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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78화 (78/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78화

“할 말이 없네.”

“아…….”

“막 쏴도 되겠다. 편하게 해.”

속 편한 사회자가 좋을 대로 떠들었다.

“명중, 명중입니다! 비전하의 사격 한 번에 우수수 격추되는 보석들, 그리고 금화들!”

나는 사회자가 왜 이 축제의 사회자로 발탁되었는지 절절히 깨달았다.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공터라 해도 무방할 너른 설원 위, 우리는 모두의 관심을 받으며 허수아비처럼 서 있었다.

급히 의욕을 잃어 흥분이 시들해졌다. 나는 핑핑 줄을 당겼다 놓으며 건성으로 새총을 쏘았다. 자석이라도 달린 건지 탄환에 착 붙어 생명을 잃는 광물이 야속했다.

사회자는 내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명사수라느니, 아름다우신 만큼 솜씨도 뛰어나다느니 하는 흰소리를 지껄여댔다. 관중들은 텁텁하고 느글거릴 속내를 숨긴 채 박수나 지루한 듯 쳤다. 저 사람들은 황금에 매수당했다.

팔을 축 내려뜨렸다. 수확을 기대하던 로보는 우리 발치에 흩어진 황금과 보석들에도 죽은 얼굴이었다. 나는 위협하듯 중계석을 향해 속삭였다.

“있다가 들어가서 봐요, 말룸. 혼자 힘으로 하고 싶어서 열심히 연습한 거 빤히 알면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말룸은 방석에 이물질이 깃든 것처럼 크게 움찔하지 않았을까? 로보가 비음을 냈다.

“흐음……. 각방 처분은?”

“아, 그건,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얼굴에 열감이 번졌다. 로보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럼 남은 거북이 금화나 수확하자. 별 수 없잖아. 과보호가 심한 것도 문제이긴 한데, 나라도 이렇게 했을 거야.”

내 매서운 시선에 로보가 말머리를 돌렸다.

“아니, 이것처럼 촌스러운 방법은 물론 절대 아니지! 맹세해.”

촌스러운 방법이든 말룸이 했던 것보다 세련된 방법이든 더는 이러고 설 재간이 없었다. 거북이 금화는 언제 이렇게 많이 준비한 건지 몇 뭉치 다 잡고 나면 하늘에서 또 몇 뭉치 도르르 굴러 떨어졌다.

로보도 나도 웃음기를 잃었다. 재미있는 활동도 아니었고 스스로의 힘으로 따지도 않은 돈이니 침이 고일 리 없었다. 우리는 장단 맞추길 그만두었다. 긴장을 풀어도 될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들이 왔다고 생각하자. 걸어볼래? 상처 덧나지 않게 조심하고.”

로보가 나를 땅에 내려주었다. 나는 하도 쓰질 않아 빳빳하게 굳은 다리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멀쩡한 왼 다리로는 부러 땅을 퉁퉁 딛거나 쭉 뻗어 보기도 하고 발목을 뱅글 돌기도 했다.

중계석이 소란스러웠다. 말룸이 건강을 주의하라며 수선을 피우는 모양이었다.

보석의 향연이 계속되자 설원에 반짝이가 박혔다. 로보가 느슨한 몸짓으로 땅에 추락한 별을 몇 개 집어 손안에 넣고 굴렸다. 그는 가끔 해님에 둥그스름한 금화를 비추어 보기도 하고 보석을 따로 떼어 관찰하기도 하며 값을 매겼다. 로보는 망루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것들은 가차 없이 땅으로 되돌려 보냈다.

“참, 아가씨. 이거 봤어?”

그가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하던 금화 하나를 건네주었다. 동그란 원 안에는 여자가 싱그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금화를 손바닥 가운데 넣고 주먹을 쥐어 꾹 숨겼다.

“아, 정말…….”

언젠가 말룸이 금화에 내 얼굴을 새겨도 되겠느냐 물었을 때, 나는 농담인 줄만 알아 넘어갔었는데 설마 정말 내 얼굴을 동전에 새겨 놓았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중계석의 사랑스러운 사람을 맹수같이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말룸이 산불을 마주한 호랑이처럼 어쩔 줄 몰라 자꾸 머리칼만 비비 만졌다.

그렇게 한동안 주변일랑 잊고 나는 그를 추격하는 채로, 그는 나를 피해 달아나는 채로 시선을 어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 얼굴과 귀 끝에 목도리로도 가려지지 않는 열감이 피어오르자 말룸이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맘을 물건 숨기듯 감출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말룸이 허둥대고 절절매는 모습에 사랑이란 이름표를 붙였다.

사회자가 눈치 좋게 다른 공간을 조명해 우리를 관중의 관심에서 빼냈다. 로보와 내 시선도 화면으로 향했다.

넓은 화면에 비추어지는 대회 참가자들은 성난 표정을 짓고 눈 쌓인 흙더미며 나무둥치를 발로 퍽퍽 차고 있었다. 사막의 사람들이 백발백중의 새총 실력을 뽐내어 금화를 가로채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장난 아닌데. 연습을 얼마나 한 거야?”

로보가 혀를 내둘렀다. 우리는 신기에 가까운 새총 실력을 구경하는 한편 슬금슬금 불안해지고 있었다.

사막의 사람들은 금화와 보석을 백색 자루에 쓸어 담다시피 하며 독식했다. 이삭 줍기를 배속으로 보는 듯했다.

기어이 삼림 초입의 금화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은 십여 년 동안 약탈을 일삼던 도적 떼처럼 노련했다. 근근이 먹고 사는 우리 같은 화전민은 도적 떼가 밭을 덮치지 않길 기원하며 땅에 남은 부스러기나 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사막의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이동했다. 총 네 명이 각각 동서남북으로 찢어졌다.

“오필리아,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과연 로보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지척에서 인기척이 났다.

비죽 솟은 청금석 귀, 활기를 띠고 빛나는 푸르스름한 눈동자와 황금으로 치장한 구릿빛 상체.

파렴치한 복장을 한 미남자, 유아독존의 사막왕이 기어이 납셨다.

“이곳에 금화가 많이 몰려 있다는 신호를 받았다. 과연 짐작대로구나.”

그는 홀로 새로운 땅을 발견한 것처럼 위풍당당했다. 추위마저도 왕을 피해 도망했다. 갈빛 육신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올 듯했다. 누트 멤피스는 지표면에 홀로 우뚝 선 온천이었다. 대체 어떤 요소가 영하의 추위를 굴절시키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왕의 허리춤에는 여러 개의 금화 주머니가 매달려 두둑하니 부풀었다. 개구리 울음주머니를 닮았다.

로보와 나는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무례를 목전에 두었음에도 왕의 표정은 구김 하나, 그림자 한 점 없어 비현실적이었다. 누트 멤피스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신기루 속에서 사는 환상 세계의 주민이었다.

“짐의 눈을 피해 이런 부정을 저지르고 있었나, 숲의 요정과 바다의 인어여!”

왕의 매력적인 저음이 흰 설원 곳곳을 매끄럽게 휘어잡았다. 머리 위로 비죽 솟은 청금석 고양이 귀가 눈길을 묶었다. 저 요정이며 인어 운운하는 걸 못 하게 만들면 좋을 텐데. 로보와 내 살 위로 비죽 소름이 돋았다.

“일단 가자, 저런 사람은 상대하면 할수록 기가 빨리거든. 그 마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겠네.”

로보가 나를 날쌔게 안았다. 우리는 초소에 막 도착한 신병이었고 저자는 노련한 수색대원이었다. 빠르게 피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누트 멤피스가 우리에게 다가오자 주변이 술렁였다. 설마 대공비의 금화를 가로채겠냐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나 누트 멤피스는 상식 밖의 일을 저지르는 데엔 도가 튼 사람이었다.

“이 축제의 금화는 모두 짐의 것이다! 요정이여, 그대의 불편한 다리를 배려할 듯도 싶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혹할지니. 아쉽게 되었으나 멤피스 재건 자금에 포함되는 것이야말로 저 금화들에게 영광일 것이다.”

“아, 형씨. 설마 아니지?”

로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자비 없는 사막의 왕이 코웃음을 쳤다.

“언제나 예상 밖의 일을 준비해 두어야지만 세계를 견디어 살아가는 참된 생명이라 할 수 있겠지. 자, 재앙 같은 짐의 시련을 어디 한 번 견뎌 보아라!”

그가 하늘을 찢어 놓을 듯 크게 웃었다. 왕이 개량 새총을 당기자 탄환이 일곱 발 쯤 한꺼번에 발사되어 거북이 금화를 모두 쏘아 맞추었다.

금화들이 맥없이 땅을 나뒹굴었다. 우리는 눈앞에서 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설원만 보았다.

말룸에게 다음 대회부터는 새총 개조 금지에 대한 규정을 추가하라 조언해야 할 것 같다.

누트 멤피스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막왕의 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기어코 내 앞의 모든 금화를 싹 쓸어 담곤 볼일이 끝났다는 양 유유히 삼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희미한 점이 될 때까지 로보와 나는 벙벙히 있었다. 머리끝까지 뜨거운 김이 뻗쳐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로보.”

“……오필리아.”

중계석에서 말룸이 무어라 힘차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의 말소리조차 아득하니 멀었다.

나는 로보의 팔뚝을 홱 잡았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로보의 불그스름한 눈동자에 서릿바람이 내려앉았다. 내 눈동자도 꼭 닮아 있을 듯했다. 우리의 눈동자는 매대에 전시된 생선 눈알처럼 생기가 없었다.

로보가 내 목도리를 풀어 자신의 허리와 내 허리를 여러 번 겹쳐 묶었다. 오랫동안 선상생활을 해서 그런지 매듭 묶는 솜씨가 장인의 경지였다.

“손으로 받칠 테지만 앞으로 튕겨 나갈 수 있으니 꽉 잡아. 일단 저 금칠한 입을 막고 얘기하자고.”

나는 명령을 하달 받은 병사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로보가 비장하게 숨을 훅 몰아쉬곤 달릴 자세를 잡았다. 이윽고 그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 삼림 속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대공 전하, 일단 진정하시고, 분명 비전하께서도 괜찮으실 테니!”

어떤 난동을 피워대는지 말룸을 말리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말룸에게는 미안했지만 이쯤 되면 황금을 수확하는 일과는 무관하게 물러설 수 없었다.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다.

나뭇가지와 바위 사이에 숨어든 금화가 흰 눈을 묻힌 채 익살스러운 춤을 추었다. 금화까지 사람 속을 긁는 꼴이 얄미웠다.

나는 공기를 갈라낼 것처럼 힘껏 새총을 쏘았다. 탄환이 벌처럼 날아가 사방 금화를 죄다 끌어 모았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어른의 굴레를 벗어던지기로 했다. 점잖게 굴어야 한다느니 아침에 신문을 읽은 후 커피를 한 잔 마셔야 한다느니 산수를 공부해 손에 돈을 넣고 굴릴 줄 알아야 한다느니 하는 것을 제쳐 두는 일이었다.

일단 등 뒤로 치워 버리면 자연 그대로의 본성만이 남았다. 떼를 쓰고 멋대로 굴고 저축일랑 생각하지도 않은 상태로 돈을 다 써버리는 무절제가 눌어붙듯 영혼과 합치했다.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사려 깊음이나 체면치레는 망가져도 상관없었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가치가 모래가 되어 눈과 섞여 내렸다.

이렇게 되면 멋대로 날뛰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짐승을 잡기 위해서는 짐승처럼 되어야 하고, 꿈이나 네버랜드에 잠겨 사는 사람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직접 네버랜드의 주민이 되어야 했다.

지금껏 내 손으로 벌어들인 황금을 가지고 싶었지만 말룸에겐 썩 마뜩잖은 일일 테니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누트 멤피스가 이 축제에서 1등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환상도, 탁상공론도 아닌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찬란한 천재성을 손에 쥔 자에게 돌멩이를 던지고 싶은 것뿐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를 끌어내리겠다는 결단만큼은 진심이었다.

로보가 앞 못 보는 황소처럼 질주했다. 나는 그에게 안겨 사방을 살피고 지시를 내렸다.

“로보, 전방 좌측에 나뭇가지요!”

“응, 맡겨줘!”

로보가 훌쩍 방향을 틀었다. 인어는 마치 물 안에 있는 것처럼 굵은 가지가 위협적인 삼림을 휘젓고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누트 멤피스를 발견했다. 그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나무둥치에 기대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왕이 오만이라는 갑옷으로 무장했다. 수적으로 불리한데도 도망치지 않는 모습이 아니꼬웠다.

“기다리다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산새 소리가 째액 짹 울려 귓가가 시끄러웠다. 새 울음소리는 겨울을 음악으로 매만진 것처럼 하염없이 투명했다.

누트 멤피스가 푸르게 웃었다. 밉상인 상대였지만 사막을 가르는 강물을 마주한 것처럼 쾌청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나는 그것이 맘에 차지 않아 일부러 인상을 험상궂게 만들었다.

“아무리 요정과 인어가 협공을 펼쳐도 짐의 황금을 빼앗아 갈 수는 없을 테지. 순전히 그럴 능력이─”

저 앞에서 또 황금이 번쩍 지면을 굴렀다.

“─없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순록처럼 앞길을 가로막은 덤불과 굵은 나뭇가지를 낱낱이 피하며 숲 안으로 더욱 굽어 들어갔다.

로보가 볼멘소리를 뱉었다.

“밥만 먹고 새총만 쏴댄 거야, 뭐야! 이 숲길은 또 왜 이렇게 잘 알아? 몰래 사전답사라도 한 거 아니야?”

“한 번도 빠짐없이 축제에 참가했다고 그랬으니까 길을 외워둔 게 틀림없어요. 다른 수를 썼을 수도 있겠고요.”

“짚이는 게 있는 거야? 하여튼 골치 아프군, 이 지경이 되기 전에 지렁이 녀석이 조치를 취했어야 했어.”

로보의 숨이 색색 가빠졌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흘러내렸다. 나는 장갑 낀 손으로 로보의 이마를 훔쳐 주었다. 그의 양 볼이 살짝 달떴다. 나는 생각에 잠겨 있느라 로보의 상태를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숲길을 잘 알고, 황금을 귀신같이 추적해 낼 수 있는 요소라면 내가 알기로는 하나뿐이었다. GPS와 비슷한 무언가가 그자의 날아다니는 스마트폰에 필시 탑재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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