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83화 (83/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83화

그는 별것 아니라는 양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며 머리 위에 내린 싸락눈을 털었다.

“뾰족한 수가 있으니 아라크네를 성으로 초대한 겁니다. 말을 거스르면 몸이 썩어버리는 저주를 걸 생각이었어요. 그걸 저자들에게도 적용하면 문제없습니다.”

말룸이 비죽 웃었다. 악당의 전형이었다. 원작의 말룸이야 라딘라티라는 것을 이제는 알지만 당신도 다르진 않은 것 같다.

“모리구가 불편하지는 않아요?”

“애견인이 아닌 이상 개 짖는 소리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 맥락이라고 칩시다.”

모리구가 불만스럽게 말룸을 노려보았지만 말룸의 시선이 닿자 얼른 누트의 뒤로 가 숨었다. 숨고 숨겨주는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로보가 옆에서 한 술 거들었다. 나는 또 그에게 신세를 지고 만다.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 거지? 나나 저 지렁이 놈은 신경 쓰지 마. 우리는 하고 싶은 대로 전부 하면서 살잖아. 내가 저 까마귀 자식 어깨에 바람구멍 뚫어 놓은 것도 앞날 재어보고 했겠어?”

“그건 너무했어요. 싸우기라도 해야 하나 얼마나 놀랐는데.”

“그럼 싸우면 돼. 냄새 때문에 비틀거렸던 건 논외로 하자고. 사실 지금도 썩은 내 때문에 머리가 아찔하긴 한데, 후각 세포가 다 죽을 즈음엔 나아지겠지. 그리고 저 까마귀의 능력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렁이보다는 못할 거 아냐.”

로보가 입가를 길게 끌어올려 웃었다. 비죽비죽 난 상어 이빨이 훤히 드러났다. 나도 움찔움찔 작게 따라 웃었다. 마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따라 하다 보면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오필리아.”

말룸이 나와 눈을 맞추었다. 억수처럼 쏟아지는 사랑이 마른 지면 위로 내려앉았다.

“아주 예전에 말했었잖아요. 하고 싶은 걸 해보라고. 당신은 그때 고작 시가지에 나가고 싶다고 이야기했었지만, 그렇게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결정했잖아요. 말하기만 하면 돼요, 다 들어줄 테니까. 그리고, 쑥스럽지만…….”

말룸의 뺨이 잘 익은 복숭앗빛으로 살짝 달아올랐다. 나는 단내가 나는 도원향에 벙벙히 있었다. 도화가 흩날려 시야를 가렸다.

“우리는 부부고 가족이잖아요. 이 세상 마지막으로 남은 가족. 당신이 날 받아줬으니까, 저도 당신을 받아줄게요.”

귀 끝에서 벌건 연기라도 날 것 같았다.

“매일 오는 기회 아닙니다. 저는 비싼 사람이거든요.”

흘끗 바라본 누트 멤피스는 동굴 속 다이아몬드라도 발견한 사람 특유의 탐욕스러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애적인 의미는 한 톨도 없었다. 그는 단지 내 어떤 부분을 게걸스럽게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뿐이었다.

나는 이미 말룸 것이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원하든 응해줄 수는 없었지만 협업을 할 수는 있었다. 사막왕은 뛰어나니까,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게걸음을 할라 치면 목덜미라도 잡아 바로 세워줄 수 있겠지.

“누트 멤피스.”

내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서임식을 하듯 장엄함을 흉내 내는 것이 좋겠다.

“당신이 만들 세계에 관심이 있어요. 모두가, 그리고 나마저도 세계가 불타버렸다 표현할 때 당신은 세계가 싹을 틔워내지 않은 것뿐이라 이야기했어요. 그것만으로도 당신의 가치는 충분해요. 분하지만, 그런 관점 하나가 변화를 가져온다는 거 저도 잘 알거든요.”

신과의 결별 이후 천 년이나 지난 이 행성은 아직 정체되어 있었다. 재앙의 영향도 있겠거니와 사정을 아는 자들이 행성 재건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 왕은 달랐다. 누트 멤피스는 대화하는 도중 단 한 번도 세계가 재가 되었다는 둥 재앙에 물들었다는 얘기를 비유적으로나마 언급한 적이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저는 다른 세상에서 왔고, 그곳에는 창힐의 눈과 같은 장치가 많아요.”

모리구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주시했다.

“세상에, 형. 대체 어떤 사람이랑 결혼한 거야? 다른 세계 사람들은 모두 식물을 부리나? 하지만 요르나스의 식물을 부린다는 건 요르나스에 종속되었다는 의미인데, 설마 영혼만 이곳으로 넘어 온 거야? 그런데 몸은 왜 저래? 죽은 것처럼 생기가 없잖아. 다리도 아직 못 고친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궁금한 것투성이야, 너무 기뻐!”

“시끄럽다. 너, 내가 때와 장소도 못 가리고 튀어나오는 학자 기질 좀 고치라고 얘기했었던 것 같은데.”

모리구가 다시 무어라 대꾸하려던 찰나였다. 누트 멤피스가 손을 들어 모리구를 막았다. 모리구는 그럼 마법처럼 고분고분해져선 시간에 채여 때 탄 낯으로 나이의 길이를 어김없이 드러냈다.

“당신에게 그와 관련해서 협조를 구하고 싶어요. 제가 발명한 지식은 아니지만 관련 분야를 3년 남짓 배웠고, 어딘지 쓸모가 있을 거예요.”

“원하는 것은?”

“수익금의 일부와 라딘라티 처치의 협조요. 당신 모리구를 데리고 다니는 것 보면 그자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이잖아요. 처치라고 해도 인간인 그쪽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만약 저희가 도주하게 될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숨어 지낼 곳을 제공하는 정도였으면 해요.”

내가 급히 덧붙인다.

“성에 출입하려면 말룸이 이야기한 그 저주도 수용해주셔야 하고요. 또 이번 황금 사냥으로 벌어들인 금화는 선금이고, 지식의 가치에 따라 돈을 더 얹어 줘야 해요.”

왕이 비음을 흘리며 이것저것 따져보았다. 그자의 청금석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왕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쪽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닌가? 나의 모리구가 말하길, 라딘라티는 신에 가까운 이라고 했다. 수틀리면 재건을 펼칠 틈도 없이 사막의 땅마저 부스러지겠지.”

“완전한 세계를 개간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나요?”

내게서 쾌활한 웃음이 났다. 썩 로보처럼 보일 것이다.

“라딘라티가 우릴 밟고 세상으로 나오면 세계가 무사할 것 같나요? 아뇨, 절대 그렇지 않아요. 떠보는 건 그만 하세요. 시험해보고 있는 거잖아요, 제가 당신과 동업할 만한 배짱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왕이 어느 때보다도 수려하게 미소 지었다. 끝없이 굽이치는 여름 하늘을 보는 듯했다.

나는 저자의 젊음에, 천재성에, 그리고 그가 그릴 세계의 미래에 매료되고 말았다. 심장이 기분 좋은 북소리를 둥둥 울렸다.

“재앙이 들끓는다 해서 멸망할 문명이라면 사상누각에 불과하지. 신과 같은 불분명하고 변덕스러운 요소에 의지하고 싶지도 않다. 하여 짐은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견뎌낼 수 있는 문명을 구축하고자 했다.”

누트 멤피스는 먼 우주를 갈망하듯 몽롱한 시선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주술을 사용할 수 없는 만큼, 그 대체재를 찾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지.”

왕이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했다.

“협력하겠다, 미래를 가져다 줄 요정이여. 어떤 부담도 감수하겠다고 맹세하지. 막 움트기 시작한 땅을 개간하는 것이 간단하다고 하진 않겠다. 하지만 확신이 있으니 그대가 내게 동전을 걸어봄직 하다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전과 달리 예를 차려 내게 다가왔다. 나는 와중에서도 왕의 드러난 살갗이 얼어붙지는 않을까 걱정이 피어올랐다.

누트 멤피스가 말룸의 모난 눈초리를 뚫고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예를 차린 형식상의 인사는 참으로 담백했다. 입을 맞추며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면면에 어떤 고집이나 푸른 욕심이 또렷했다.

누트 멤피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명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비로소 미래로 나아갈 배편을 잡아탔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이 세계에 발을 내디딘 이후 가장 깨끗하고 환하게 웃음 지었다.

정교한 폭풍이 우리 사이를 한바탕 뒤엎고 지나갔다. 폭풍으로 인한 피해가 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말룸이 눈밭을 헤치고 걸었다. 그가 는개가 한껏 내리겠거니 덧붙였다. 내 머리 위로 자신의 겉옷을 빙 둘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숲 한가운데 인간 모양의 검은 바위가 솟은 줄로만 알지 않을까? 나는 반항하지 않고 옷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끔 꾹 눌러 썼다.

소년은 다시 까마귀로 되돌아갔다. 나는 까마귀의 몸체를 뒤덮도록 옷가지를 둘둘 말아 지혈 작업을 하는 왕을 관찰했다.

의중을 숨기고 있는 것이 맞았는지 속상함으로 누트 멤피스의 표정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모리구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손길이 야무졌다.

누트는 심술을 틔워내고 있었다. 그러게 다치긴 왜 다쳐, 하는 한탄이 상처가 나지 않은 부분까지 구태여 칭칭 동여매는 것으로 또렷해졌다.

로보도, 나도, 말룸도 왕이 처치를 끝마칠 때까지 기다릴 뿐 이렇다 할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정당한 대치 상황이었고, 로보의 신경을 들쑤신 것도 저쪽의 실책이었다.

나는 멀쩡한 왼쪽 발끝으로 눈밭에 그림이나 그려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고장 난 바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멀쩡한 다리였기 때문에 함부로 빼내거나 놀릴 수 없었다.

이따금 산새 우는 소리가 들쭉날쭉 들렸고, 공중에 부유한 창힐의 눈인지 무언지 하는 날개 달린 스마트폰은 울음소리에 더해 삐삐 하는 기계음을 길게 뽑았다.

누트 멤피스는 간간이 화면을 터치해 누군가와 연락을 취했는데, 그 신호는 대회 시작 당시 보았던 세 명의 다른 수행원을 향하고 있을 듯했다.

응급처치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검은 쌍창의 저주가 치명적이기는 한지 아무리 지혈을 해도 모리구의 어깨에서는 피가 절절 샜다.

나는 힘도 들어가지 않는 오른다리가 흠씬 비명을 지르는 듯해 황급히 시선을 비껴 내었다. 상처 난 자의 혈흔은 멀쩡한 사람에게 옮겨 붙을 때가 있었다.

“오필리아, 다리가 아픈가요? 오늘 당신 너무 무리한 것 같습니다.”

말룸이 상처를 살피기 위해 한쪽 무릎을 땅에 붙여 꿇어앉을 태세로 허리를 굽혔다. 나는 막 넘치는 냄비를 본 것처럼 기겁하며 그의 팔을 쭉 잡아당겼다.

“옷 젖어요, 그러지 마요. 상처를 보니까 아팠던 게 되살아나는 것 같아서 그랬던 거예요. 그리고 저보다는 모리구가 다쳤는걸요.”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매섭게 찌렁대는 울음이 아니라 땅 가까이 비행하듯 낡아 늘어지는 처량한 울음소리였다.

“저 녀석 조심해요. 동정심만 사려 드는 거니까.”

“안 속아요. 티가 다 나는데요, 뭘.”

말룸이 내 옷 곳곳에 묻은 눈과 추위가 녹으며 생긴 잔물방울을 가볍게 털어 냈다. 그러고는 왕을 추격하느라 헐거워진 목도리까지 잘 정리해 대롱 목에 감아주었다.

“동굴 안에 틀어박혀 연구만 해서 그래요. 나이 먹은 거에 비해 사교성이 없죠. 애 같고, 떼만 씁니다. 오냐오냐 해주면 버릇이 나빠질 거예요.”

“……자기소개 하는 거 아니죠?”

“농담도.”

말룸이 코웃음을 쳤다. 진심이었는데…….

까마귀가 항변하듯 각각거렸다. 말룸이야말로 사교성이 좋지 않음을 지적하고 싶은 듯싶었다.

말룸은 가면을 덧대어 속내를 숨기는 것에 능하니 이렇게 따지면 사교성이 좋은 것인가 하다가도 모리구와 누트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았을 때에는 영 아니라는 결론이 맞아떨어졌다.

모리구가 쇠파리 들러붙은 물소처럼 뱅뱅 날뛰기만 하는 바람에 결국 왕이 역정을 냈다.

“어허, 가만히! 짐이 친히 치료해주고 있지 않은가, 모리구여.”

하늘로 치뻗은 나무 사이로 해님이 누런빛을 쏘았다. 눈구름은 물러가고 없었다.

모리구가 총총총 양지로 가 휘청거리며 널브러졌다. 새발바닥 밑으로 붉은 강이 흘렀다. 누트 멤피스는 그 붉은 강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대지의 흉터라도 되는 듯 묵묵히 보았다.

새가 엄살을 부리며 이리저리 고개를 갸우뚱하다 매가리 없이 왕의 손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애완조가 맞긴 맞았네.”

로보가 하품을 하며 나무 등치에 허리를 기댔다. 육지의 정경에 녹아드는 듯했으나 뭐니 뭐니 해도 그에게는 바다가 잘 어울렸다.

청설모가 머리 위 가지를 타고 쏜살같이 지났다. 마른 낙엽이 발자국을 따라 추락했다. 로보가 별 수 없다는 듯 희미하게 웃음 지으며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입김이 하늘 위로 뭉실 떴다. 그러더니 연이나 된 것처럼 바람을 타고 화려하게 흩어졌다.

엄마. 거기서 잘 살아요? 이만하면 잘 버티고 있는 거겠죠.

나 앞으로는, 이 낯선 땅에 체류하게 된 이유를 알아내고, 누트 멤피스와 협력해 자금이든 무기든 도피처든 도움이 될 만한 것을 확보하고, 또 행여 방해가 되지 않도록 포인세티아의 능력도 열심히 갈고 닦고, 그렇게…….

목표가 더욱 뚜렷해졌다. 내가 이 땅에 내리고서 벌써 7개월이 지났다. 원작이 시작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2년 3개월 남짓이었는데, 그 이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발버둥 쳐야 했다.

말룸이 우리의 미래 상황이라 확신했던 원작에서 몇몇 이들을 제외한 ‘우리’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누트 멤피스도, 모리구도 머리털 하나 비추지 않았으니 이미 한 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을 죽음의 구덩이 속으로 끌어들였다. 누구의 종용도 아닌 내 선택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책임을 져야 했다. 저들의 목숨을, 그리고 우리 모두의 남은 시간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