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73화
말룸은 나와 동행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축제 개막의 연설과 폐막 때의 시상식을 위해 상석에 있어야만 했다.
말룸은 검은 양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채였는데, 나를 두고 먼저 출발하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자꾸만 신신당부했다.
“오필리아. 누트 멤피스와는 말도 섞지 말아요. 아무리 그래도 일을 했어야…… 아니지. 당신과의 시간을 방해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룸은 누트 멤피스와 관련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다. 그는 지난 며칠 내내 나와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일처리를 제때 하지 못했는데, 그 탓에 비공정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해 차악을 선택해야 했다.
거대한 비공정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한적하고, 축제와 가까워졌음에도 쉬고 있는 땅.
그런 땅은 티포주 성 내 남아도는 부지뿐이었다.
말룸이 수를 놓듯 세심하게 채비를 도왔다. 두터운 코트를 여미게 하고, 모자며 망토며 탑을 쌓듯이 내 위로 눌러 덮었다. 더운 열기가 곳곳에 훅 끼쳤다.
“말룸, 저 숨도 못 쉴 정도로 답답한데요…….”
“참아줘요. 겨울 바다에도 빠졌었잖아요. 분명 몸에 무리가 갔을 겁니다.”
말룸은 완강했다. 그러고는 바다에 빠져 놓고 감기에 걸리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목도리 두르는 일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새끼 병아리를 챙기는 어미 닭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1층 로비, 거대한 현관문에 기대어 서 있던 로보가 비뚤게 웃었다. 말룸은 그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말룸이 살짝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 발끝이 꼼질거렸다.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절대 걸으려고 하지 말고, 싫은 일이 있다면 딸려 보내는 사용인이나 붕어에게 명령해요. 견디기 힘들어지거나 돌아가고 싶으면 저를 찾고요. 귀빈석에 있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로보와 함께 있는 데다 이젠 새총도 백발백중이니까요.”
보란 듯이 새총을 흔들었다. 흰 바탕에 덩굴처럼 몸체를 휘감은 황금 장식이 새총이라기엔 무안하리만치 화려했다.
말룸은 한순간에 그렇게까지 실력이 늘 수가 있냐며 아리송해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속절없이 떠오르는 기억에 잠겨들었다.
며칠 전, 연무장. 우리는 훈련장의 하얀 담벼락이 황혼으로 채색될 때까지 흙바닥을 누볐었다. 물감 든 탄환이 과녁의 중앙을 꿰찼다.
‘엘프는 활을 잘 다루지.’
카사블랑카가 깨진 거울을 보듯 텁텁한 낯빛으로 문장을 덧붙였다.
그때 엘로힘은 멀거니 연무장의 과녁만 손질했다. 성에 있는 물품은 모두 말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을 텐데도 그는 무언가를 닦아내듯 자꾸만 붉은 판을 덧그렸다.
엘로힘은 그날 이후 나와 말룸을 마주 보지 않고 있었다.
“오필리아. 듣고 있나요?”
말룸이 내 상념을 깨트렸다.
“누트 멤피스가 황금을 독식하려 하거든 호출하세요. 대공비의 참가는 보여주기 식이고, 또 당신 몫의 금화가 따로 마련되었다는 것도 미리 공지해 두었지만…….”
개막식에 늦겠다며 보좌가 발을 옴찔거렸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아이라도 있는 양 애타는 몸짓이었다. 말룸은 개미 재롱을 보듯 그의 호소를 무시로 일관했다.
말룸이 또 여럿 당부했다.
추우면 챙겨 준 손난로를 사용할 것, 귀족이든 평민이든 무례를 범하는 자가 있다면 강하게 대응할 것, 기죽지 말 것, 제멋대로 행동할 것. 그리고 곧장 찬양했다. 당신은 하늘 높이 뜬 해처럼 아름다워요. 내 축축한 비늘마저 당신과 닿으면 따뜻한 모양으로 바싹 말라버리죠…….
내가 마냥 웃자 말룸은 타깃을 전환했다.
“붕어. 물비린내 풍기는 건 풍기는 거고, 절대 그자와 오필리아가 마주치게 해선 안 된다. ……아니, 불가능하겠군. 차라리 세 마디 이상 말을 나누게 하지 마.”
아랫사람 대하듯 로보에게 주의를 주는 작태가 뻔뻔하면서도 다급했다. 로보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대신 그는 오늘 내가 엄청난 명마 한 마리를 얻은 거라며 태연하게 장난을 걸었다.
“내 말 듣고 있는 건가? 허투루 듣지 마라! 아내 곁에 인어를 놓아두는 것도 화가 치솟아 미칠 것 같은데…….”
말룸의 잔소리는 물러갈 기미가 없었다. 로보가 질린 얼굴로 투덜거렸다.
“왜 그렇게 사막 손님을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 주차 건으로 귀찮게 한 거 말고 또 뭘 저질렀어?”
말룸이 로보를 번개처럼 노려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내동댕이칠 것 같은 형형함이 있었다.
“이유 없이 싫어할 수도 있잖나. 무엇보다도 바람둥이란 소문이 자자하단 말이다. 그런 주제에 미혼이니까.”
“아하, 과연. 그러셨구만.”
속내를 캐어낸 로보가 샐쭉하니 웃었다.
나는 말룸과 로보 사이를 중재하는 대신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털실 깊이 파묻었다. 전에는 곤란하기만 했는데, 아무래도 내 눈이 말룸이라면 최상의 선물이라 인식한 탓인지 질투마저도 기꺼웠다.
“못 미덥군. 너, 크로노. 네가 추가로 따라붙어서 잘 살피도록 해라.”
크로노는 한편에 물러서서 저택 수집품처럼 동떨어져 있었는데, 말룸의 목소리에 억지로 우리에게 편입되었다.
“나는 왜 끌어들이시오? 원하지 않소……. 이번 축제는 내게 어떤 방향으로든 독이 될 것이오…….”
“집주인 맘이다, 잠자코 따라.”
말룸은 가지 않겠다는 크로노를 기어코 우리와 동행하게끔 했다.
크로노는 먹이를 빼앗긴 독수리처럼 날 선 몸짓을 했지만 말룸은 신경 쓰지 않았다. 크로노도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고 미완성 공예품을 완성해야 한다는 둥 추운 날 나가기 싫다는 둥 몸을 비틀어 호소했지만, 다시 유폐되고 싶으냐는 협박성 발언에 얼굴을 찌푸렸다.
“다시 사육장에 갇히고 싶은 동물이 어디 있소……. 잔인한 사람이오, 숙부는.”
“애처럼 굴지 마라, 크로노. 약속과 행동이 다른데도 내가 많이 참아주고 있단 걸 알아야 해.”
“난 약속을 어긴 적 없소. 그리고 숙부가 관대하게 행동하는 것은 믿는 구석이 생겨서잖소. 오필리아 님이 숙부를 틈 없이 사랑하고 계시니 여유가 생겼을 뿐, 자비를 베풀고자 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소…….”
크로노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아직 미숙한 셈인데……. 내 나이가 스물하나라는 것을 잊으셨소?”
그 말에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다. 전부 저치가 스물하나밖에 되질 않았다고, 말세군, 하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스물하나를 아이라 칭하진 않았다. 아무리 덜 자란 스물하나라도 아이라기에는 어딘지 요상스러운 구석을 간직하고 있었다.
“잔말 말고 어서 출발하도록.”
말룸이 벌레를 내쫓듯 크로노의 채비를 독촉했다.
크로노는 말룸도, 로보도 바라보지 않았다. 아직도 결심이 서질 않는지 자세가 구부정했다. 머뭇거리던 크로노가 슬쩍 거리를 좁혀 내 곁을 꿰찼다.
“오필리아 님. 나는 정말, 원치 않소……. 오필리아 님의 개선을 축복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덩치 큰 사내가 금방이라도 터널을 지나 사라질 것처럼 흐리게 호흡했다. 무엇을 원하는지 노골적이었다. 나는 풀 죽은 그의 머리칼을 잠자코 쓸어주었다. 크로노가 내 손에 자신의 볼을 마주 대었다.
“가끔 바람 쐬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그렇긴 하지만, 오필리아 님. 나는 관중석에 있을 텐데 양옆으로 사람 부대끼는 걸 생각하면 토기가 치밀어서…….”
사내가 내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다 큰 호랑이가 엄마 찾는 아이를 모방하는 듯했다.
날렵히 올라가 있어 신비로운 매력을 품은 눈매가 애상적으로 문드러졌다.
“사람이 죽는 장면을 보는 건 항상 탐탁잖아 두 눈을 파내어 버리고만 싶소.”
나는 그가 꺼낸 말에 숨을 멈추었다. 크로노가 외출을 꺼리는 근본적인 원인을 잊고 있었다.
“말룸…… 크로노가 고통스러워할 거예요. 사람 죽는 걸 계속 봐야 한다니 그런 끔찍한 일이 어디 있어요?”
나는 크로노의 옷소매를 쥐고 애원하듯 말룸을 보았다. 그러나 말룸은 단호해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고집쟁이.”
이렇게 이야기하니 그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도 아예 못 들은 체했다.
“그 이상 아내에게 달라붙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출발하지 않고 뭘 하는 거지, 크로노?”
인내심이 끝장난 말룸이 거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크로노는 내 뒤로 숨는 시늉까지 했다. 한 편의 촌극을 견디다 못한 보좌관이 뒷걸음질을 쳤다. 크로노에게는 눈가를 가릴 수 있도록 마차 안의 쿠션이라도 꺼내 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로보는 달만큼 커다란 비공정을 타고 땅에 내린다는 사막왕에게 지대한 호기심을 품었다. 마차 안에서도 종일 그 이야기뿐이었다.
나는 마카롱을 몇 집어 먹었다. 아침에 이은 설탕의 폭력이었다. 속에 든 크림 덕에 배 속이 든든했다. 왼손 약지의 금빛 반지를 괜히 이리저리 매만지길 수 분째였다.
사막의 왕이 어떤 자인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사람 자체보다는 비공정이란 것이 정신을 사로잡았다. 누트 멤피스에게 향하는 관심은 딱 그 정도에서 그쳤다.
손바닥만 한 새총에 체온이 붙어 뜨뜻미지근했다. 대회에 긴장한 심약한 심장이 둥둥둥 북을 울렸다. 다들 사막왕 생각으로 여념이 없어 보였는데, 나는 대회 걱정만 부상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게다가 말룸과 결혼한 이후 처음 나서는 공식 석상이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어쨌든 배를 모는 거잖아. 그자도 일종의 선장인 셈이지.”
선장 자리에 있는 녀석들은 대체로 품성이 비슷비슷하다고 로보가 맑게 웃었다. 일단 배를 돌보기 위해 규율이 잘 잡힌 천성을 타고난다, 그리고 사람 부리는 걸 어색해하지도 않는다 했다. 그러나 바람길 하나 터놓고 이쪽이 막히면 그길로 곧장 달아나는 미끈미끈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크로노가 마카롱을 먹여줄 것을 종용했다. 나는 기꺼이 초코 마카롱을 하나 집어다 주었다. 크로노는 마카롱을 우물대느라 뭉개진 발음으로 쏘아붙였다.
“자기소개는 되었소.”
“자기소개라니! 성에 머무르게 될 수도 있다잖아. 게다가 그 불탄 땅의 주인이라니 관심이 가지 않아?”
“그를 만나면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소……. 불쾌감이 치밀 만큼. 그래서 일부러 가지 않으려 했는데, 운명이란……. 모래가 좋다면 백사장 모래나 가지고 노는 것이 어떻소? 그 편이 당신에게 더 이로울 것이오.”
“백사장 모래로 뭘 이룰 수 있겠어? 육지 황자는 꿈과 희망이 없네. 수정궁에 놓고 온 거지?”
크로노가 로보에게서 홱 고개를 돌리고 창밖 구경을 시작했다. 로보는 호소 대상을 나로 바꾸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오필리아. 난 그 왕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궁금하긴 하지만, 저 지금 대회 때문에 엄청 긴장했거든요. 마차 멀미까지 할 지경이에요.”
아닌 게 아니라 속이 꽉 차 음식물을 밀어 넣을 수가 없었다. 단 음식을 먹는 것이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법이었는데도 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다들 꿈꾸면서 살았으면 좋겠는데.”
로보는 동조를 얻지 못하자 마차 등받이에 폭삭 몸을 붙였다.
“오필리아는 힘들어 보이니까, 육지 황자가 내 말상대가 되어줘야 해.”
로보가 크로노의 어깨에 팔을 둘러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크로노는 발목에 지네라도 붙은 양 질겁하며 내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붙지 마시오! 멀미를 심하게 하는 편이란 말이오.”
“뭐? 갑자기 발병한 건 아니고?”
“거짓말 하지 않았소. 나도 탈것 멀미가 있다는 걸 숙부 댁에 오면서 처음 알았소……. 평생 갇혀 살았으니까.”
크로노의 낱말 하나하나에 송곳이 숨겨져 있었다. 그가 유폐 시절까지 운운하자 로보도 더는 채근하지 못했다. 둘 사이의 온도 차이가 컸다. 그래도 크로노가 나를 제외하고 편히 대하는 상대는 로보뿐이었다.
“하여튼 그자가 왕이란 말이지.”
바다의 왕을 꿈꾸었던 인어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사람 손 하나 닿지 않은 오지로 향하는 건널목에 있는 듯싶었다.
왕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눈동자가 타오르는 불꽃처럼 반짝였다. 그 불꽃은 어떤 단단한 보석이라도 걸림 없이 녹여낼 만큼 뜨거웠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아닌 척 듣고 있던 마부가 학을 떼었다.
“어휴, 왕은 무슨요. 차라리 나리들께서 귀족이 아니란 말이 더 신빙성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