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81화 (81/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81화

말룸이 나를 안아 품에 숨겼다. 오로지 그의 너른 가슴팍만 눈에 들어왔다. 말룸의 품에서 새액 색 숨을 쉬노라면 어느새 한기는 저물고 저녁놀의 애틋함만 남았다.

말룸의 목소리가 속절없이 떨렸다.

“걱정했습니다. 저 인어가 있으니 무사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다칠까 두렵고 답답해서…….”

그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경련했다.

“당신을 잃어버리면 저는 살지 못해요. 살아도 의미가 없어요.”

“미안해요, 걱정하게 해서.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고, 로보가 지켜주었으니까…….”

말룸이 다시 힘을 주어 나를 끌어당기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떨어져 내리는 온기 조각이 별과 같이 환했다.

나는 발끝만 보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두려운 것도 두려워지지 않아 상황을 거슬러 사선으로 튕겨나갈 것만 같았다.

내 안전을 확인한 말룸이 침입자를 거칠게 노려보았다.

“모리구─!”

경멸을 담은 말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상대를 향했다. 그의 품 안에 묻혀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시시각각 썩어 들어가는 대지에 선 모리구와 누트 멤피스는 궁지에 몰려 있음이 확실했다.

“네놈이 왜 이곳에 왔는지 주시하고 있었다. 영상 송출을 끊다니, 그것이 네 실책이지. 찾아오라고 시위라도 하고 싶었나?”

그러더니 말룸은 눈과 한데 엉긴 내 머리칼을 손가락빗으로 풀어내며 다정하면서도 순박하게 속삭였다.

“힘 거둬요. 무리하고 있는 거 알아요. 응? 내가 할 테니까.”

“진짜 저 이중성은 알아줘야 해.”

코를 집게손가락으로 꾹 막아 맹맹한 소리로 로보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멋쩍어진 나머지 말룸의 품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쥐어짜내듯 펼쳐 내었던 침엽수림을 땅으로 되돌렸다.

나는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로보의 곁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말룸은 사형집행인이라도 되는 양 앞으로 걸어 나갔다. 까마귀는 냉동된 듯 감히 어떠한 몸짓도 풀어 내지 못했다.

모리구가 붉은 외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로보와 나를 비스듬히 빗겨 까마귀에게로 향하는 말룸의 살기가 어마어마했다.

누트 멤피스는 이 순간까지도 모리구를 땅에 내려주지 않았다. 새가 몸을 비틀며 발광을 시작했지만 왕은 침잠한 표정으로 나를 관찰했다.

“신하된 자로서 왕의 앞에 먼저 나설 셈이냐, 모리구.”

그자는 이런 소리나 천연덕스럽게 덧붙일 뿐으로, 로보와 나는 누트 멤피스의 배짱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말룸마저 황당한 듯 누트 멤피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말룸이 말을 건넨 상대는 모리구였다. 아예 누트 멤피스를 말상대로 인정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새 주인을 찾은 모양이구나, 모리구. 너는 기생충처럼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했지.”

“모든 존재는 항시 자기 둥지를 찾아 배회하는 법 아니겠나, 대공이여.”

“네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황금을 사냥하도록 허락해주었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검은 안개가 점차 그들의 주변을 죄었다. 까마귀의 붉은 눈 한쪽이 절박한 빛을 발했다. 새가 발버둥을 멈추었다. 대신 그는 누트 멤피스의 손등에 제 머리를 비비기를 반복했다. 자신을 구하는 행위였고, 종속된 자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비굴해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을 낮추는 저 새 괴물도, 그 낮춤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왕도 거리낌이 없어서 그랬다.

한참의 호소가 있은 후에야 누트 멤피스가 모리구를 설원 위로 내려주었다. 모리구는 눈 속에 파묻힌 양 조용히 변화했다. 동굴 속에서 머무는 짐승이 오래도록 한 음식만 먹고 인간이 되는 듯했다.

변화 끝에 드러난 자는 검은 똑단발이 인상적인 외눈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한쪽 눈을 지르감고 있었는데, 꼭 흑요석으로 조각한 것처럼 요사스럽게 아름다웠다. 외형은 한 열일곱 정도로 보였고, 피부는 윤기가 없이 거칠거칠했다. 말룸처럼 퇴폐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처연한 미가 있었다.

그는 여자아이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웠지만, 극도로 마른 데다 호리호리한 체형이라 수분이 증발한 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것 같았다.

날렵한 인상조차 소년의 무기력함을 감춰 주지 못했다. 그는 숭숭 뚫린 가슴구멍 여럿에 물웅덩이만 간신히 내어놓은 듯 쓸쓸한 낯이었다.

모리구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그는 모스 부호라도 띄워 보내듯 귓불을 어루만졌다. 모래시계를 그대로 축소해 놓은 귀걸이가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모래시계의 테두리는 황금으로 만들어졌다. 얇은 유리 안에 든 붉은 모래가 넘실거렸다.

마침내 까마귀가 깊은 한숨을 토했다. 한쪽만 남은 붉은 눈이 설운 감정을 담고 푹 잠겨들었다.

“……한 번쯤 다시 보고 싶었어. 20년 만이지? 잘 모르겠네, 그쯤 된 것 같긴 한데.”

그자는 연구원을 연상케 하는 흰 가운을 차려입었다. 한쪽 눈을 감아낸 채 깊이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관통상을 입은 어깨로부터 점점이 붉은 생명이 흩뿌려졌다.

“그렇게까지 날 세울 건 없잖아. 덤비지 못할 걸 잘 알고 있으면서.”

나와 로보는 범이라도 마주한 양 당황해 서로를 바라보았다. 틀림없이 거센 교전이라도 있을 것이다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리구에게는 적대감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상대를 잡아먹을 듯 굴고 있는 것은 말룸이었다. 말룸은 플라스크 속의 미생물을 대하듯 모리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룸이 팔짱을 꼈다. 그가 썩은 땅을 밟고 나아가 모리구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말룸의 눈동자가 지렁이를 제멋대로 지분거려 결딴내는 아이와 비슷한 잔인성을 띠었다.

“영영 보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 발칙하기 짝이 없군. 뭘 원해 찾아왔지?”

소년이 한쪽 입매를 어그러뜨렸다.

“아내와 사이가 좋다는 소식을 들어서. 전 사람이랑은 남보다 못한 듯이 지냈다는데, 그래서 더 궁금해졌어. 가족 생각하길 벌레처럼 여기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의문 해소가 되질 않더라.”

모리구의 붉은 외눈이 나를 집요히 훑었다.

“나 같은 녀석들은 호기심을 따라 움직이잖아? 모르고 사는 것보다 알고 죽는 게 낫지.”

“내 아내에게서 눈 돌려. 그리고 가족이라니. 대체 누가?”

“누구긴. 아버지, 나, 아라크네, 당신 그리고 불쌍한 스콜피오지. 안 그래, 형?”

형이라니. 그리고 가족이라니.

나와 로보는 허공에서 뚝 떨어지길 종용당한 것처럼 머리가 멈추고 말았다.

지금까지 파악하기로는, 말룸과 같은 존재와 라딘라티의 사이에서는 가족 관계가 구축될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룸을 주시했다. 그는 얼음으로 반죽되기라도 한 양 냉담한 표정이었다. 모리구가 말룸의 성질을 긁기 위해 일부러 가족 운운한 것은 아닌 듯 보였으나 말룸은 가족놀이에 동참할 생각이 없는 것이 확실했다.

“허울뿐인 가족놀이 운운은 여전하군.”

“허울 같은 게 아니야. 형과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우리가 가족이라고 생각했어. 스콜피오조차도 그랬지……. 그 애가 마구 행동했던 이유에는 형의 관심을 받고 싶었던 것도 있었어. 이미 그 애는 이 세상에 없지만, 알아 두기라도 해.”

모리구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때마침 눈이 추적추적 내렸다. 까마귀가 자신의 머리 위로 우산 대신 손바닥을 드리웠다.

모리구가 무언가를 갈구하듯 말룸의 대꾸를 기다렸다. 말룸의 대답이 한참 돌아오지 않자, 모리구는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투덜거렸다.

“아, 정말, 저 인어의 창은 끔찍해. 대체 뭘로 만든 거야? 기원을 알 수 없는 저주가 깃든 것 같아. 제련해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닐 거야.”

로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악취에 조금 적응한 것 같았다.

“조상님의 창이지.”

“조상님? 그렇다면 당신 조상은 저주받았을 거야. 저주받은 창을 다룰 수 있는 건 저주받은 존재뿐이니까. 그게 세상의 법칙이지.”

로보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저주받았다고? 해왕 트리톤이? 참신한 추론인데. 영감한테 말해주면 아주 좋아하겠어. 그리고, 뭐? 저주받은 창을 다룰 수 있는 건 저주받은 존재뿐이라고? 그렇게 따지면 나도 저주받았다는 뜻이잖아.”

“농담 아니야. 저 창에서는…… 핏물과 차가운 비명의 냄새가 나. 아무리 관찰해도 이 세상의 광물로 만들 수 있는 창이 아닌데. 저건 광물이라기보다는, 인어의 신체 같은…….”

“헛소리 그만 해. 핏물과 비명?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지? 설령 그렇다 해도 그건 내가 당신 같은 작자를 많이 찌르고 다녔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아틀란티스에는 인어를 재료로 창 만드는 악랄한 기술 같은 건 없어.”

로보가 손 안에서 창을 한 바퀴 뱅글 돌렸다. 눈 내린 땅 위로 대량의 핏물이 스며들었다.

모리구는 지혈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로보의 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었지만 개운해 보이지는 않았다.

말룸은 검토할 필요도 없는 논문이라도 본 것처럼 지루해했다. 모리구가 무어라 더 이야기하려 했지만 그는 가차 없었다.

“잡담은 거기까지 해라. 네 헛수작에 어울릴 생각 없다.”

검은 안개가 바늘처럼 되었다. 수백 수천의 비수가 왕과 까마귀의 주변에 촘촘히 늘어졌다. 모리구의 얼굴에 긴장감이 들어찼다.

로보와 나는 둘 사이에서 힘의 우위를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말룸은 손짓 하나로 모리구를 제압할 수 있다는 듯 굴었고, 모리구는 극도로 긴장한 채 손가락 하나 편히 까딱거리지 못했다.

모리구가 제 주인을 보호하기 위함인지 재량껏 몸을 경직시켰다. 어깨와 날개깃의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수호였다.

뒤에 선 왕은 여유만만이었다. 누트 멤피스는 상대의 행동 양식을 읽기라도 하는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였다. 왕이 너무 비범한 탓인지, 아니면 전투로 발전하지 않게 하고 싶다는 내 뜻을 읽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리구가 대화를 시도하려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는 로보나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명확히 말룸의 폭력성을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형, 잠시만. 싸울 생각 없어. 아버지를 처치하려는 형의 계획도 방해하지 않을게. 나와 아라크네는 아버지가 어디에 계시는지도 몰라……. 미치광이 엘프와 대적할 힘도 없고.”

“너는 나를 오래 알았으면서 내 성정을 아직도 모르는 것 같구나, 모리구……. 이 같잖은 것.”

말룸이 검은 안개의 면적을 더욱 불리자 모리구의 낯빛이 푸르스름해졌다. 저 까마귀는 말룸을 심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일전에 나는 조슈아 님께 라딘라티에 대해 경각심을 갖지 않고 있는 듯하다는 일침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대로 나는 말룸의 품 안에서 예리한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중이었다. 말룸의 잔혹함을 모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는 가끔 투정을 부리거나 저를 볼 것만을 종용하며 질투를 늘어놓았지만 결코 나를 강제하거나 위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룸의 비호가 닿지 않은 까마귀에게는 사정이 좀 다를 것이다. 말룸의 분노, 증오, 울적함, 어린 시절로부터 발원해 화석처럼 굳어진 각종 부정적인 감정이 폭풍처럼 모리구에게 쏘아졌다.

“너무 그러지 마. 형한테 상대 안 되는 거 알아. 신경 긁을 생각 없어.”

모리구가 말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돌려 보고자 어설픈 웃음을 내걸었다. 하지만 그의 호의는 매끄럽지 못했다. 웃음을 지은 지 한참은 되어 보였는데, 입가에 거미줄이 맺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와도 더는 관계없어. 형도 알겠지만, 나는 이미 내 한쪽 눈으로 아버지께 대가를 지불했잖아. 나의 엉망진창 왕께서도 형수님께 볼일이 있고. 그러니 우리를 성에 초대해주는 건 어때?”

“조용. 이 이상 귀찮게 하면 입을 아주 썩게 만들어주지.”

두통이 일었는지 말룸의 눈가에 피로가 아롱아롱 맺혔다.

“네 사정에는 관심 없다. 저 머저리와 함께 내 땅에서 나가. 감히 오필리아의 나들이를 망치다니, 아내가 얼마나 축제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영지를 떠나는 건 왕이 결정할 일이야. 지금도 내가 나서서 대화하는 통에 뿔이 난 것 같거든. 나는 딸려 온 존재야. 형과 이야기할 수 있도록 왕이 배려한 것뿐이지.”

그러나 누트 멤피스의 얼굴은 재미있는 연극을 관람하는 것처럼 느른하게 풀려 있었다. 흥미로워하는 낯이 얄미웠다.

말룸도, 나도, 로보도 모리구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았음을 간파했다. 갑작스럽게 날아든 우리 셋의 사나운 시선에 모리구가 딴소리를 했다.

“이렇게 마주 보는 것도 새롭잖아, 응?”

“전혀.”

“형, 그러지 말고.”

모리구는 어떻게든 말룸과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은 듯했다. 나는 모리구가 괴물들 중 가장 인간적인 존재가 아닐지 문득 생각했다.

“참, 아라크네에게서 편지받았어. 성으로 와서 상처를 살피라고 닦달했다면서. 그 애 우울증이 심한 거 알잖아. 사과는 했어? 발타사르령에 오기 전에는 피티아 성에 들렀었는데, 날 보자마자 많이 울더라.”

피티아 성은 아라크네 피티아, 즉 피티아 공작의 거처였다. 아라크네 피티아가 우울에 시달리고 있다니? 나는 어쩐지 상상한 것과 다른 이미지에 모리구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