며 심리적으로 많이 고되었던 것 같다. 부득불 크로노를 끌고 가려던 말룸을 말려야 했지 않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치밀었다.
아직 물러가지 않은 사람들이 크로노가 하는 행동을 바짝 주목했다. 황자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속내가 빤히 보였다.
크로노가 내게 바짝 붙었다. 그는 스스로를 수호하는 요새로 나를 낙점했다. 나는 크로노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반듯한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너무 안 좋으면 혼자 있게 마차 따로 잡아줄까요?”
“으응…… 아니, 그건 싫소. 오필리아 님과 함께 있고 싶소.”
크로노는 힘에 부치니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그가 로보의 팔을 잡고 스스로를 간신히 가누었다. 어조도 잠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육지 황자, 못 걷겠어? 힘 좀 줘봐.”
로보는 오뚝이처럼 자꾸만 기우뚱대는 그를 빳빳이 세워 보려고 안간힘이었다. 하지만 크로노는 롤러코스터를 한 열댓 번 탄 사람처럼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고 손끝도 빳빳하게 굳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걱정이 치밀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다리만 멀쩡했다면 의사나 신관을 찾아 여기저기 쏘다녔을지도 몰랐다.
누트 멤피스를 떨쳐 낸 말룸이 바짝 다가왔다. 그는 평소보다 날이 서 있었다.
“무엇을 하는 것이냐, 크로노.”
“……멀미를 좀 하고 말았소.”
“말룸, 크로노 상태가 정말 안 좋아요.”
그 순간 크로노가 속에 있는 것을 전부 게워내고 싶다는 듯 눈 쌓인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입에서 깊이 가라앉은 신음이 줄줄 흘렀다. 살며시 다가가 등을 탁탁 쓸어주니 크로노는 속이 더 요동친다며 손사래를 쳤다.
말룸이 못마땅한 듯 크로노를 주시했다.
“하여튼 골치 아프게 하는구나. 누트 멤피스도, 너도……. 성까지는 꽤 가야 하니까 참아라.”
크로노의 고개가 힘없이 까딱거려졌다. 말룸의 눈매가 밟힌 낙엽처럼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