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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82화 (82/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82화

“그 애 곁에 아버지를 닮은 이상한 남자도 따라붙었어. 전에 아버지가 아라크네에게 머리카락을 엮은 팔찌를 주신 적이 있잖아. 그걸 그 남자에게 먹인 걸까? 아라크네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줄은 알겠지만, 나는 좀…… 껄끄럽고 걱정되더라.”

라딘라티가 아라크네에게 머리카락을 엮은 팔찌를 주었다고? 내가 알기로 인어의 팔찌는 인어 본인이 직접 만들어야 해 소중한 사람에게만 선물하는 귀물이었다. 로보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둘은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걸까?

내 궁금증의 해소와는 별개로, 말룸이 결국 참지 못하고 모리구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과거가 오버랩되는 대화에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말룸이 모리구의 상처 난 어깨를 세게 비틀어 쥐었다. 까마귀는 신음 하나 지르지 않았다.

“사과? 내가 왜? 사과 대신 성으로 불러내기 위해 윽박지르고, 하던 사업을 이쪽에서 인수하기는 했지. 아라크네는 먼저 내 아내의 다리를 고쳐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와 어떤 관계 진전도 있을 수 없지. 그 녀석이 허튼 수작 부리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할 생각만 하면 골이 다 지끈거린다.”

“……이것 좀 놔줘.”

말룸이 더러운 것을 대하듯 그를 내팽개쳤다. 말룸의 손에 피가 묻어 비현실적이었다. 눈밭에 쓰러지다시피 한 모리구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를 압박하고 있는 검은 안개며 어깨의 상처가 운신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아라크네는 감히 안 그럴 거야. 머리가 좋은 애잖아. 그 애는 체념했어. 매번 울기만 한다고.”

모리구가 한숨을 쉬었다. 가슴에 얹힌 먼지를 떨쳐 내지 못했는지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러나 말룸은 별 관심이 없었다. 대화가 빙빙 돌았다.

“아라크네가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했는지 형도 알잖아.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주면 안 됐던 거야?”

말룸의 얼굴이 점점 구겨졌다. 모리구가 자조 어린 말을 내뱉었다.

“이것도 형은 모르려나? 다른 사람 기분을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잖아. 우리를 가족이라고 생각했다면 형이 그럴 수가 없어…….”

이건 위험했다. 모리구의 폭발이 아니라, 말룸의 폭발이.

나는 말룸의 감정을 읽어내는 눈치가 늘어 알 수 있었다. 말룸은 모리구의 저 가족 운운을 산산이 조각내고 싶어 했다.

“말룸.”

나는 살며시 말룸의 손을 잡았다. 그가 해초처럼 바닷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단단하게……. 모리구와 적대하는 것을 말리는 옭아맴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저 자그마한 위로였다.

말룸이 깊게 숨을 내쉬며 남은 쪽 손으로 제 얼굴을 두어 번 쓸어내렸다.

나는 말룸에게 있어서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똑똑히 알았다.

말룸의 가족은, 그가 사이비 교단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남겨두고 온 그들은…….

말룸의 인생을 쓰레기통 속으로 박아 넣었던 라딘라티의 수하들이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이 말룸에게 가족의 감정을 품고 있든 말든 무관한 일이었다.

세상 누구도, 심지어 나조차도 아내라는 이름이 아닌 이상 그의 할아버지나 누이의 위치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말룸에게 가족이란 빛 한 줌 들지 않는 기나긴 밤허리에 뜬 몇 조각의 별이었고, 희미하게 남은 순수의 조각이었다. 가을날 핀 자그마한 코스모스처럼, 간혹 떠올리면 이름표를 붙일 수 없는 감정이 조그맣게나마 드는 그런 것.

말룸이 자신과 같은 자들에게 제 과거를 풀어놓지 않았음이 명확해졌다.

모리구가 말룸의 과거를 알았다면 가족놀이를 제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룸은 나를 만나기 전까지 어떤 상대에게도 맘을 열지 않았던 듯했다. 그는 무리를 잃고 홀로 선 왜가리처럼 고독했다.

저자들이 어떤 사정으로 라딘라티의 밑으로 들어가 가족놀이를 하게 된 지는 아직 믿기지도 않을 뿐더러 짐작도 가질 않았다.

다만 조각난 심장을 이어 붙여 살아가고자 했다면, 서로를 형이며 아버지 따위로 칭했던 것이 약간이나마 이해는 갔다. 그러나 모리구가 형으로 삼은 대상과 아버지로 인식한 상대가 썩 변변치 못했다.

말룸의 반응이 좋지 않자 모리구가 이번에는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림자 진 소년의 얼굴은 매화처럼 아름다워 홀리기 딱 좋았다. 그는 태도도 공손하게 꾸몄다.

“안녕하세요, 형수님. 모리구라고 해요. 모리유나 모리안이라고도 불리는데, 저는 모리구 쪽이 더 편하더라구요. 정확히 514년을 살았고, 형 다음으로 만들어져서 가족 중에서는 제가 둘째랍니다. 그러니까…… 형수님께서도 제 왕께 볼일이 있으신 듯하고, 저도 형수님이나 형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부디 저희를 성에 초대해주지 않으시겠어요?”

“잠깐. 오필리아, 왕에게 볼일이 있다뇨? 관심이 생긴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없잖아요! 노출이 과한 사람은 싫어요.”

여지없이 딱 잘라냈지만 말룸이 사막왕을 찢어발길 듯 노려보았다. 모리구마저 움찔할 정도였는데,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 왕은 여전히 태평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가, ‘노출이 과한 것은 싫다’. 참고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짐은 전혀 춥지 않다, 요정이여! 걱정하는 마음씨도 황금과 같이 곱구나.”

“걱정한 적 없어요.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거죠?”

왕이 호탕한 웃음소리를 하늘 높이 띄워 보냈다.

“온갖 것을 걱정하고 있지 않느냐. 처연한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너무 안으로 곱아드는 건 마땅찮은 법. 부딪히지 않고서 해결되는 일은 무엇도 없음이라 그렇다.”

왕이 잠잠한 낯으로 미소했다. 그는 밤에 잠긴 사막을 닮았다.

“이쯤 시간을 주었으면 충분하겠지. 모리구와의 회포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해라. 그는 멤피스의 책사이지 자네들의 것이 아니야. 교섭을 하려면 짐의 신하를 겁박하는 대신 짐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

말룸이 다급히 물었다. 말투에 송곳이 박혀 뾰족했다.

“오필리아. 저자에게 볼일이 있는 게 맞나요?”

말룸의 성미가 예민하게 솟은 것이 느껴졌다. 로보마저도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들은 내 의견을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내가 볼일이 있다는 한 마디만 하면 로보도, 말룸도 내 말을 따라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만약 이 협력이 함정이라면 저들의 호의와 지금까지 진행해 온 말룸의 계획을 망쳐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겨울이 다 지나갈 때까지 눈발에 묻혀 있을 수는 없었다. 준비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시간은 인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 * *

나는 사실 친부모를 모른다. 갓난쟁이였을 때 시설에 버려졌었다.

천성이 그런 것인지 나는 겁이 많았다. 시설의 아이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으려 했다.

유년기의 나를 지탱했던 사람은 보육 시설에 있었을 때 장난감 따위를 들고 찾아오던 잘생긴 사내였다.

남자는 나를 볼 때면 속된 감정을 참아내려는 듯 애타는 낯을 종종 했다. 그뿐인 기억이 나를 여태 살게끔 했다.

친부모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원망도 이제는 희미했다. 나는 한때 그 신처럼 잘생긴 남자가 내 아버지였음 하고 바랐으나 그런 일은 일생에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그 남자를 잊어버린 채 살았다.

어떤 집에 입양되면서부터는 더욱 주눅이 들었다. 다행히 양어머니는 정말 나를 자식처럼 대해주셨다. 이런 나라도 자식이라고 보듬고자 했던 건 양어머니뿐이었다.

입양된 집은 처음에는 아이를 거둘 수 있을 만큼 잘 살았지만 가세가 기울어 회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나는 아이가 자랄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환경에서 살아야 했다.

나는 잃을 것이 없어도 겁을 먹었고, 잃을 것이 있다면 더욱 겁을 집어먹었다. 손가락 하나만 가져다 대어도 움찔거리며 껍질 안으로 숨었다. 이것이 나를 방어하기 위해 터득한 나만의 생존법이었다.

아픈 것은 무섭다. 잘못해 매를 맞는 것은 더더욱 두렵다.

어릴 때 계단 밑으로 내동댕이쳐지던 공포가 고통에 민감하게끔 만들었다. 그렇게 길러지는 가축일랑 어떤 환경에 놓이든 다시 몽둥이찜질을 당할까 쭈그러들어 우리를 탈출할 수 없게 되었다.

근심 없는 삶이란 환상이었다. 그런 삶은 있을 수 없다.

머리가 좀 굵어진 후,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지만 갈팡질팡했다. 정해준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안정적이었고 편했다.

길에서 벗어날라 치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양아버지의 손찌검이 내 속을 소금 절인 배추처럼 만들었다. 너 이거 해, 그러면 나는 예, 했다. 토를 달 수 없었다. 그 사내는 폭력으로 얼룩져 나를 떨게 했다.

양아버지는 사업이 망했던 계절이라는 여름날이면 도벽이 도져 친척들이며 친구에게 빌린 돈을 몽땅 잃고 양어머니의 허리께를 두드렸다. 옷장과 티브이 사이 작은 공간에 구겨지듯 숨은 내게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이 얼마냐 벌겋게 몰아붙였다.

“그게, 이번 달은 삼십육만 원이요. 고등학생 알바 잘 안 써 주더라구요.”

나는 그저 그런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대답했다. 동생은 그에게 대들다 허벅다리 깊이 상처가 패어 소독약 냄새 일색인 병원으로 향한 후였다.

양아버지는 에잇 퉤 침을 비비 뱉으며 내 통장을 들고 쌉싸름한 밤길을 배척배척 걸었다. 나는 그자의 뒷모습을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양아버지의 뜻에 따라 빨리 졸업해 돈을 벌 수 있는 전문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

공부를 했고, 취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여유도 조금 생겨 양아버지의 술값도 제대로 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끝내 중학생의 나이에 집을 뛰쳐나갔던 동생의 면면을 볼 수는 없었다. 동생은 페인트칠 된 옥상에 알을 낳는 잠자리처럼 무모했지만 나보다 자유롭고 용감했다.

결국 데린쿠유─깊은 우물 속 만들어진 지하 도시에서 생활했던 셈이다.

우물 안은 서넛 생활할 수 있을 만큼 협소한 데다 곰팡내마저 올라왔지만 식당이며 부엌, 교회, 창고 따위의 생활공간이 보장되어 있어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용기를 기를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탈출하듯 뛰쳐나가 친구 집에서 얹혀살았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반항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이십 몇 년 묵은 용기였다. 나는 그만큼의 시간을 축적해야지만 간신히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밖에 나가 살며 나는 붉은색 일색인 기억을 오래된 유물을 보는 것처럼 대했다. 그렇잖으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과거를 떠올리기만 하면 무서운 것들이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취업을 목전에 두고 농촌 봉사니 뭐니 하는 ‘쓸데없는’ 일에 눈을 돌렸던 것은, 내가 모르는 척하려고 했지만 결국 외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표면으로 자꾸만 올라와 그랬다.

나는 죽음을 직감했을 때 어쩌면 안심했는지도 몰랐다. 더는 살아가지 않을 수 있어서.

그러나 ‘오필리아’의 몸에서 눈을 떴을 때, 다시 한 번 살아보고만 싶어져서……. 이번에는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보고 싶어서 식인 괴물인 줄 알았던 말룸에게 벗어나려 치열하게 궁리했었다.

누군가에게 들쑤셔져 논두렁에 묻혀 죽어버리다니, 모양이 나질 않았다. 적어도 예쁜 꽃밭에 둘러싸이는 식으로나마 멋들어진 위령비를 세우고 싶었다.

그러려면 살아야 했다. 넋 놓고 시간에 휩쓸려가듯 버티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살아야만 했다.

신관님께서 한 번만 더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돌이킬 수 없어지고 만다 했었지.

그러나 마음은 화창했고 숨이 송송 산소를 바삐 날랐다. 예쁜 눈이 내린 새하얀 숲속을 둘러볼 만큼 상태가 좋았다. 마법처럼 괜찮은 것을 보면 나는 오래 전부터 이날만을 기다려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즉 결정을 끝내 두었지만 또 못된 버릇이 도져 어물어물 말을 놓았다.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떴다. 약속된 대본을 읊는 것과 비슷했다.

내가 어물대면, 말룸과 로보가 등을 떠밀어줄 것이다. 비겁하긴 했지만 가끔은 이런 게 필요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랬다.

“만약 저들을 초대해 일이 잘못되면…….”

서리가 앉아 목소리가 꽁꽁 얼었다.

샛별이 또 내 정면으로 향했다. 당해낼 재간이 없는 온기였다. 추운 삼림 속에 있었지만 벽난로를 목전에 둔 듯했다.

전혀 미소가 나지 않는 상황일 텐데도 말룸은 나를 안심시키듯 안개처럼 옅게 웃어주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제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능력 있는 남자라는 겁니다. 칠백 년간 살면서 뭘 했겠어요? 잠도 자질 못했으니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고, 그 시간만큼 저를 세공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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