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70화
「잿더미」
살아가는 것도, 라딘라티와 맞서는 것도, 말룸도, 조슈아 님 당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지만 괜찮지는 않아요. 주저앉고 싶은 걸 아슬아슬하게 버텨 내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조슈아 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화풀이해도 된다는 건 아니죠. 이 점을 확실히 하려고 따로 보자고 한 거예요.”
새벽녘을 닮아 희미하게 아름다운 여자가 매섭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말룸을 자극하는 것도 그만둬 주세요. 이번 대화도 알지 못하고 있으니까 비밀로 해주시고요. 지금 그 사람, 집무실에서 철야하는데 틈을 봐서 잠깐 나온 거니까…….”
그러나 조슈아는 의문을 품었다. 그자가 이 대화를 모르고 있다고?
말룸 발타사르가 얼마나 교활한지, 얼마나 당신을 통제해 자신의 뜰 안에 가두고 싶어 하는지 당신이야말로 모르고 있습니다. 안다 해도 일부분이겠죠. 그자는 사랑을 자기 맘대로 재단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악마입니다…….
달이 높이 떴을 때 여자가 어둔 미로를 등지고 선언했다. 기세가 낫과 같은 예기를 둘렀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같은 적을 두었잖아요. 저는 살고 싶고, 조슈아 님도 살아가고 싶으신 거잖아요.”
차디찬 겨울바람이 목소리를 앗아간 듯했다. 조슈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게 제일 어렵네요. 그렇죠? 죽은 듯 견디지 않으면서, 제대로 사는 거.”
조슈아는 살아가고 싶은 것이냐는 물음에 차마 그렇다 답하지 못했다.
이름 모를 여자와 그는 라딘라티로 인해 인생이 애매모호해졌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그러나 여자는 몸부림치면서도 삶을 버리지 않았고, 조슈아는 불기둥이 가족을 삼키던 그날 마음까지 불타 재가 되었다. 그것은 지구와 요르나스 사이의 거리나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크레바스의 깊이만큼 커다란 간극이었다.
대공비가 훌쩍 떠났다. 미로는 뱀의 주술을 통해 사시사철 따스했지만 조슈아는 속이 시렸다.
동생의 몸이라 했나. 조슈아는 그자의 뒷모습에서 엘로힘을 엿봤다.
단순히 육신이 닮아 엘로힘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저자는 뭉개져 있으면서도 완전히 뭉개지지는 않았다. 미숙하면서 완전히 미숙하지도 않았다. 그 점이 기이했다. 조슈아는 여자의 초상에서 일말의 동경을, 나머지 부분에서는 열등감을 느꼈다.
캄캄한 밤을 걷는 오필리아의 모습이 희끄무레해졌다. 조슈아는 상대가 달빛에 녹아들어 영영 사라질 것만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이내 그는 오필리아가 본래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친애는 아니다. 작은 호기심이었다.
아름답고 강한 것은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불길 속으로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가여운 사람……. 마모되지 않은 것에는 마모되는 결말만이 남아 있었다. 신관은 집 없는 자, 숨 고를 휴식처 잃은 자를 대하듯 딱 그만큼의 동정심을 품었다.
화풀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조슈아는 오필리아가 괴물을 배신함으로써 그에게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저들 족속으로 인해 느꼈던 고통만큼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만큼만.
조슈아가 미로 안으로 한 발자국씩 잠겨들었다.
이 미로는 남모를 기대감의 일부였던 여자가 만들었다. 양 옆으로 엘프의 유산이 그를 따라붙어 우악스럽게 입을 벌렸다.
조슈아가 알기로 엘로힘은 조각하는 취미가 있다고 했다. 그가 만든 조각들은 아마도 산양, 혹은 엘프들의 왕성이 위치해 있었다는 엘드라코의 아르카디아, 그것조차 아니라면 신단수처럼 보였다. 그러나 조슈아는 밤눈이 어두워 조각에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타인을 판단하는 것도 대체로 비슷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완벽히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 사람을 두고 보아도 이 사람에겐 퉁명스럽고 저 사람에겐 봄볕 같기 마련이었다.
결국 프리즘 같은 족속들이다. 누군가 죽어 흙이든 물이든 몸뚱이를 가라앉히고 나서야 개미들의 해석이 시작되었다. 근면한 사람, 잔인한 사람, 불쌍한 사람, 쾌활한 사람. 저마다의 꼬리표가 불 떠난 육신의 발목에 가격표처럼 매이는 것이다…….
축축한 색깔의 이끼가 검푸른 벽을 휘감았다. 돌을 쌓아 만든 미로는 일관적이지 않고 울룩불룩했으나 밤중 길을 내어 끝없이 몸집을 불리는 듯했다.
조금 전 오필리아는 목발을 단단히 짚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이 미로는 끝이 매듭지어져 있지 않아요. 말룸의 주술을 빌려 끝을 자각하지 못하면 사람이 영영 헤매도록 설계했거든요.’
그때 비로소 조슈아는 오필리아가 한참도 전에 정상을 잃어버렸다고 확신했다.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이 밤의 가장자리로 사라졌다.
당신은 이곳에 무엇을 가두고 싶었습니까?
오괴한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오필리아 님.
당신은 괴한에게 살해당했다고 했지만 제가 보았을 때 당신을 죽인 건 라딘라티입니다. 당신은 이용당한다는 자각과 함께 살아가는 듯한데, 그럼에도 어떻게 몸과 정신을 함부로 하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신관 살인 사건을 조사하다가도 기이한 여자가 불쑥 생각이 나곤 했다. 살아갈 수 없는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왔으니 살갗을 감싼 중심축도 남아 있지 않을 테고 시간조차 메말랐다. 부러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자에게 허락된 시간은 곧 끝날 것이다.
단지 연명하고 있을 뿐이면서 그럼에도 살고자 하다니.
조슈아는 그 발버둥에서 삶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신관은 수참히 여자를 찬미했다.
모두 같을 수는 없었다.
내겐 이 신관복이 잘 어울리지만, 오필리아 님, 당신에겐 영 우스꽝스러울 듯도 한 것처럼요…….
그는 오필리아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조슈아는 과거 어느 때 거대한 전갈과 마주쳤었다.
독 있는 꼬리가 지면을 내리찍자 지층이 갈라지며 행성의 뜨거운 속이 드러났다. 번영을 구가하던 책의 도시가 순식간에 지저로 추락했다.
전갈이 닥치는 대로 인간을 쥐어뜯었다. 커다란 집게발로 두 동강, 세 동강, 다섯 동강을 내었다.
조슈아는 그때, 이곳저곳 휘젓고 돌아다니길 좋아했던 일곱 살. 울창한 숲에 잠겨 바람과 노닐다 핏물 내를 맡았을 때에는, 전갈이 ‘할당량을 다 채웠다! 너는 살려주도록 하마, 꼬마야!’ 하고 매서운 웃음을 뱉어낸 후였다.
마을의 가라앉지 않은 부분은 불타올랐다. 앞집이며 학교며 상점가 할 것 없이 재가 되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조슈아는 자신의 심장이 재와 함께 쓸려갔음을 새로 깨달았다. 심장 대신 삼을 것을 세워 놓기도 요원한 것이 그는 이미 장성한 후였다.
그렇게 조슈아는 숭숭 비어버렸다.
천 개의 조각 퍼즐 중 하나만 사라져도 작품은 완성되지 못했다. 라딘라티는 조각을 훔쳐 달아나는 도둑이었다. 엘로힘, 렉스, 카사블랑카, 포인세티아……. 그자가 훼방 놓은 명작의 수가 몇 개인지 조슈아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퍼즐 조각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은 이자도 매한가지였다.
“이곳은 항상 따뜻하오. 그렇지 않소, 신관님…….”
조슈아는 불현듯 술병을 입에 물고 싶어졌다. 용화주(龍華酒), 육체에 꺼지지 않는 불길을 쏘아 붙이는 그 독한 포도주가 적당하겠다.
그들은 미로의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이 이상 진입하려 한다면 말룸의 주술이 그들을 가로막고선 미로의 초입으로 튕겨내겠지.
누가 제안했는지 모를 연못은 미로와 어울리지 않았다.
조슈아는 황자가 앉아 있는 돌담을 향해 걸었다. 신관이 휘청거렸지만 면적 좁은 담장 위에 앉은 황자는 실에 매달린 듯 굳건했다. 은백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유화처럼 선명했다. 조슈아는 황자와 처음 대면하는데다 예를 차려야 할 신분 위치에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크로노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어야 해요!’
파편 건으로 소리치던 오필리아의 모습이 잠시 떠올랐다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 여자는 그때, 지저 세계로 사라진 연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절규했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이 자가.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습니다, 황자 전하.”
“꿍꿍이라 할 것도 없소……. 파편을 가진 다른 존재를 보고 싶었을 뿐이지.”
“궁에 계실 때는 찾아오지 않으시고요? 하고자 결심하신다면 못 하실 리 없단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포이보스 레시우스, 그 인간 같지도 않은 황태자가 당신만큼은 퍽 아낀다지 않습니까.”
크로노가 작게 웃었다.
그는 로보에게 편식 건으로 챙김 받는 자라지 못한 황자도 아니었고, 오필리아에게 동정을 구하며 사랑을 애원하는 청년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불행한 예언자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미래의 열쇠를 쥔 자,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는 이스터 에그였다.
당신에게는 어디까지 보입니까?
오필리아 님의 곁에 있고자 하는 마음은 진실한 겁니까?
우리는 대체, 어디로 항해하고 있는 겁니까…….
채 언어가 되지 못한 물음이 맴돌았다. 고장 난 축음기가 낡은 다락을 뛰쳐나올 듯했다.
“제발, 답을 내려주십시오.”
그러자 크로노가 조용히 뇌까렸다.
“나는 오필리아 님을 사랑하고 있소.”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시는군요.”
“내 쓸모를 결정짓는 그 사람이 나는 무척이나 사랑스럽소. 우리 인간들은 쓸모 있게 살아야만 하니까. 하지만 요즘은 달이 차올라 앞이 잘 보이질 않지. 그것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고 있소…….”
“제 앞에 나타난 이유가 뭡니까? 시간낭비 할 틈 없습니다. 전하께 우호적이지도 않지요. 당신이 그자를 사랑하든 말든 저와는 관계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대는 보험이오, 신관님…….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타버려 재만 남은 사람. 아아, 참으로 가엽기도 하지. 타고 남은 재를 뭉쳐 쌓아도 그대가 되지는 못할 것이오.”
얼음을 등 뒤로 집어넣은 듯 소름끼치기 짝이 없는 작자다.
조슈아는 인상을 찌푸리곤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크로노를 거부하는 것은 일종의 본능이었다. 황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에 가까웠다.
“당신께서는 어떤 미래를 보고 계신 겁니까?”
조슈아가 거부감을 억누른 채 물었다. 크로노모르테는 잠시 고민하더니 잔잔히 일렁이는 연못의 수면을 응시했다.
“하나는 제대로 보이지 않고, 다른 하나는 완벽히 보인다오. 오필리아 님의 선택이 분기점이 될 테지. 하지만…… 완벽히 보이는 미래가 실현될 확률이 높지 않겠소.”
황자가 돌담에서 내려왔다. 조슈아는 자신보다 훨씬 큰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풀숲으로 치웠다.
그는 인간된 몸으로 감히 황자의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황자는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미래를 닮았다.
“충고하겠소. 일이 어떻게 되든 신관님께서는 파편을 모두 지니고 계셔야 하오…….”
“파편을 말입니까?”
“반드시.”
황자가 단언했다.
“그 말 하고 싶어서 부러 왔소. 잊지 마시오. 불편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함뿐이지만…….”
크로노모르테가 우뚝 솟은 검은 나무를 멀거니 보았다.
“오필리아 님께는 침묵하시오.”
명령하듯 덧붙인 말에 조슈아는 의문을 품었다.
“어째서입니까? 그 사람은 당신에게 파편에 대해 알려주어야 한다면서 쓸데없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그자가 당신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번민하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겁니까?”
크로노모르테는 왔던 길을 되짚어 걸음을 옮기며 묵묵히 답했다.
“나를 걱정하는 모습이 마음에 드니까.”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오필리아 님이 나로 인해 힘들어 하고 혼란스러워하길 바라오. 내 노잣돈이기 때문이오.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지. 설령 오필리아 님이라 해도…….”
그는 부스러져 썩어가는 낙엽처럼 미로 안으로 녹아들었다.
“그리고 당신의 신은 허상이오. 더 믿다가는 언젠가 목을 매달고 싶어지겠지. 비슷한 말을 이미 들었을 텐데, 부디 꼭꼭 새겨들으시오.”
예언자는 그 이상 조슈아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조슈아는 한동안 그가 지나간 자리를 노려보았다.
파편을 지니고 있으라는 충고는 일단 들을 것이다. 크로노모르테의 예지는, 그리고 그가 오필리아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어딘지 비틀리고 조각난 듯해도 진실한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신에 대한 모독은 묵과할 수가 없었다.
쪼개진 대지 위, 용암을 울컥 토해내는 황량한 땅. 동강난 부모의 시신을 짜 맞추듯 해 엉성하게나마 돌무덤을 쌓아올리고자 했을 때, 구원을 바라며 부모가 하던 대로 기도하고 있었을 때.
뜨거운 공기에 콜록대며 오열하는 자신의 위로 생수를 부어준 사람이 있었단 말이다.
‘그만 울어, 목 상한다. 늦어서 미안해, 내가 놈을 빨리 처치했어야 했는데…….’
카사블랑카가 와주었다. 그야말로 신의 사자가 아닌가.
당시 그는 완연한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붉게 변한 대지와 잘 어우러지는, 새빨간 장발과 늑대의 귀와 꼬리가 인상적인 스물 남짓 되어 보이는 사내.
이국적인 갈색 피부는 레시우스 토박이가 아님을 증명했지만 당시 조슈아는 그가 제 형제와 아버지처럼 느껴져 목을 놓아 울었다.
신전으로 가 파편을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때조차 카사블랑카를 만났을 때처럼 환희에 차진 못했다.
카사블랑카야말로 조슈아를 움직이게 하는 마지막 동력이었다. 오필리아가 미로 속에 보관하고 싶어 하는 무언가처럼, 자신을 포기하고서라도 지켜내야만 하는 최후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