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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76화 (76/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76화

누트 멤피스가 설혹 기계와 과학을 기반으로 한 문명을 구축하려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전 세계에서 그것을 전공하고 그것에 대해 배웠던 나는 더 이상 무력하지 않아도 된다. 말룸에게, 모두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아는 물건이야? 지렁이 녀석이 말을 멈추고 날 노려보고 있어. 대답 좀 해줘. 응?”

로보가 여상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짐짓 쾌활한 목소리였지만 흉내에 불과했다. 나는 홀린 것처럼 혀를 놀렸다.

“맞아요. 맞아요, 로보. 저건 제 세계에서 상용화되었던 물건이에요. 만약 저자가 전기며 반도체 회로, 코딩 프로그램, 컴퓨터 따위를 직접 발명했다면, 그래서 이 세계의 주술과 접목했다면……. 로보, 그는 세상에 다시없을 천재예요. 혼자 해낼 수 없는 일을 그는 아무렇지 않게 해낸 거예요.”

로보는 돌로 만들어진 듯 움직이지 않았다. 상냥한 말도 더는 없었다.

나는 로보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알면서도 누트 멤피스에게 경주마처럼 달려가 이것저것 캐내고 싶었다.

당신이 직접 발명했나요? 전기는 사용하고 있나요? 하늘을 나는 배라는 게 혹시 비행기인가요? 다른 빙의자가, 혹은 환생자가 있나요? 혹시 그게, 당신인가요?

열등감도 슬그머니 제 존재를 피력한다.

그래도 당신이 저걸 스스로 발명할 만큼 뛰어난 사람은 아니죠? 겉모양만 흉내 내었거나 지구의 모델을 빼다 박았을 뿐 손끝에서 직접 피워낸 당신의 피조물은 아닌 거죠?

하지만 부정 어린 상념도 잠시였다. 스마트폰으로 추정되는 기계가 스스로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을 때, 나는 깔끔히 인정했다.

지구의 기술이 아니었다. 근본부터가 달랐다.

이 기계 없는 세상에서 저것을 발명해내고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누트 멤피스는 천재적이었다. 나는 크로노가 왜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는지 통감했다.

머리에 갇힌 열기가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왕처럼 될 수 없었다. 가슴이 땅속으로 추락할 듯 박동했고 머리가 어지러워 핑 돌았다.

기이한 사람에게 인간은 보통 거부감을 느꼈다. 군집에서 비죽 튀어나온 녹슨 못을 멀리 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가까이 하다가는 약한 살결이 찢겨 파상풍에 걸릴 수도 있고, 자신의 가치가 깎아내려져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하여 우리는 그들에게 광인이란 굴레를 씌우고 무리에서 돌출한 돌연변이라 지칭했다.

하지만 어쩔 텐가? 부정할 수 없는 천재가 저곳에 있는데.

재해와도 같은 뛰어난 별종에게 우리는 천재라는 꼬리표를 붙여 별을 대하듯 숭상했다.

나는 한 번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뒤늦게 로보의 눈을 응시했다. 평소에는 개인 듯 잘 보이던 붉은 눈동자가 푸르스름한 렌즈에 가려져 혼탁하게 느껴졌다.

그는 일평생 바다의 왕좌를 그렸을 인어. 로보가 하루에 몇 번이고 후계위에 대한 생각을 하는지 나는 감히 헤아릴 뜻을 품지 못했다.

로보의 콧등이 찌푸려졌고, 미간은 가뭄을 맞이한 땅처럼 갈라졌다. 그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가며 날카로운 상어 이빨이 형상을 드러냈다. 그는 그 첨예한 이빨로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파도를 분쇄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저자는 척박한 사막, 불타버린 나머지 생명이 움트지 못하는 땅에 터를 잡았지?”

“로보…….”

“다들 제정신이 아니라 비웃고 매도했지? 그 누구도 저자가, 육지 황자가 이야기하는 대로의 왕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

지금 로보가 딛고 선 곳은 얼어붙은 북해.

“그런데도 저렇게나 당당하단 말이지? 그래서 결국 찬란한 미래를 움켜쥔다는 거지…….”

그는 얼음 바다에서조차 추방당한 인어.

“결심했어.”

심해 깊은 곳을 마구잡이로 유영하던 상어가 거대한 몸을 뒤틀었다. 상어는 늑대처럼 게걸스럽고도 우아하게 파도를 거슬러 항해하기 시작했다.

“왕이 되겠어. 누트 멤피스가 세계를 독식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얼어붙은 해저 깊은 곳의 화산이 폭발했다.

“더는 벽을 세우며 도망치고 싶지 않아. 누트 멤피스가 육지를 거머쥔다면, 나는 일곱 바다를 지배하는 왕이 되겠어.”

그가 내 위로 장막 같은 숨을 토해내었다. 나는 인어의 등을 덮듯이 감싸 소리 없이 응원했다.

리몬델에서의 절규가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나는 로보를 믿었다. 그가 해낼 것을 의심치 않았다…….

로보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뿌리가 잘 형성되어 땅에 자리를 잡은 거목이었다.

충동적으로 한 결심처럼 보였으나 나는 로보가 얼마나 오랫동안 왕좌에 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로보에게는 씨앗 위로 흩뿌려질 약간의 물이, 아주 사소한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의 양 어깻죽지에서 날개라도 돋았으면 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역동적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갔으면 싶었다.

로보가 내게 삶에 대해 무언가 기대를 걸고 있는 것처럼, 나도 그에게 개척자가 되어 달라는 기대를 거는 일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베팅했다. 이것은 실패하지 않는 도박이었다.

우리는 황금을 사냥하기 위해 항해했다. 사막 위든, 바다 위든, 땅속이든, 무덤 위에서든. 단지 각자가 원하는 황금의 형상이 다를 뿐이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손에 쥘 수 있는 황금을 원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손톱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광물이 인간을 먹이고 삶을 영위하게끔 했다. 운 좋게 말룸을 만나고 그와 사랑에 빠져 최상의 부를 영위하고 있었지만 나는 여태 가난함을 느꼈다. 남이 적선하듯 쥐여 준 황금은 인간을 완전히 살게 하지 못했다.

수로가 한순간 얼어붙어 막히는 것처럼 황금은 아무리 모아도 끝이 없어 막막했다. 그래서 우리는 황금을 벌어들일 때의 보람과 자부심을 황금 위에 두어 정신적인 풍요를 추구했다.

만약 이런 것을 생각지 않고 황금만 따라간다면 말룸처럼 되고 만다. 말룸은 그토록 막대한 황금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했다. 괴물은 말룸이 아니라 그가 지닌 불안과 강박이었다. 취미라도 가졌다면 약간이나마 안녕을 쥘 수 있었을 텐데, 그 가여운 사람은 내가 취미에 관해 물었을 때 시간 낭비라 일축했었다.

그날 나는 말룸을 옥죄고 있던 사슬의 정체를 또 하나 깨달았다. 단상 위에서 힘차게 발음하는 그는 어떤 인간보다 아름답고 영리해 보였지만 저 안에는 썩어버린 사과만 들어 있었다.

그렇다 해서 말룸만이 경계해야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태피스트리에나 나올 법한 저 아름다운 미남자가 내 남편이다’ 같은 저열한 감각이 몸을 잠식하면 급류에 휩쓸리듯 순식간에 상황이 종료되었다.

“오늘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이 축제에 자리해주었다.”

말룸의 낮은 목소리가 매끄럽게 공터를 채웠다. 사람을 홀리는 목소리였다. 흡입력이 있는 데다 맹수가 낮게 노래하는 듯해 누구도 말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세상의 모든 비단으로 사람을 만들어도, 내 아내보다 아름답지는 못하겠지.”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쏘아 올렸다. 불꽃같은 겉치레였다. 황금을 뿌리는 대공이 제 짝을 찾았다는 사실에 감격했는지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말룸이 그들에게 해준 것은 고작 황금을 풀어 놓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말룸이 단상에서 내려와 인파를 갈랐다. 개선장군을 닮았다. 로보와 말룸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지만 충돌은 없었다.

“오필리아, 이리로.”

말룸이 나를 로보에게서 건네받았다. 그는 나를 안아들자마자 상태를 낱낱이 살폈다. 홍수가 난 듯 범람하던 회의감과 우울한 공상이 수챗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덮였다.

말룸이 내 심장 끄트머리에 솟은 심지에 형체 없는 기쁨을 점화했다. 나는 멋쩍어져서는 괜히 말을 모나게 하는 식으로 투정을 부렸다.

“뭐예요, 저 잘 있었어요. 얼마 떨어져 있지도 않았는데.”

“당신은 공식 석상이 처음이잖아요. 요르나스의 생태도, 이 행성에 속한 인간도 전부 낯설 테죠.”

나는 고개를 들고 말룸의 아름다운 얼굴에 서린 따스한 평화를 감상했다. 맞닿은 체온이 들쑥날쑥한 것마저 나를 흠뻑 홀렸다. 단 음식을 베어 문 듯했다.

말룸도 살며시 미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옷에 구김이 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나를 땅에 내려주지 않았다. 옷에 엉겼던 눈과 얼음이 체온을 이기지 못하고 스르르 녹아내렸다.

“오필리아. 춥진 않나요?”

“전혀요. 함께 있잖아요. 이번에는 차가운 게 아니라 뜨겁기도 하고요. 당신 체온은 불규칙하지만, 신기하게도 제가 원할 때 손난로도 되고 선풍기도 된다니까요.”

“아쉽지만 제 신체에 그런 기능은 없어요. 순 제멋대로지.”

말룸이 짧고 경쾌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와 휘파람 소리, 둥당거리는 북 치는 소리, 사랑의 선율을 덧씌우며 귀를 간지럽히는 바이올린 소리가 서로 엉켜 하늘로 올라갔다.

“딸기코가 되어버렸군요.”

추위로 벌게진 코끝을 말룸이 살살 매만졌다. 그의 손끝이 닿은 살갗을 따라 열기가 새로 앉았다.

나는 황금에서 자유로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쓸모를 찾아 비행하는 기계가 된 것 같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행동하는 편에 마음이 끌렸다.

이 사냥 대회가 끝나면 이 영지에에 얼마간 머무를 누트 멤피스를 찾아가 황금 농사에 대해 깊이 풀어놓을 생각이었다. 그 제멋대로인 왕은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어떤 방식으로든 활용할 구멍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누트 멤피스가 핵이나 총 따위를 만들어낼 수 있길 희망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잔인한 모양새로 한데 뭉쳐 푸른 문 안으로 던져 넣고 싶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축제가 시작하면 여유가 생길 테니, 귀빈석에서 당신을 살필 수 있을 거예요.”

말룸이 다시 무대로 떠났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안겨 있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무대가 고급스러운 음악당을 보는 것처럼 화려했다. 잘 닦여 눈꽃 하나 피지 않았다. 나무 바닥은 두 사람분의 무게에 짓눌렸지만 삐걱거림 없이 사람을 잘 떠받들었다. 그것 역시 말룸의 황금이었다.

말룸이 미리 마련해 둔 붉은 빛 고급 소파에 나를 앉혔다. 그가 과장되게 내 볼에 입을 맞추자, 둑을 부수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정글 속에 온 듯했다. 그들은 세상을 모르는 동물이나 지고의 순수를 간직한 고대인이었고, 우리는 닳아빠진 낡은 배였다.

“미안해요. 과시하듯 이러고 싶진 않았어요.”

말룸이 작게 사과를 건네었다.

“이해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통치자라면 이런 쇼맨십도 필요한 법이었다. 내가 지금껏 이해한 이 세계의 법칙에 따르면 하여튼 그랬다.

이후 말룸은 황금 사냥 축제 규칙에 대해 다시 주의를 주었다. 배부하는 주술 탄환만을 사용할 것, 탄환이 다 떨어지면 새로 보충할 수 없다는 것, 상호 간의 싸움은 금지되어 있다는 것, 삼림과 참가자 보호를 위해 지정선 안쪽으로는 깊이 들어가지 말 것.

그가 규칙을 선포할 때마다 들뜬 사람들이 유령 같은 소리를 내었다. 오오, 오오오오…….

말룸은 죽은 자들을 지휘하는 군장이라도 된 듯이 그들을 현혹했다. 나는 갑작스럽게 출현했을 ‘황제의 동생’ 빛깔 포장지에 의문을 가질 법한데도 왜 사람들이 말룸을 대공으로 인정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내 생각보다 사람 심계를 잘 다루었다.

나는 말룸의 뒷모습을, 그리고 옆모습을 조각하듯 응시했다. 그는 눈이 부실 만치 희었다. 창백한 입김이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바깥으로 삐져나왔다. 나는 그것이 말룸의 영혼이라도 되는 것만 같아 내 안에 주워 담고 싶었다.

장승같이 빳빳이 서서 무표정으로 말룸을 바라보는 자는 단 넷뿐이었다.

크로노, 나, 로보, 그리고 누트 멤피스.

우리는 저 소란스러움에 동조하지 않았다. 나와 크로노, 그리고 로보의 경우에는 저 화려한 낯의 본성을 알기 때문이었고, 누트 멤피스는 남의 화려에 의지하지 않고도 배부를 수 있을 만큼 빛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로보도 자신의 배에 올라 황금을 향한 항해 준비를 하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배회하는, 더 좋은 것을 약탈하려는 해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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