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80화
아랫입술을 짓씹은 채 말을 골랐다. 누트 멤피스의 기세에 휘말려 밀어 두고 있던 흥분과 긴장이 태풍처럼 몸집을 불렸다.
왕이 석조 건물의 비율을 낱낱이 분석하듯 나를 살폈다. 왕은 모리구의 존재와는 별개로 자신의 눈앞에 닥친 기회를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재어 보고 있었다.
특별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분기점이었다.
나는 왕의 푸른 눈동자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았다.
그은 말룸이나 엘로힘처럼 오래 산 것도 아니었고, 크로노처럼 미래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로보처럼 이종족도 아닌 나와 같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왕은 혼자만의 재능으로 흰 설원에 선 사자처럼 고고했다.
“제가 짐작하는 게 맞는다면, 당신은 그 기계로 황금의 위치를 추적할 수도, 전체 삼림의 지도를 펼칠 수도 있을 거예요. 주술만으로 작동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체를 이룬 것은 철과 비슷한 광석, 그리고 바탕이 되는 것은 그 속의 수많은 회로겠죠.”
“……그런가. 그대는 알아보았는가.”
누트 멤피스는 모래폭풍 속을 가늠하듯 눈을 반쯤 내려감았다.
그자의 앞에 어떤 형상이 보일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작달막한 우물이라도 좋으니 사막의 기갈을 해소할 만한 무언가를 왕이 발견했길 기대할 뿐이다.
마침내, 그가 펌프로 물을 퍼 올리듯 천둥처럼 소리쳤다.
“이 누트 멤피스의 가치를, 사막이 틔워낼 미래를 알아보았는가!”
사막왕이 허리춤에 간직하고 있던 금화 주머니들을 하나둘 눈밭 위로 떨어트렸다. 마치 비가 내리는 모양새였다.
왕은 지금까지 사막에 댈 물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농작물을 말라 죽여 버리는 해수가 아니라 농사를 지을 만큼 풍부한 영양분을 지닌 담수를.
까마귀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땅 위로 내려앉았다. 새대가리가 모로 기울어졌다가 우뚝 섰다를 반복하며 나와 로보를 빤히 관찰했다. 저울에 심장의 무게를 다는 과정이었다.
“숲의 요정이여, 좋은 안목을 가졌구나! 짐은 그대에게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사냥에서 모은 황금을 전량 그대에게 선사할 테니 게걸스레 받잡아 협조토록 하라!”
왕의 목소리가 더운 바람처럼 속을 뒤집어 놓았다.
“짐이 미처 다다르지 못했던, 이 세계에 다시 강줄기를 낼 그런 지식을 다오. 천 년 동안 정체되어 있던 멤피스를, 신이 떠난 이 세계를 재건할 수 있을 만큼의 기적을 선사해 다오!”
심장이 뻑적지근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겼음에서 오는 환호인지, 아니면 모리구와 함께하는 정체불명의 사람에게 정보를 주어 나오는 불안감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까마귀가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다시금 울창하게 내었다.
나는 로보와 시선을 교환했다. 송출되는 영상도 끊겼고, 이대로 저자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누트 멤피스의 손을 받잡는 일은 안전성이 확보된 이후에 해도 충분했다.
“아뇨, 틀려요. 당신이 제게 협조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면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겠어요.”
대중은 우리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저들은 외부인이 아니었으니 패를 숨길 이유도 없었다. 누트 멤피스가 모리구의 관련자임을 알게 된 이상 망설이는 것은 시간낭비였다.
지천이 뒤흔들렸다. 천둥이 치고 산사태가 난 듯이 폭발적인 굉음이 귀를 먹먹하게 했다.
나무가 뿌리까지 뽑혀 누트 멤피스를 둘러쌌다. 침엽수림이 감옥의 창살처럼 누트 멤피스를 가두고 사방으로 날카로운 가지를 뻗쳤다. 거대한 나무들이 조일 듯 왕을 위협했다.
“이곳에 온 목적을 말해요. 당신이 우리에게 해가 된다고 판단하면, 그 즉시 처리할 거예요.”
손에 피를 묻힐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 번 죽어본 입장에서 누군가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만은 매우 기피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저 말룸에게 배워 두었던 허세였다.
나무의 몸집을 점점 크게 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이렇게까지 정교하게 능력을 쓰는 것은 처음이었다.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기는 했지만, 로보의 뒤에서 그의 전투를 보조하는 것이 전부일 듯했다.
식은땀이 나고 기운이 쭉 빠졌지만 힘을 거두지 않았다. 로보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살해가 아닌 제압을 목적으로 하는 전투마저 그의 쌍창이 위력을 발휘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까마귀가 깊이 울었다. 세 발 달린 새의 몸이 울룩불룩해지며 점점 몸집을 불렸다. 말룸의 변태 과정과 비슷했다. 저자는 인간의 모습을 취하려 했다.
나는 가시나무 하나를 틔워내어 까마귀의 변신을 견제했다. 날카로운 가시가 솟구쳐 까마귀의 한쪽 날개깃을 꿰뚫었다. 모리구가 긴 비명을 내뻗었다. 칠판을 긁는 것도 같고, 육감적인 불길함을 자극하는 것도 같은 단말마였다.
까마귀의 날개에 벌건 핏물이 번졌다.
바닥으로 추락한 나머지 모리구의 적대감이 두드러졌다. 눈밭에 머리를 기댄 까마귀는 짜증이 올랐는지 위협적으로 바르작거렸다.
왕이 나를 집요하게 살폈다. 청명한 눈동자가 하늘의 구름과 태양 모두를 굴절 없이 비추었다. 사막 위로 얇고 투명하게 펼쳐진 소금 바다를 보는 듯했다. 포인세티아의 눈동자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깨끗했다.
“짐의 새를 공격하다니, 건방진 요정이로다.”
목구멍 안쪽으로 긴장감을 삼켰다.
“건방지지 않아요. 저는 당신이 상상하지 못한 것들을 알고 있어요. 결정하세요, 누트 멤피스. 아쉬운 건 당신이에요.”
우리의 대치 속에서 로보가 금방이라도 까마귀를 난도질할 듯 쌍창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나를 잊은 건 아니지? 사흘 내로 죽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털어놓는 게 좋을 거야, 사막의 인간.”
이윽고 폭풍 같은 웃음소리가 흰 삼림을 덧그린다.
“그야말로 반할 것 같군. 영롱하고, 아름답다.”
“……노파심에 물어보는 건데, 그 반했다는 상대가 설마 나는 아니겠지?”
누트 멤피스가 드물게 미간을 찌푸렸다. 로보도 그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은가. 나 참. 농담이라도 과하군. 짐은 염문 상대라면 남자보다는 여자를 선호한다. 그러니 자네가 아니라 저 요정에게 관심이 생겼다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네? 갑자기요?”
나는 어리벙벙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여차하면 쓰러지는 것도 불사하고 능력을 사용하려 한 내 결심까지 하찮아졌다.
포인세티아가 아름다운 탓인지 유독 부끄러운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사막왕은 자신이 아직 미혼이라느니 중혼도 용인할 수 있다느니 하는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기까지 했다.
“잘 생각해보라, 짐은 멤피스에서 사위 삼고 싶은 남자로 유명하다.”
“잠깐, 그만 하세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죠? 맥락을 못 따라가겠어요.”
모난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말룸과 맘이 닿은 탓에 누그러진 성격이 다시 삐져나오려 용솟음쳤다.
열을 받아 달아오른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못 참아주겠군.”
내가 로보에게 무어라 말을 붙이려는 그때, 인어의 손에서 창 하나가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왕 대신 까마귀의 오른쪽 어깨를 완전히 관통해 빠져나갔다.
“로보!”
저도 모르게 인어를 불러 세웠다. 로보가 이런 돌발 행동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평정심을 잃은 채였다. 로보에게서 붉은 숨결이 씨근대며 삐져나왔다.
그는 아닌 척, 쾌활한 척 해도 맘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았다. 내게 밀어내지고서도 라딘라티 처치를 돕기 위해 성에 머물게 된 로보가 말룸과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크로노에게 너는 왕이 될 수 없노라 공언 받았을 때 어떤 비참을 느꼈을지, 완벽한 왕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저자를 보았을 때에는 마음이 얼마나 조각조각 깨져 버렸을지…….
나는 천둥치는 들판 한복판에 내던져진 양 눈물이 울컥 샐 것만 같았다.
새가 피를 철철 쏟아내며 각각거렸다. 누트 멤피스가 처음으로 얼굴을 냉하게 굳혔다.
“무례하군. 남의 신하에게 무슨 짓이지?”
로보가 손을 펼치자 까마귀를 꿰뚫고도 한참을 날아갔던 창이 거짓말처럼 되돌아왔다. 그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날렵하게 창을 쥐었다. 로보가 창을 다루는 동작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으나 기척이 없어 은밀하고 신속했다. 그는 검은 가시 창과 이어져 있는 것처럼 무기를 다루었다.
“그쪽이 무례 운운하니 참신한데. 진지하게 굴어, 화가 나려고 하거든……. 우린 당신 신하가 아니야.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도 정도껏 하라고.”
로보는 얼음 바다와 다름없었다. 제멋대로 항해하며 그의 속내를 파악하려 들다가는 빙산에 부딪혀 영하의 바다로 침몰하고 말 것이다.
“지위를 들먹일 셈이라면, 아틀란티스의 후계 자격으로 얘기하겠어. 진지하게 임해. 계속 그런 식이면 살아서 멤피스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누트 멤피스가 훅 한숨을 쉬었다. 왕은 우리를 마주한 이래 처음으로 매우 피곤해 보였다. 그러나 이내 황톳물이 범람하듯 ‘하, 하하하! 하하하하!’ 따위의 과장된 웃음소리를 연신 꾸몄다.
“미안, 아무래도 과민 반응한 것 같지? 제정신 아닌 인간이 상대였는데.”
로보가 검지를 제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고는 빙빙 돌렸다. 그는 동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로보의 집요한 시선을 피하며 야트막한 한숨을 쉬었다. 누트 멤피스는 아직까지도 웃음만발이었다.
“그대들의 패기는 잘 보았다!”
사막왕이 모리구를 어깨 위에 올렸다. 까마귀가 불만을 표하듯 여러 차례 못된 부리를 놀려댔지만 왕은 저만의 청사진을 상상하기에 바빴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신하로 아끼는 듯했던 모리구가 우리로 인해 상처 입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굴 수 있을까. 누트 멤피스란 인간이 어떤 시간으로, 어떤 빛깔의 추억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수많은 질문이 뭉치를 이루었다. 날씨를 구하는 무당처럼 저도 모르게 물으려던 찰나였다.
“오필리아, 물러서요!”
우리를 구하러 온 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늘이었다. 말룸은 땅에 내리지 않았다. 그는 두터운 검은 구름을 대동한 채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샛노란 눈동자가 첨예하게 빛나 그의 오만을 천하에 떨쳤다. 하나로 정갈하게 묶어 올린 남빛 머리칼이 운석의 꼬리처럼 힘 있게 나부꼈다. 그는 검은 먹구름을 거느린 천둥의 신처럼 위풍당당했다.
“말룸.”
나는 신의 옷자락이라도 받잡고자 하는 신도처럼 넋을 놓고 그의 면면을 담았다. 저 검은 구름에 닿기만 해도 썩게 되겠지만 칭탄하듯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다.
말룸의 힘이 백색의 삼림 곳곳에 퍼져나갔다. 몸 속 깊은 곳 장기 구석구석까지 한기가 스며들었다. 나와 로보가 선 곳을 제외한 모든 대지의 나무가 검게 썩었고, 잡초가 뭉그러지며 고개를 숙였다. 새들조차 별반 다르지 않아 기이한 모양새로 부식되었다.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양 흔적조차 없이 썩는 모습이 매서웠다.
훅 끼치는 역한 내음에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로보는 말룸의 영혼에서 나는 악취에 더해 생명이 썩어 들어가는 냄새, 그리고 모리구에게서 풍기는 악취 때문인지 어지러운 듯 보였다.
“로보, 괜찮아요?”
“아니, 미안. 하지만 악취가 너무 심해…….”
나는 부축하듯이 로보의 옷자락을 틀어쥐었다. 인어가 세게 기침을 해댔다. 로보가 쌍창마저 돌려보내곤 푹 고꾸라져선 이마를 짚었다. 호흡이 간헐적으로 가팔랐다.
그야말로 재해였다. 나는 그토록 말룸에게 날을 세우면서도 끝내 덤비지 못했던 카사블랑카와 조슈아를 떠올렸다. 일종의 신이라고 할 수 있는 라딘라티를 썩게 만들어 봉인한 장본인 역시 말룸이라는 정보도 마침 떠올랐다.
신관님들이 누누이 이야기했듯 말룸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황성 정원에서 내보였던 힘은 극히 일부였던 듯했다.
말룸이 내 앞에서 애완 뱀처럼 한껏 아양을 떤대도 본질을 덜어낼 수는 없었다. 잔악함이, 흉포한 노기가 저주에 담겨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나는 그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말룸이 지금껏 내게 준 친애가, 그의 눈물방울이, 호소하듯 했던 사랑 하나하나가 나를 지탱해 공포와 번민을 물리쳤다. 나를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세상이 끝장난대도 말룸은 내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었다.
말룸이 땅에 내려섰다. 신이 지상에 강림하듯 강력하고 치명적이었다. 나는 그가 걷는 궤적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오필리아, 저 좀 봐요.”
신이 내게로 걸어왔다. 그의 표정이 절박함에 돌처럼 굳었다. 이제야 말룸은 인간처럼 보였다. 그 변화가 기꺼워 나는 풀릴 듯 후들거리는 왼 다리를 지탱해 땅에 제대로 섰다.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군요.”
내가 나의 신을 인간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