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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77화 (77/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77화

탄환 배부의 시작과 동시에 사람들은 코뿔소 떼로 변해 욕망 어린 콧김을 뿜었다. 사회자와 안내인이 사람의 편을 가르고 어르며 흥을 띄웠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웅장한 음악이 지천을 뒤흔들었다. 지금은 한낮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는 것과 비슷했다.

나를 되찾기 위해 무대 가까이 다가온 로보는 말룸의 창백한 얼굴을 발견하고 한숨을 쉬었다.

“밀가루 바른 줄 알았네. 거머리에 피 빨린 낯빛이잖아?”

“다르진 않다. 거머리에 물린 셈이지.”

나는 귀여운 동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둘 사이에 모나지 않은 대화가 오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전에 면박을 당했던 보좌관이 우리 사이의 공기를 읽어내려 용을 썼다. 하지만 저 남자가 알 수 있는 것은 몇 없을 것이다. 나는 따뜻한 음료 안에 잠긴 것처럼 담요를 두른 채 소파에 얌전히 있었다.

“진력이 나는군요.”

말룸은 중간에 누트를 조심하라 신신당부를 했지만 기피증이 도졌는지 힘들어했다. 나는 묵묵히 그의 손을 세게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토기를 담고 요동치던 태양 빛 눈동자가 항구를 찾은 듯 잔잔해졌다. 나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에게 엷은 웃음기를 비추었다.

이후 로보와 말룸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없었다. 말룸은 중계석으로, 로보는 나를 찾아 탄환을 배부해주는 곳으로 갈라질 뿐이었다.

나는 황금 사냥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사냥이라 할 것도 없을 만큼 낮은 난도를 즐기게 되겠지만, 어쨌든 말룸이 준비해 둔 거북이 금화는 남김없이 사냥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정비하는 것이 중요했다.

탄환 교환소가 공터 곳곳에 설치되었다. 로보는 누트 멤피스가 향한 교환소와는 정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상자 안 가득 담긴 주술 탄환을 따로 분류하던 통통한 중년 여자가 우리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이구, 비전하이시잖아! 세상에, 너무 고우십니다. 요정이라도 나타난 것 같네요. 아아, 어쩌면 좋아.”

여인이 악수를 청하고 싶었는지 장갑 낀 손을 허리에 대고 문대었다. 하지만 탄환 기름때가 낀 손은 좀처럼 깨끗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나는 여인이 악수를 청했다면 흔쾌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결국 포기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아쉬움의 탄성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인을 따라 절로 내려가려는 고개를 빳빳하게 고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 앞에 모여들어 탄환을 교환하던 사람들마저 일제히 우리를, 정확히는 성격이 파탄 난 것에 가까운 대공의 마음을 녹인 평민 여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얼굴이 불에 달궈진 돌처럼 새빨개졌다.

“어떻게 좀 해 봐요.”

내가 로보의 머리칼을 비죽 잡아당기곤 속삭였다.

“예쁘다는데?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로보가 다시 일전처럼 이야기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럼 나는 항상 하던 생각을 했다. 예쁘기는 무척이나 예쁠 것이다, 다름 아닌 고대 최고의 미인 엘프, 포인세티아의 몸이니까!

여인은 이후 이것저것 묻고 싶었는지 입을 옴찔 떨었다. 로보에게 탄환을 평균 이상 건네주는 채였다. 나는 그치의 입에서 어떤 질문이 나올까 설렘을 안고 기다렸다. 평범하게 잘 빚어진 백홍색 얼굴, 황금에 눈이 뒤집힌 이들에게 탄환을 나누어주느라 약간 삐져나온 갈색 잔머리가 인간 냄새를 품고 햇살과 섞였다.

“만나 뵐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대공 전하와 아주 좋아 보이셔요. 우리 애들에게도 꼭 이야기해주어야겠어요. 짝을 찾는다면 꼭 대공 전하와 비전하 같은 상대를 찾았음 한다고도 잔소리를 하고요.”

그러나 그자가 한 발 물러서 깊이 허리를 숙였을 때에는, 그리고 여인을 따라 다른 자들이 각자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거나 몸을 수그렸을 때에는 손톱 밑에 가시가 파고들어간 것 같은 쓰라림과 실망감을 느꼈다.

“……그대의 가정에 평안이 깃들기를 바라네.”

나는 이 세계의 귀족을 흉내 내 주었다. 여인이 내가 아니라 대공비로서 자리하길 원하기 때문이었다.

답례로 우리는 탄환을 더 받았다. 로보는 커다랗게 부푼 자루를 다른 쪽 손으로 짊어진 채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새하얀 눈이 참 잘 어울리는 인어였다.

“산타 같아요, 로보.”

“산타?”

“선물 나눠주는 할아버지요.”

“난 할아버지가 아닌데. 아직 팔팔하다고.”

나는 공연히 웃음을 터트리며 로보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곧 사냥이 시작될 테고, 우리는 우리 몫의 금화를 수확한 채 어린아이처럼 깔깔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마침내 시간이 찼다.

“친애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대회의 모든 상황은 대공 전하께서 친히 구상하신 대형 화면으로 주술을 통해 송출됩니다! 12회 황금 사냥 축제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어떤 자가 웃고, 어떤 자가 울 것인가!”

사회자가 화려한 입담을 자랑했다. 중계석에 있던 말룸이 자리에서 일어나 뽐내듯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로보와 나는 다른 곳을 보면서 실없이 새려는 웃음바람을 참았다. 말룸의 대외 선전용 가면은 가끔 손발을 굽어들게 했다.

박수 소리와 환호성, 음악이 어우러졌다. 사회자가 대회의 시작을 선언했다.

“곧 여러분의 운명을 뒤집을 황금과 보석들이 출현합니다! 준비하시고─”

그와 동시에 말룸의 주변에서 환한 빛무리가 떠돌았다.

“─사냥하세요!”

빛이 잦아들었을 때, 살아 움직이는 황금과 보석의 덩어리가 먹구름처럼 응집해 하늘 꼭대기에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보석들이 빠르게 쏘다니는 꼴이 꽃들 사이를 어지럽게 맴도는 벌떼 같았다.

하늘에서 금빛 별들이 추락했다. 소나기보다는 거셌지만 폭풍보다는 덜 매서웠다. 싯누렇게 번쩍이는 것이 가장 많았고, 푸르스름한 사파이어와 석류를 닮은 루비가 줄을 이었다. 진주와 다이아몬드가 가장 드물었다. 그러나 부의 강림이라는 점에서 동일했다. 저 보석들은 하나같이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사람들이 손을 앞으로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 손안에 그네들의 생활이 담겼다. 한 평민 여인은 평생 입어볼까 말까 한 고급 드레스를 기원했고, 어떤 아이는 값비싼 디저트를 소원했다. 다른 이들은 집이나 결혼 자금, 혹은 병 고칠 약값 따위를 떠올릴 것이다.

나는 독심술사가 아니라서 전부 상상이었는데, 차가운 광물이 별똥으로 변신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인간의 정신을 쏙 빼놓는 악마의 물건이 허공 한 이 미터쯤 위에 부유하듯 멈추었다. 군중이 각기 애타게 신음하며 손을 뻗었다. 그러면 그것들은 돌덩이 주제에 희롱하듯 조금 더 팔락대더니 팔다리가 쑥 하고 생겨나며 이리저리 땅 위로 푹 고꾸라졌다.

그리고 일제 사격, 광물들은 일제 도망.

인간이 만들어 낸 최고의 아수라장이었다. 로보와 나는 황망한 듯 혹은 홀린 듯 참상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내가 대공비라는 것을 인식한 탓인지 우리 주변으로 휘몰아치듯 달려오는 이들은 없었다. 그러나 숲으로, 저 너머 설원으로 뛰노는 발이 매서워지고 바빠질 때면 나는 그들이 인간인지 늑대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 이 순간입니다! 비전하의 발밑으로 온갖 반짝이는 것들이 모여듭니다! 세상에, 하트로군요! 하트가 반짝거립니다! 대공 전하께서 보내는 연서입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우리의 잠을 깨웠다. 로보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나는 당장 참호를 파 땅속으로 숨어들고 싶었다.

느릇느릇 기어 오는 금화와 색색의 보석들이 하트 대형으로 멋 부리는 모양으로 익살을 떨었다.

“당장, 그만둬요. 말룸!”

작게 짓씹듯 발음했지만 말룸이 내 말을 어떻게든 받잡을 걸 알았다. 중계석의 말룸은 멋쩍은 얼굴이었다.

정말 이 수작이 내게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저 사람의 연애 감각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부끄러움보다 측은함이 앞섰다.

“오필리아, 네 남편 진짜 구닥다리야.”

“하지만 저 사람은 이런 방법밖에 몰라요. 다른 사람이랑 여태 제대로 된 교류를 하지 못했을 거예요…….”

로보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오, 그 녀석을 원시인 대하듯 이야기하는데.”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요. 안 되겠어요. 저도 형편없기는 하지만, 최대한 고민해서 연애 강의를 좀 해줘야겠어요.”

“진심이야? 그걸 들으면 널 유혹할 수 있는 건가? 그럼 그거, 나도 들어도 돼?”

나는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당연히 농담이죠! 살면서 제대로 남자 사귀어본 적도 없는데 강의는 무슨.”

“왜, 인기 많았을 것 같은데.”

“제 별명이 투덜이였다구요. 맨날 투덜거리기만 해서. 투덜거리는 사람은 인기 없어요. 별로 활발하지도 않았고.”

“그래도 그런 사람들 보면 난 지켜주고 싶더라. 투덜거리지 않고 항상 웃을 수 있도록.”

로보의 눈동자가 청명했다. 나는 이 이상 로보의 눈동자를 마주하면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아 하얀 눈밭만 보았다.

저 멀리 중계석에서 말룸이 엉겅퀴를 삼킨 것처럼 인상을 모나게 찌푸렸다. 대화를 주섬주섬 주워들은 듯했다.

나는 못을 박듯이 어서 저 금화 좀 어떻게 해보라 계속 중얼거렸다. 그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금화들은 주춤거리기만 했다.

마침내 말룸이 금화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금화와 보석들이 익살인지 사랑의 속삭임인지를 거두고 늙은 개미처럼 으슬으슬 걸었다. 어쨌든 금화가 움직이기는 해야 하니 완전히 동력을 잃게 하진 않은 듯했다.

다시 말룸을 바라보자 그는 사회자의 수습에도 불구하고 영 뚱한 것이 단단히 토라진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가슴이 아플 만큼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성량으로 속삭였다.

“저도 사랑해요, 말룸. 그래도 당신 연애 공부를 할 필요가 있어요. 알죠?”

말룸의 얼굴에 붉은 꽃이 앉았다. 주변을 의식해서인지 표정을 냉랭하게 바꾸고 몸을 빳빳이 세웠지만 볼 만한 사람은 다 본 후였다.

로보에게는 미안했으나 저 당황스러운, 그리고 약간은 촌스러운 고백에 아닌 척 가슴이 둥실 떴다.

말룸은 우주를 닮았다. 본인은 부정하겠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붉은 심장 결정은 수명이 다한 항성이었고, 머리칼은 밤하늘을 오려 만든 은하수였다. 그의 눈은 또 어떻고. 늘 생각했지만 그것은 금성이다. 세로로 검은 줄이 쭉 그여도 금성은 금성이었다.

부리는 주술인지 마법인지는 경이롭기만 했다. 그는 천문대를 잃어버린 내가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우주였다.

만약 말룸이 이 감상을 알았더라면 내가 어설픈 몽상에 잠겨 이상한 말이나 늘어놓는다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말룸은 강산이 백 번 바뀌어도 나를 사랑할 사람이었다. 그게 우주처럼 경이롭지 않다면 대체 무엇이 경이로울까?

말룸은 자신을 인간처럼 만들어 줄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기엔 너무 낡아버렸다. 영혼이 녹슬어 걸음을 옮길 수 없게 된 것이다. 완전히 지치는 때야말로 한 사람에게 정착하는 순간이었다. 동력을 잃은 사람은 제 곁에 있는 것들 중 그나마 나은 것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습성이 생겼다.

나는 새총만 만지작거렸다. 말룸과 열꽃이 옮겨 붙으면 로보와 무척 어색해질 것 같았다. 실제로 로보는 벌써 소금 바다에 입수한 듯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나는 황금 사냥에 집중하기로 했다.

거북이 금화가 어서 자신들을 쏘아 맞히라는 듯 움찔움찔 서로 모여들었다. 최대한 과녁의 크기를 불리려는 게 훤히 보였다.

일단 저것들이 말룸에게서 쏟아져 내렸다고 하니 급히 사랑스러워졌다. 황금이 아니라 말룸이 선물한, 작달막하고 동그란 모래 빛 물건을 사랑하는 것이다.

금화는 하나같이 똑같이 생겼다. 이지도 미적 가치도 없는 저 동전을 발로 찰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카사블랑카나 렉스 님은 내가 일관적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테지만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수 분 전에는 현물을 멸시하는 듯했다가도 지금은 찬양할 수 있었다. 나는 때로는 겁을 먹은 생쥐였다가도 갑자기 사냥꾼이 되기도 했다.

입안에 스리슬쩍 침이 고였다. 로보의 어깨를 신호하듯 두드렸다.

“로보, 사실 제 앞의 거북이 금화만 쏘아 떨어뜨릴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황금이 가지고 싶어졌어요. 손에 넣을 수 있는 최대한의 황금을 갖고 싶어지고 만 거 있죠?”

“나도 마찬가지야. 역시 반짝이는 걸 목전에 두니 정신을 못 차리겠군. 그렇지?”

우리는 보물섬을 앞에 둔 해적이었다. 로보가 나를 제대로 안았다. 내 엉치뼈를 받치고선 앞을 바라보게 하는 자세였다. 앞으로 푹 고꾸라질 듯도 했지만 나는 인어의 순발력을 믿었다. 눈밭에 얼굴을 뭉개기 전에 중계석의 말룸도 어떻게든 손을 써 줄 테다.

로보가 땅에 내려 둔 자루에서 꺼낸 탄환을 내게 주었다. 나는 호기롭게 흰 새총의 줄을 잡아당겼다.

“앗, 잠시만, 잘못 쐈는데…….”

시위를 막 놓았을 때 아차 싶었다. 추위와 긴장에 몸이 굳은 모양인지 궤적이 빗나갔다.

그러나 탄환이 마치 달콤한 민트 사탕이라도 되는 양 금화와 보석들이 앞 다투어 제 몸을 던졌을 때, 로보와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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