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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69화 (69/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69화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의 영혼이 상위로 나오면 전력이 늘어나니 환영할 일이지만, 발타사르의 폭주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인정하긴 싫지만 놈은 통제가 불가능하거든. 보는 것만으로도 구더기를 먹은 것처럼 불쾌해서 길길이 날뛰게 되고 말아…….”

카사블랑카 주위로 주홍빛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부끼는 권능이 잿더미에서 되살아나는 불사조를 닮았다.

“나는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단 말이다……. 폐허가 된 마을 중앙, 피를 흘리며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한 나를, 쓸모없는 폐품 대하듯 보던 오만한 눈동자를.”

목소리 마디마디마다 칼날이 박혔다.

카사블랑카의 주위를 맴돌던 불꽃이 내게 옮겨 붙었다. 처음에는 살짝 놀라 몸을 움츠렸지만 그의 불꽃은 뜨겁지도, 이렇다 할 느낌이 있지도 않았다.

불꽃이 내 육신으로 스며들었다. 겨울바람에 차게 굳어 긴장으로 딱딱해졌던 심장이 난로와 연결되었다.

“따뜻해요……. 무척이나.”

“그런 치료니까. 그 감각을 잊으면 안 돼. 끝없이 불씨를 밀어 넣어야 한다.”

카사블랑카가 할 일이 끝났다는 양 물러섰다. 그의 시선이 먼 허공을 배회했다. 소년은 내 앞에 있었으면서도 나를 직시하지 않았다. 카사블랑카의 신경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이 지하에 라딘라티가…… 가만 두지 않겠다. 반드시 그놈에게 죽음을, 그게 여의치 않다면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을…….”

작은 소년의 살의가 가라앉아 응접실을 증오 밑바닥에 수장시켰다.

단순한 중얼거림이었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의 말을 묵과하지 못했다. 읊조림 하나하나에 카사블랑카의 사막이 들어 있었다.

풍요로운 대지를 닮은 갈색 피부가 분노로 달아올랐다. 그가 몸을 뉘였을 땅은 아주 오래 전 멸망해 재건하려 해도 재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오래 묵어 말라붙다시피 한 증오에 심상이 무거워졌다.

우리는 발타사르령의 복지를 위해 두 신관님을 초청한 것으로 입을 맞추었다. 그 덕에 신관님들은 제대로 된 손님 대접을 받으며 저택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평온하지 못했다. 카사블랑카는 말룸을 암살할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언성을 높이거나 경멸하는 기색을 거두지 않았는데, 말룸은 그에게 사과하기는커녕 당시 어렸던 카사블랑카의 무지를 화려하게 비아냥거렸다. 나는 반짇고리를 가져와 말룸의 입을 봉합해 버리고 싶었다.

희소식도 있었다. 카사블랑카의 처방이 효과가 있었는지 예전처럼 쓰러져 잠자리에 드는 일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덕분에 나는 말룸과 달콤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내가 어떨 때 기뻐하고 어떤 상황에서 겁을 집어먹는지 속속들이 알았다.

나는 혼란스러운 속을 정리하기 위해 미로 가꾸는 일에 집중했다. 마음가짐이 달라졌기 때문인지 잡풀이나 꽃보다는 몸을 마비시킬 수 있는 독초와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자랐다.

신관님들과 말룸은 언쟁하는 때가 늘었다. 주변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싸움은 주로 말룸의 개인 집무실에서 이루어졌다.

조슈아 님과 카사블랑카는 라딘라티의 사념체와 마주해 나를 이곳으로 불러온 진위를 추궁해야 한다고 했고, 말룸은 펄펄 뛰며 반대했다. 그 곁에서 나는 라딘라티의 위험성과 진실의 무게를 달아보며 정보를 정리했다.

어느 결정이든 쉬운 것이 없었다. 라딘라티를 직접적으로 마주한다면 내 안위가 위험했고, 반대로 지금처럼 곁가지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면 미로 속을 걸을 뿐 진전이 더딜 것이다. 라딘라티를 직접 대면해야 한다는 쪽과 라딘라티의 남은 수족들을 통해 조사해야 한다는 쪽이 팽팽히 맞섰다. 논쟁은 늘 답을 내리지 못하고 흐지부지해졌다.

나는 조슈아 님이 주장했던 대로 라딘라티를 만나보아야 하지 않을까 내심 곱씹었다. 그러나 말룸의 고집이 높은 벽처럼 견고하고 완강해 섣불리 운을 떼지 못했다.

오늘도 조슈아 님과 말다툼을 벌인 말룸이 짜증에 사무쳤다. 그가 서류철을 힘껏 쥐었다. 나는 말룸의 곁으로 다가가 간이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는 나를 바라본 이후에야 따스한 물에 잠긴 눈처럼 누그러졌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았으면 해요.”

“오필리아.”

말룸이 애써 미소 지었다. 그에게 작게 입을 맞추자 표정이 조금 더 나아졌다.

나는 이렇게 내게만 향하는 예외를 발견할 때마다 말룸이 안쓰러웠다. 그의 사막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나 하나뿐이라는 증거를 발견한 것만 같았다.

“뭐든 시도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라딘라티는 사념체의 형태로 봉인되어 있다고 했으니까…….”

“안 됩니다. 봉인이라고 해봐야 육신을 썩게 만든 후 움직일 수 없도록 해둔 게 전부예요. 지금 신성을 잃어 힘을 쓸 수 없는 상태라도 그자는 7할이 신인 괴물입니다. 그 꼴이 되고도 당신을 이 세계로 불러왔다고요.”

거절의 말이 단번에 떨어졌다. 그는 내가 깜짝 놀랄 만큼 깊은 거부감을 보였다.

“얌전하게 묶여 있는 것 같아도 언제 난동을 피워 봉인을 끊어낼지 알 수 없어요. 봉인이 효력을 발휘하는지조차 의문이군요. 그자는 진흙투성이 두꺼비와 같아서, 혐오스럽기만 할 뿐 형체를 간파할 수도, 속을 들여다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땅 밑 세계에서 몸을 꿈틀거리고 있을 거예요.”

말룸이 쥐고 있던 서류철까지 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라딘라티는 저나 아라크네, 모리구와는 확연히 달라요. 저희는 파편에 상처 입고 죽을 수도 있어요. 스콜피오가 그렇게 사냥 당했으니까……. 하지만 존재만으로 세계 수명을 연장한 자입니다. 우릴 상처 입힐 수 있는 파편도 그가 버린 7할의 신위에서 떨어져 나온 것에 불과해요. 그 조각은 라딘라티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를 상처 입힐 수도, 죽일 수도 없습니다.”

말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신전에 협력을 요청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혼자만으로는 감히 그를 끌어내릴 수 없었어요.”

말룸의 눈 밑에 검은 음영이 졌다.

“봉인하는 데 성공해 안심하고 있었지만, 제가 너무 간단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엘로힘이 지닌 장궁이 라딘라티에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지만, 그는 활의 주인이 아니라 시위를 당기지 못 하죠. 저는 그자를 처단하고 당신을 지켜야 합니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어요.”

말룸은 가시밭길 위를 맨발로 걸었다. 다리 상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라딘라티는 감히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최대한 그자를 마주하지 않고서 제거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말룸의 낯빛이 청동처럼 매서워졌고, 내 얼굴도 비슷한 수준으로 가라앉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졌다는 환상에 잠겨 있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말룸은 황금 사냥 축제 준비와 항구 무역의 활성화, 조슈아 님과의 말다툼으로 특유의 여유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말룸이 엄숙한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주의할게요. 제가 이러면 당신이 더욱 불안할 테죠.”

“아니에요. 항상 고마워요.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잘 알아요.”

말룸이 나를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나는 기꺼이 다른 의자로 몸을 옮겨 갔다. 그가 한결 풀어진 얼굴로 내 볼을 어루만졌다.

“그렇다면 옛 이야기를 들어도 저를 경멸하지 않을 거죠?”

“응? 갑작스럽긴 하지만, 물론이죠. 들어줄게요.”

말룸의 체온이 뜨겁게 날뛰었다. 그는 또 다시 분위기를 바뀌었다. 이번에 그는 해결할 수 없는 일에 골치를 앓는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어둠 속에 램프 하나만 빛나는 듯이 몽환적이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분위기조차 상황에 맞게 활용했다.

“칠백 년 쯤 전, 제가 처음 만들어지고 나서. 차례로 모리구가 만들어졌고 그다음 스콜피오가, 가장 마지막에 아라크네가 탄생했어요. 우리는 각자도생하며 생명을 희생하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옛이야기를 전해 듣는 기분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전에 한 번 얘기했듯이, 라딘라티는 3년 주기로 제물을 원하죠. 광증을 가라앉히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행복한 꼴을 도저히 못 보겠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라딘라티가 증오스러웠기 때문에 밀고의 형태로 제물을 바쳤고, 스콜피오는 애초부터 학살이 라딘라티를 따르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죽이고 다녔지요. 아라크네 역시 라딘라티에 대한 광신으로 젖어 있어 주저하지 않았고, 모리구는…… 소년의 형상을 한 까마귀인데, 지식욕에 젖어 연구할 줄만 알았지 특별히 라딘라티에게 명령을 하달 받지는 않았어요.”

말룸이 먼 과거를 헤아렸다.

“그 과정에서 렉스가 운영하던 수도원이 아라크네에 의해 통째로 묘지가 되었고, 카사블랑카의 수인족은 제 밀고로 인해 멸족했죠. 조슈아가 살던 마을은 스콜피오에게 희생당했어요. 그자들이 우리에게 어떤 정도의 증오를 품고 살아가는지는 관심 대상 밖입니다마는…… 속이 멀쩡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말룸이 요요히 미소 지었다.

“그렇지만 저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는 당신만 있으면 돼요, 이름 모를 분.”

그의 비인간성이 성큼 다가왔다. 나는 몸을 움츠렸다. 말룸이 제련해 품고 살던 사악이 눈에 훤히 보였다.

나는 그가 이제 와 자신의 죄를 털어 놓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말룸은 내가 모든 것을 전해 듣고도 그를 내치지 못할 것을 이제 똑똑히 알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오필리아. 나처럼 엉망인 사람이 당신을 사랑해서.”

카사블랑카가 듣는다면 간장이 끊어질 듯이 분노할 이기적인 고백이었다. 그러나 눈물이 살을 비집고 나올 만큼 속이 아픈 이유는,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말룸의 시원한 체향이 가깝게 끼쳤다. 그가 호소하듯 검지로 내 볼을 덧그렸다. 요람에 잠긴 아이를 어르는 듯했다.

교활함과 사랑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나는 땅굴 속으로 점점 끌려들어갔다.

말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연명한 세월만큼 치밀했다. 그는 내가 자신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덫처럼 늘어놓아 비참했던 과거를 빌미로 내 동정을 구했다. 나는 몸에 붙은 불이 크게 번질 것을 알면서도 말룸이라는 기름을 끼얹을 수밖에 없었다.

“떠나지 않을 테니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평소에는 당당한 사람이 저랑 관련되면 꼭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지더라.”

“사랑하니까요. 다른 것들은 대체품을 찾거나 복원할 수 있지만, 당신은 한 번 잃으면 다시는 품에 안을 수 없잖아요.”

그는 내게 깊이 엉겨 사랑을 되풀이했다. 나는 그런 말룸이 안쓰러우면서도 이 남자를 완벽히 정의할 수가 없었다.

말룸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까? 그가 하는 사랑은 맹목적이고 애절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이했다.

말룸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렇지만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날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나 봐줘요, 여보. 사랑해줘요. 그런 냉정한 표정은 싫어요. 응?”

말룸이 내 품을 하염없이 파고들었다. 흠결 없는 흑단 같은 사람이 항상 내 앞에만 서면 시든 갈대처럼 되었다. 그의 영혼이 정말 시든 것인지 아니면 연민과 사랑을 위해 그러는 척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했다.

나는 말룸이 안정될 때까지 그에게 체온을 주었다. 인간의 피를 수혈하는 행동이었다.

조슈아 님을 만나 말룸을 자극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말룸이 날 옭아매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다 해도, 안 그래도 예민한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아 걱정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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