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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79화 (79/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79화

“좋아, 다시 갈게.”

로보가 크게 지면을 박찼다. 인어는 소용돌이치는 조류를 거슬러 오르고자 결심했는지 지칠 줄을 몰랐다.

“반짝이는 게 보이면 무조건 쏴 버려. 어차피 금화들은 네 탄환에 못 달려들어 안달이니까.”

“알았어요. 계속 사격할 테니 일단 달려요!”

우리는 숲을 내달리는 늑대처럼 왕을 추격했다. 그러나 계곡 하나를 훌쩍 넘어 따라붙으면 누트 멤피스는 주머니에 황금을 가득 채우고선 다른 곳으로 한달음에 달아났다. 우리는 배싹 약이 올라 마지막에는 괴성을 지르며 왕의 뒤를 따라다녔다.

도주 와중 누트 멤피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소리를 토해내며 승부를 받아들이겠다느니 왕의 자존심이 걸린 일에는 한 치 양보도 없어야 한다는 둥 맹한 소리만 지껄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런 걸 따질 만한 계제가 아니었다. 승리를 철석같이 믿다간 우리 같은 도전자에게 픽 고꾸라지기 마련이었다.

아아, 지금 막, 음, 레시우스와 멤피스의 자존심을 건 세기의 대결이 시작 어쩌고 하는 사회자의 수습성 멘트가 정신을 볼썽사납게 찔러댔다.

지금쯤 말룸의 속은 자작자작 타들어가고 있지 않을까? 나는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이따 돌아가면 작게 애교라도 부려야 할 듯했다.

로보의 숨이 씨근덕거리며 붉게 흩어졌다.

“뭐 하자는 거야, 당신.”

누트 멤피스는 여전히 허물어지지 않았다. 그는 달빛이 알알이 부서져 내린 것 같은 눈 덮인 바위에 앉아 있었다. 지친 기색조차 없는 것이 우리만 닭 쫓던 개 신세였다.

사막왕이 목청 좋게 상쾌한 웃음소리를 뽑았다.

“아하, 하하하하! 오래간만에 이런 경주라니, 그대들이 점점 탐이 나려은 찰나다. 숲 깊은 곳까지 따라왔는가. 왕의 앞에서는 어떤 생명체든 의미를 잃고 심지어 태양마저도 낡아버리지. 그러니 짐을 당해내지 못했다 해서 부끄러워할 것 없다.”

“궤변 그만하고 황금이나 돌려주세요. 그건 우리 몫이에요!”

“음? 아아, 공문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이름표가 없으니 먼저 주운 자가 임자 아닌가.”

“공문 자체가 이름표 역할을 했던 거라고요!”

“하지만 금화에 따로 표시를 해 두지는 않았잖은가? 어떤 금화가 공문에 속한 금화인지 구별할 수가 없으니 그대 측의 실책이다.”

엄청난 논리였다. 사막왕은 말재주로 자신의 흠집을 덮어 바른 것으로 꾸며 내는 재주를 가졌다. 속에 원자 폭탄이 터졌다. 주변 나뭇결이 가라앉은 기분을 따라 점점 몸을 들썩거렸다.

“진정해. 여기선 안 돼.”

로보가 청원하듯 속삭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말룸도 내가 가진 패는 최대한 숨겨야 한다고 일축했었다. 나는 그 달빛 같은 문장들에 기대어 하잘것없는 한 줌 이성을 붙들었다.

“그래서, 짐을 뒤쫓아 온 이유가 있을 테지.”

누트 멤피스가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자는 무거운 짐을 내려둔 것처럼 유쾌한 낯을 했다.

“특히 인어의 달리기가 빠르다는 것은 잘 알겠다. 육지에서도 제대로 기동하는구나. 경이로울 따름이다.”

활기가 축제처럼 그자의 몸 곳곳에 번졌다. 우리에게 엄습하는 탈력감에, 적의도 날 선 배척감도 연기처럼 흩어졌다.

사실 황금 하나 때문에 이 사달을 낸 것은 아니었다. 우리 둘 다 먹이 근처를 뱅뱅 도는 강아지처럼 되어선 이만한 난리를 피울 정도로 분별없지 않은데다, 돈이라면 출처야 어쨌든 손만 뻗으면 쥘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누트 멤피스 특유의 분위기가, 끝내 오아시스를 찾아내고야 말 듯한 당당함이 우리를 옭아맸다. 그의 손아귀에 이끌려서라면 멋대로 행동해도 괜찮다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핑계를 왕에게로 돌린 셈이었다. 곪아 썩어버릴 것 같던 맘을 차디찬 겨울바람에 훌쩍 떠나보내고, 말리든 물에 적시든 퀴퀴한 묵은내를 없애 버릴 수 있도록…….

우리는 바닥에 꿇어앉아 우는 대신 경주를 했다.

로보와 내가 동시에 깊은 숨을 땅속에 푹 뱉어내었다. 가슴의 둑을 막고 있던 보가 터져 감정이 쉴 새 없이 흘러넘쳤다.

“하아…… 기운 빠지는군.”

“그러게요.”

“유치한 일을 했어.”

로보가 풍경 속에 온전히 녹아들어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만 응시했다. 그는 눈구름에 녹아든 희미한 빛을 쫓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렌즈가 햇빛에 약한 인어의 눈으로도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왔다.

나는 관중석에서 화면을 통해 로보를 지켜보고 있을 크로노가 그에게 주목하기 시작했음을 직감했다. 보지 않아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감상 나누기는 끝났는가.”

누트 멤피스가 바위에서 날쌔게 뛰어내렸다. 이제 보니 그는 맨발이었다. 그러나 돌멩이도 풀뿌리도 왕의 발을 상하게 하지 못했다. 푹신한 눈이 그를 추앙했다.

천공을 배회하던 까마귀가 왕의 어깨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누트 멤피스는 까마귀의 머리를 검지로 밉지 않게 밀었다. 까마귀가 각 가악 울어대더니 누트 멤피스의 귓불을 콕 쪼아내고 잠잠해졌다. 왕의 살갗이 벗겨져 상처가 났다.

“하하, 재롱을 피우는 것이냐.”

피를 보았지만 왕은 성을 내지 않았다. 누트 멤피스가 기꺼운 표정으로 까마귀의 목덜미를 긁었다.

로보가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고 날 끌어당겼다. 그의 몸이 잔뜩 경직했다

로보는 사막왕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가 온 신경을 기울여 경계하는 대상은 왕이 아니라 세 발 달린 까마귀였다.

“재롱? 재롱이라고? 이봐, 그 까마귀…… 악취가 나.”

숲이 술렁거렸다. 그것이 겨울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귓전을 맴도는 말룸의 목소리 때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라딘라티를 제외하면 이제 셋 남았어요. 저와, 아라크네, 그리고 모리구. 모리구는 까마귀의 형상을 지녔지요.’

저 까마귀가 모리구였다.

악취가 나면서 로보가 경계심을 품을 만한 대상이라면 그자가 가장 유력했다.

까마귀의 붉은 외눈이 핏빛 길을 내렸다. 나는 언제든 능력을 발현할 수 있도록 곳곳에 산재한 나무뿌리의 위치를 잡아냈다.

머리가 뱅글 돌아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말룸에게, 로보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

누트 멤피스는 시큰둥한 낯이었다. 그는 우리의 경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천치였다.

까마귀가 한 번 울자 주변을 떠다니던 작은 불빛이 삽시간에 생기를 잃었다. 우리를 따라붙으며 영상을 송출하던, 그리고 남몰래 경호하듯 지키던 말룸의 주술이 단숨에 차단당했다. 당장 습격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윗입술을 짓씹으며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내 애완조에게 관심이 있는가, 인어여. 안목이 나쁘지 않은 듯하구나.”

“애완조라고? 사막의 인간들은 시체 까마귀를 애완조로 키우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지?”

누트 멤피스가 황금 호박을 품에 안은 것처럼 만족스레 미소했다.

“무슨 의미인지 짐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왕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척하는 것뿐이었다.

“전부터 썩은 내가 진동을 한다고 생각했었어. 다른 놈이 풍기는 냄새라고만 생각했지, 설마 한 마리 더 있었을 줄이야.”

“아하, 나의 모리구를 알고 있는가!”

그자가 기어이 모리구의 이름을 발음했다. 추측과 가설이 사실로 살아나 잿물을 삼킨 듯 목이 턱 막혔다.

왕이 호탕한 낯으로 응수했다. 그는 떠돌이를 접대하는 모래집의 주인처럼 여유로움을 거두지 않았다. 조롱당하는 느낌이 발목을 옭아맸다.

“그대는 바다의 인어일지니 짐의 책사를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지. 본래 모리구는 어떤 여행에도 함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년도에는 부득불 황금 사냥에 가고 싶다 우기는 바람에 이런 형태로나마 동행하게 되었지. 그런데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 모리구가 그대들에게 피해를 끼친 것이 있나?”

그가 자신의 머리칼을 뒤덮은 싸락눈을 두어 번 손을 올려 터는 것으로 땅에 내렸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적 없을 텐데.”

왕은 나침반을 쥔 것처럼 어둠 속에서도 방위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능청스럽게 꾸며내듯 말을 전시하는 모양새가 노련한 정치인의 면모를 지녔다.

맞물린 이에 힘이 들어갔다.

누트 멤피스는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까마귀가 라딘라티의 수하라는 것을 정면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왕은 필시 모리구에게서 라딘라티에 관해 전해 들었을 것이다. 저 여유 만만한 태도야말로 누트 멤피스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그를 적대해야만 옳았다. 하지만 전투라도 벌인다면 크로노가 저자를 선망하듯 바라보았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다.

머리가 긴장으로 부풀어 지끈거렸다.

말룸이 모리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았지만, 분명 라딘라티에게 소속된 괴물이니 모르긴 몰라도 저자 역시 천재성과 괴악한 성정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괴물이 왜 누트 멤피스의, 인간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저 까마귀는 정말 애완조처럼 고분고분하게 복종하고 있었다.

“뭐, 됐어. 꿰뚫어 보면 속을 알 수 있겠지. 그 피가 검은 색일지, 붉은 색일지 무척 궁금한걸.”

로보가 나를 땅에 내려두곤 절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검은 쌍창을 양 손에 불러 창대를 받잡았다. 온갖 죽음이 용솟음쳤다.

로보의 쌍창은 살아 있는 것이라면 사흘 내로 숨을 앗아가는 귀물, 모리구라면 몰라도 인간인 누트 멤피스를 상대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성급하군.”

누트 멤피스는 로보를 적대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까마귀를 얼러 천공으로 쏘아 보내려 했다. 하지만 까마귀는 왕의 건장한 이마를 불만스럽게 쪼아댈 뿐 떠나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우리가 보기에도 그들은 상당히 친밀해 보였다.

까마귀가 전장 한가운데에서 시체를 먹고 태어난 듯 괴롭게 울부짖었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결국 누트 멤피스가 모리구의 부리를 꾹 쥐는 것으로 조치를 취했다.

“할 이야기가 많을 듯한데. 어찌 되었든, 요정이여. 그대는 말룸 발타사르의 아내라 하였으니 티포주 성에 거처하고 있겠지? 이야기는 그곳에서 차차 나누는 것이 좋겠군.”

“제가 당신의 뭘 믿고 성으로 들이나요? 성 부지에 주차해 둔 비공정 때문이라면 무리해서라도 다른 공터를 마련해볼게요.”

“하지만 짐에게 얻어갈 것이 없다면 이 깊은 곳까지 추격해 오지 않았을 테지. 그리고 짐의 황금 비공정은 짐만이 운행할 수 있다.”

누트 멤피스의 새하얀 웃음이 머리 위로 잔잔히 내려앉았다. 모르긴 몰라도 나보다 나이를 더 먹었을 텐데 사내는 집을 처음 나선 아이처럼 순수했다.

나와 로보는 누트가 한 말의 진의를 가리기 바빴다.

우리는 라딘라티와 대적하고 있었고, 그자의 수하가 저런 애완조 같은 모양새로 다른 왕을 섬길 가능성을 재어보아야 했다. 모리구가 말룸처럼 라딘라티를 배신했을 가능성도 떼어 놓을 수 없었다.

정작 심판 대상자인 누트 멤피스는 우리의 경계 태세에는 영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지리를 설명하듯 덤덤히 자신을 소개했다.

“멤피스의 사막에 물길을 댈 자, 수인족의 정신을 계승한 누트 멤피스다. 그대들은?”

나는 저 푸른 눈동자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미래를 보는 크로노만큼 왕이 의문스러웠다.

“……저는 오필리아, 이쪽은 로보라고 해요.”

“참된 전사로 인정한다! 인간된 자로선 그만한 패기가 꼭 필요한 법이지.”

누트 멤피스가 내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자의 너른 어깨가 노골적으로 드리워졌다.

“그런데, 요정이여. 계속 이 창힐의 눈을 흘끔거리더군.”

그가 허공을 배회하는 날개 달린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창힐의 눈이라니, 스마트폰의 다른 이름인 듯싶었다. 이것은 기회였다. 그러나 모리구가 마음에 걸려 고삐를 풀고 맘대로 굴 수는 없었다.

나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심장이 수축했다가 퍼지는 것이 번개처럼 빨랐다.

“그 기계에 대해 할 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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