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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75화 (75/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75화

“아, 저기 육지 황자네.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여……. 이봐, 육지 황자! 내 목소리 들려?”

로보가 관중석에 자리한 크로노에게 큰 소리로 자꾸만 말을 걸었다. 크로노는 그가 황자임을 알아본 사람들 틈에서 거의 죽은 낯이었다.

로보의 성화를 이기지 못한 크로노가 로보의 미래를 거론하며 한껏 위협했다. 하지만 로보에게 그 협박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하하, 반응이 확실하니까 자꾸 놀리고 싶어지네.”

로보가 크로노에게 모난 말을 하는 대신 청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크로노의 반응을 끌어내길 게임하듯 즐겼다.

정각이 임박하자 주변에서 점차 소란이 일었다. 축제의 기대감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사람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군중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굶주린 늑대처럼 몰려들어 열의를 불태우던 인파가 반으로 쭉 갈라졌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는 듯했다.

로보는 영문을 몰라 길의 한가운데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관중석에서 크로노가 쌤통이라는 양 사납게 웃는 것을 발견하고 숨을 멈추며 긴장했다.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처럼 귀에 확 들어오는 저음이 흰 눈 위에 내려앉았다.

“그대들이 오늘 짐을 수행기로 한 사신인가! 남사스러운 모습이긴 하지만, 이 나의 심미안에도 들어차는 모습이 매우 만족스럽구나. 좋다, 짐의 곁에 머무르는 것을 허하노라!”

남자는 경이로웠다……. 희고 푸른 설원을 순식간에 황량한 사막으로 바꾸어 버리는 재주가 있었다.

“오늘 종일 짐의 사냥 시중을 들어야 할 것이다. 영광으로 알고 받잡도록 해라, 바다의 인어와 숲의 요정이여!”

로보와 나는 그제야 어째서 사람들이 길을 비킨 채 시선을 땅이나 하늘에 고정했는지 깨닫고 말았다.

로보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나도 도주를 재촉하듯 로보의 어깨를 꾹 움켜쥐었다. 나를 안은 그의 팔 힘이 깊었다.

그렇지만 발을 빼기에는 깨달음을 얻은 시점이 너무 늦었다. 웃통을 벗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치한이 따로 없었다.

“이 누트 멤피스의 용안을 배알하다니, 짐의 수려함을 똑똑히 새기도록!”

나는 목덜미가 당겨 그만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로보도 나도 어째서 말룸이, 그리고 조금 전 만났던 마부가 누트 멤피스를 그토록 골치 아파 했는지 알게 되었다. 판도라의 상자와 다름없었다. 몰랐다면 더 나았을 법하다는 의미였다.

그자는 서슬 퍼런 겨울의 바람 앞에서도 굽히지 않은 채 당당했다. 팔짱을 낀 채 건장한 상체를 가림 없이 드러낸 것이 오만한 성미와 잘 어울렸다.

누트 멤피스는 구릿빛의 매끄러운 피부를 타고난 건장한 사내였다. 그는 크로노와 맞먹을 정도로 체격이 좋았는데, 옹골찬 근육이 그의 오만과 권위를 지탱했다.

살갗이 훤히 드러난 상체 위로 황금과 청금석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와 장신구가 찬란하게 드리워졌다. 밤의 숲을 닮은 검정 머리칼도 새하얀 삼림 가운데 무척 눈에 띄었다.

“짐을 관찰하고 있는가. 재미있는 일이군.”

나는 찔끔하는 바람에 시선을 급히 거두었다. 그러나 누트 멤피스의 푸른 눈동자가 그가 하고 있는 보석인 양 우주처럼 반짝거려 다시금 시선이 끌려들어갔다.

왕의 푸른 눈동자 속에는 바다와 황금이 공존하고 있었다. 누트 멤피스가 시야를 달리 할 때마다 샛노란 은하수가 노란 광채를 발했다. 눈동자 색이 저렇게 극명히 대비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감정사가 되어 누트 멤피스의 눈을 관찰했다.

눈동자뿐만이 아니라 들녘의 늑대를 닮은 또렷한 이목구비도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든 저 사내더러 오만하리만치 잘 생겼다는 말을 물릴 수 없을 듯했다. 그야말로 왕이라는 직함에 어울리는 화려한 남자였다.

하지만 한겨울에 웃통을 벗은 사내를 우리는 정상이라 말하진 않는다.

게다가 누트 멤피스의 머리 위에는 청금석으로 만든 고양이 귀 장식까지 비죽 솟아 있었다. 사람 귀가 있을 부분은 지구의 헤드셋과 비슷한 장치로 가려 두었는데, 수인족 따라 하기를 좋아하는 별종처럼 느껴졌다. 진짜 수인족인 카사블랑카가 보면 악을 쓸 법한 차림새였다.

누트 멤피스가 우리 가까이 멈추어 섰다. 그는 춥지도 않은지 그 흔한 잔 떨림 하나 없었다.

흘끗 바라본 로보의 얼굴에 시퍼렇게 녹이 슬었다. 나는 당장 말룸을 호출해야 할지 아니면 조금 더 버텨 보아야 할지 생존 시나리오를 가늠했다.

잘못 걸렸다.

우리 머리 위로 같은 생각을 담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일확천금의 꿈이 유아독존에게서 살아남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왕은 추위 속에서도 불타오르는 듯했다.

허벅다리를 덮은 흰 천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원무를 추었다. 짧게 잘라 틈 없이 정돈한 검은 머리칼이 매서운 바람에 구불거렸다.

누트 멤피스는 움츠러들거나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왕이 있는 곳이야말로 뜨거운 사막이었다. 그는 주변 환경에 구애받지 않았다.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퍼레이드였다. 누트 멤피스가 당황한 사람들을 죽 훑었다.

몸짓이 학처럼 우아하고 곧았다. 세상 사람들을 모두 개미로 간주하고 본인만을 인간으로 치는 자신만만함의 전형이었다.

나는 저런 부류를 대개 머저리로 규정했다. 과시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별 볼 일 없는 자들이 보통 저런 행동을 했다. 그것이 내가 지구에서 배운 일반적인 통념이었다.

“어찌 짐에게 고개를 조아리지 않는가, 사절들이여! 아하, 이해한다. 짐의 광채가 태양과도 같아 눈이 부신 것이로군.”

누트 멤피스에게는 닿지 않을 손톱만 한 목소리로 로보가 중얼거렸다.

“제대로 돌았어.”

나는 로보의 품에 파고드는 것으로 동조했다. 겨울바람이 살갗을 아릿하게 찔렀다. 두터운 망토와 따뜻한 목도리가 육신의 일부가 되었으면 했다.

로보가 잰걸음으로 군중에 합류하려 했다. 그의 발걸음은 심해 괴물을 마주친 듯 극도로 조심스럽고 은밀했다.

누트 멤피스는 우리가 도망가도록 두었다. 그러나 청색 깊은 눈동자가 눈 위로 흐트러지는 인어의 발자국을 집요하게 쫓았다.

우리는 송충이가 어깨에 앉은 것처럼 숨을 죽였다. 저자는 마주 짖어서 떨쳐낼 수 없는 부류였다.

누트 멤피스는 분명 방울뱀을 상대하듯 고되고 위험한 삶을 거치며 그만의 신념을 쌓아 올렸을 것이다. 그런 자의 속을 바꾸는 일에 시간을 쏟기보단 옷자락이나 만지작거리는 편이 더 생산적이었다.

왕이 팔짱을 낀 채 수컷 공작처럼 자신의 찬란한 육신과 그럴싸한 직함을 알음알음 펼쳐내었다. 우리는 그의 몸짓에서 당당함을 읽었지만 섬기지는 않았다.

“짐을 추앙하지 않은 죄, 추궁해야 마땅하나 능히 이해하는 것 또한 왕의 덕목. 추위에 떠는 가여운 백성이 곤욕을 치르게 할 정도로 이 누트 멤피스는 잔혹하지 않다.”

누트 멤피스가 사방에 모래라도 뿌릴 것처럼 한껏 가슴을 내밀고 선언했다.

주변 여자들이 눈을 삭 가리고 저 대단한 가슴 좀 보라, 어머 별종이다, 숙덕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손가락 틈새가 실낱만큼 벌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곳 영지민에게는 누트 멤피스야말로 황금 사냥의 또 다른 볼거리였다.

로보와 나는 말룸이 어서 단상에 오르길 기원했다. 아니면 차라리 눈이라도 함빡 내려 저자의 몸 위에 쌓였으면 하고 바랐다.

로보가 인파를 뚫고 관중석으로 바짝 다가가 크로노를 장난 반 진담 반 노려보았다. 황자는 제 나이대의 청년처럼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저물듯 말 듯 한 웃음만 자아내었다.

“육지 황자, 알고 있었지? 미리 말해주면 좋았잖아.”

“그가 미치광이라고 생각하시오?”

크로노가 매끄럽게 문장을 만들었다. 그가 말을 늘이는 것이 고의적인 것은 아닐지 하는 의심이 머리를 치켜들 때가 있었다.

“아니, 저자는 진짜 왕이오. 저자야말로 세계를 좌지우지할 자, 사막으로부터 시작해 세계를 빚어낼 왕인 것이지.”

나는 로보의 안색을 살피며 은근슬쩍 질문했다.

“누트 멤피스의 미래를 본 건가요?”

“사람의 앞날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저자처럼 확고한 성공을 영원토록 담고만 싶소.”

뜻밖의 호평이었다. 크로노의 은백색 눈이 생기를 품고 활개 쳤다. 겨우내 얼었던 호수가 봄을 만나 물살이 도는 것 같았다.

“그는 이 불탄 세계에서조차 경건하며 완전하오……. 뿌리까지 망가진 세계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틔워낸 최후의 완벽이지. 어떤 운명도 누트 멤피스의 번영을 막을 수 없소. 이상스레 보이지만, 사막왕보다 뛰어난 인간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오.”

그가 관중석을 뛰쳐나갈 듯 흥분했다. 크로노는 말을 달릴 때조차 연못 깊은 곳에 수장된 듯했는데, 지금만큼은 불씨를 만난 장작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 하지만 딱 한 명, 나의 첫째 형님만큼은 저자와 맞불을 놓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나신데…… 그 영혼에 아주 커다란 구멍이 있으시어…….”

크로노는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우리를 바라보지 않았다. 세계의 운명을 읽는 황자는 자신이 발견한 이상적인 운명에 푹 빠져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오필리아 님……. 나는 축복받은 미래만을 틔워 보내는 그가 마음에 든 것도 모자라 동경하게 되어버렸소. 그는 모든 삿된 것들을 받아들여 제 것으로 만들어내는 재주를 가졌지……. 어떤 식으로든 오필리아 님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오.”

관중석을 가리고 선 너른 나뭇가지가 눈 결정을 아래로 쏟아냈다. 크로노의 머리칼 위로 눈이 층을 져 내렸다. 그의 볼이 불그스름하게 달떠 생기가 돌았다. 시체가 소생하는 듯했다.

“사막왕의 앞에는 어떤 그림자도, 가림막도 없으니, 부디 저자와 함께하시오. 기이한 것을 보는 시선을 거두고 왕의 천재성에, 자비로움에, 광기에 주목하시오…….”

로보의 낯이 침잠했다.

나는 크로노의 말이 이어질수록, 왕을 꿈꾸었으나 바다에서 추방당한 인어의 속이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크로노만이 눈바람에 들떠 자신이 쌓아 올린 토성 속에 푹 묻혔다. 나는 그만 이야기하라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찬란한 미래가 속을 편안히 매만지는 듯하오. 아아……. 말을 걸어보고 싶은데, 어쩌면 좋을지 감이 서질 않아 곤란하군. 모든 인간이 사막왕과 같다면 처참한 미래를 읽어 신음할 필요도 없을 텐데.”

크로노가 마침내 선고했다.

“로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오?”

“……그래, 그렇겠지, 육지 황자.”

인어는 사람 좋은 미소를 덧그렸지만 크로노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고선 몸을 돌렸다.

파경이었다.

그렇게밖엔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는 브라운관 밖의 힘없는 관중처럼 하나의 관계가 삐걱대는 상황에 가만히 떨었다.

크로노를 동생처럼 아끼며 정을 주던 로보는, 크로노에게 자신은 사실 왕이 되고 싶었노라 넌지시 이야기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크로노가 로보에게 어떤 답을 풀어 놓았는지 고민 없이 빈칸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가자, 지렁이 녀석이 올라왔어. 뭐라고 하는지 어디 들어나 보자고.”

크로노는 로보를 붙들지 않았다. 황자는 금빛 사막에 홀로 잠겨 경이로운 자연을 여행했다.

잠시, 당신에게도 할 말이 있소. 당신의 미래에도 왕의 형상이 보이오. 물그림자에 막혀 헛되고 잔상이 일렁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렇소. 거짓이라 생각하시오? 맞소, 거짓말이오. 어쨌든 간에 그렇긴 하오. 왕이 될 가능성이 하루에 태양이 두 번 뜨고 질 만큼은 있는 것이오.

이런 몇 문장이면 되었을 것이다. 로보는 유령처럼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크로노는 기어이 로보의 감정을 살피지 않았다. 그는 로보가 그에게 건네던 호의를 눈치채지도 못했고 속에 품을 생각도 없었다.

한편, 누트 멤피스는 그 나름대로의 퍼레이드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로보와 크로노 사이의 균열을 뒤로하고 왕에게 주목했다.

설원 가운데 영봉처럼 우뚝 선 누트 멤피스의 뒤로 수행원 셋이 따라붙었다. 수행원들은 누트 멤피스와는 달리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흰 천에 솜을 누벼 두껍게 방한복을 차려입었다.

누트 멤피스가 그들의 공을 치하하며 웃었다. 나무에 맺힌 눈이 다 떨어질 만큼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여자는 모시다시피 떠받치고 있던 세 발 달린 까마귀를, 남자는 기다란 황금 왕홀을, 카사블랑카만큼 작은 소년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직사각형 물건을 누트 멤피스에게 건네주었다.

사막왕이 한쪽 눈이 먼 듯한 까마귀를 어깨에 얹고, 왕홀은 오른손에 짊어지며, 직사각형 물건은 왼손에 들고 과시하듯 치켜들었다.

그것은 즉위식이었다.

로보가 까마귀를 주시하는 듯했지만, 나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누트 멤피스의 손에 들린 직사각형 물건…….

“말도 안 돼. 스마트폰이잖아.”

나는 크로노가 발음한 저자의 천재성을 통감했다. 가슴이 크게 박동했다.

“지렁이 녀석 좀 봐. 인간 행세는 천하제일인 것 같아. 오필리아, 손을 흔드는데. 인사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로보의 말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렇지, 말룸에게 인사를. 그리고 로보가 더는 속이 상하지 않도록 대꾸를 해주어야 하는데…….

나는 벼랑에서 떨어진 것처럼 놀라고 벅차 작은 기계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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