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67화
좀 뻔뻔하긴 하지만 귀여운 사람이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음, 알겠어요. ‘똑똑한’이라는 형용사도 추가할게요. 그런데 당신 비리 저지른 거 있진 않죠? 부패 정치인은 딱 질색인데.”
“왜 없겠어요? 황제 동생 직함 달고 있는 것부터가 당신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일 텐데. 저는 요즘 관리에게 뒷돈을 먹여 평민들의 사업이 제제당하지 않게끔 뒤를 봐주고 있습니다. 순전히 돈이 되기 때문이죠.”
그가 비뚜름한 태도로 이불을 치웠다.
“부패 정치인이라 미안하군요.”
“하나도 안 미안하면서.”
“당연히, 안 미안합니다.”
말룸이 재미있다는 듯 턱을 괴었다.
“뇌물을 주고받지 않으면 형식상이라 할지라도 평민이 설 자리를 마련할 수 없었을 겁니다. 상권을 활성화시키고 황금을 끌어 모으는 자들을 신분 때문에 가만 두고 놀리다니, 손해가 막심해요.”
“당신은 평민의 사회 진출을 응원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의 활동으로 금고 채우려고 하는 거잖아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요. 난 자선사업가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내게서 가져갔다면, 그에 상응하는 황금을 가져와야죠.”
당당하게 나오니 첨언할 것이 없었다. 말룸은 부끄러움이란 게 없는 사람 같았다.
“‘개체명, 말룸 발타사르.’”
그제야 말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으로 고쳐 줘요.”
나는 한글 위에 취소선을 긋고 레시우스어로 말룸의 주문사항을 적어 넣었다.
“알겠어요. 이름, 말렉시우스 라딘라티. ……라딘라티는 안 적으면 안 돼요?”
“그렇게 해요. 이름 같은 건 의미를 잃은 지 오래라, 당신이 원한다면 어떤 이름으로도 개명할 수 있어요.”
“아무 이름이나 괜찮으면 구렁 씨는 어때요?”
말룸이 말을 잃어버렸다. 그는 침음을 삼키느라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미안한데, 소름 끼쳤어요. 구렁이의 변형어인가요? 당신 작명 솜씨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심각한 수준인데요.”
“뭐든 받아준다면서요!”
“앞집 개 이름 같은 건 싫어요. 당신도 내가 거절할 걸 알았으면서.”
말룸이 슬슬 눈을 피했다. 나는 몇 번 픽 웃고 말았다. 그리고 ‘라딘라티’ 네 글자 위로 취소선을 짙게 그었다.
만년필이 바쁘게 움직였다. 백색 지면이 날카로운 펜촉으로 아예 뚫어질 듯했다. 나는 그에게서 라딘라티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다.
“나이는 불명. 으음……. 남편 나이도 모르고 있었네요. 당신 올해 몇 살이에요?”
“안 센 지 꽤 되었는데……. 칠백십사 년 쯤 산 것 같군요.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칠백십사 년…….”
714.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 숫자를 새로 채워 넣었다.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말룸은 나이 탓에 자신감을 잃었는지 내 관심을 끌기 위해 귓불을 지분거렸다.
나는 몇 번 글자를 덧그리다 일기장을 덮었다. 한 바닥 눈으로 훑었는데, 곧이곧대로 이야기해주다가는 꼼짝없이 날이 새어 버릴 듯했다.
“다른 건 거론할 필요도 없을 만큼 허무맹랑해요. 원작을 바탕으로 쓴 정보들이니까요. 이때만 해도 당신을 유혹해 살아남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저를 유혹해 살아남으려 했다고요?”
말룸이 바람 빠진 미소를 그린다.
“완벽히 성공한 작전이군요.”
덧붙인 그가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 후 말룸은 일을 미룰 수 없게 되었는지 책상 위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집무실로 가 일을 볼 모양이었다.
그가 초승달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두운 바다 위를 은은히 밝히는 등대를 닮았다.
“당신과 매일 아침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뻐요, 오필리아.”
말룸이 멋들어진 인사를 건넸다.
“저도요. 오늘도 힘내요, 말룸.”
방을 벗어나는 말룸의 발걸음이 평소와는 달리 시간을 끌듯 느렸다. 나는 그가 떠난 자리를 회상하듯 바라보았다.
나로 인해 행복감을 숨기지 않는 말룸을 볼 때마다 향기 나는 욕조에 잠긴 듯 편안해졌다. 이렇게 하나 둘 관계를 재설정해 나가다 보면, 우리도 노을에 잠긴 듯 편안하게 삶을 유랑할 수 있게 되겠지…….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는 마음에 쏙 드는 신방을 벗어나 1층으로 향했다.
목발을 짚고 움직이는 것도 상당히 익숙해졌다. 나는 목발을 사용하면서 술을 마신 듯 비틀거리지 않고 똑바로 걷거나 체중을 분산하는 법을 터득했다.
사용인들이 이곳저곳 쏘다니며 저마다 일을 바쁘게 했다. 성이 화사한 빛깔로 재단장했다. 긴장감이 추적추적 내렸다. 발치에 진흙이 따라붙은 듯 걸음이 눈에 띄게 지체되었다.
오늘은 조슈아 님과 카사블랑카가 성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그들은 대신관 살인 사건으로 무척 바쁜 데다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었지만 말룸의 성화를 끝내 이기지 못했다.
말룸은 대연회장에 내려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나와 늦장을 부린 탓에 일이 밀렸다고 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는 늘 다른 사람에게 날을 세우기 일쑤인데다 신관님들과의 사이도 썩 좋지 않았다. 말룸이 조슈아 님과 카사블랑카를 만나면 서로 폭언을 주고받을 것이 분명했다.
상석에 앉으니 친애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로보가 크로노의 팔을 재치 있게 잡아당기며 장난을 걸었다.
크로노는 어깨에 거미가 붙은 표정이었다. 나는 진귀한 보석을 발견한 사람처럼 입술을 물어 웃음을 참았다. 크로노의 찌푸린 얼굴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감정 변화가 미미해 항상 밀가루 반죽처럼 덤덤한 표정만 그렸다.
“크로노, 좋은 아침이에요.”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사용인이 건네는 식전주를 받아들었다. 크로노가 단정히 미소하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오, 오필리아 님.”
이번에 나는 로보를 보며 공연히 왼쪽 뺨을 감쌌다.
“로보, 맘 상한 건 좀 괜찮아요?”
로보가 멋쩍은 듯 머리칼을 헤집다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괜찮아. 예상했던 일인데 감정이 북받치는 바람에.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오필리아.”
나는 한참 전등 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이는 포크만 내려다보았다.
“……이름으로 불러 주네요.”
“뭐, 그렇지. 내 고집대로 부르고 있었던 거니까. 이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로보의 표정은 평소와 같이 쾌활해 속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장난스러운 듯 자신의 진심을 덧붙였다.
“그래도 너한테 내가 필요할 것 같으면 다시 아가씨라고 부를 거야. 미안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도 더 이상 양보 못 해.”
그가 내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난 아가씨가 행복했으면 해서 잠시 놓아주는 거지,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고 싶어서 맘을 정리하는 게 아니니까.”
로보가 그 이상 첨언하지 않고 크로노를 챙겼다. 주로 음식을 집어다 날라 주는 편이었는데, 크로노가 어쩌다 그 호의를 받아들이면 어린아이의 발전을 본 사람처럼 크게 기뻐했다.
요사이 로보는 크로노가 아틀란티스에 두고 온 동생처럼 보인다며 친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크로노는 로보의 관심이 귀찮고 마뜩잖았는지 몇 마디 투덜거렸다.
“앞으로 당신에게 끔찍한 미래가 실현될 가능성이 높소. 이 얘기 듣기 싫으면 저리 좀 가시오…….”
“또 거짓말이네. 오필리아, 육지 황자 거짓말이 꽤 바쁘게 일하는 거 알아?”
로보가 크로노의 입매를 가리켰다.
“육지 황자는 거짓말 할 때 입술 깨무는 버릇이 있어. 슬슬 나랑 친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너무하네. 왜 그렇게까지 거리를 두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오? 오늘 새벽 그쪽이 주정 부렸던 것이 더 너무하오.”
이번에 크로노는 말을 늘이지 않았다. 내가 겪은 어떤 것보다 단단한 끊어냄이었다.
나는 실연의 증언을 못 들은 척 와인 든 유리잔만 응시했다. 포도주는 떫고 씁쓸해 아무리 숙성시켜도 취향이 아니었다.
로보가 한숨을 쉬며 턱을 괴었다.
“그 얘기 안 했으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육지 황자는 배려가 없어.”
“그러니 저리 가시오. 대체 왜 나 같은 것과 어울리려 하시오? 하등 이득 될 것이 없는데도.”
“사람 사귀는 데 쓸모 있고 없고가 뭐가 중요해? 이해득실 따지는 거 이해 못 하겠어.”
“내게는 중요하오. 당신은…… 나와 태생부터가 다르잖소.”
“어디가 다른데? 똑같이 태어났잖아.”
크로노가 홱 고개를 돌려 속속 나오기 시작하는 요리에 시선을 준다.
“사랑받고 컸잖소……. 저주를 타고났는데도. 전부 티가 나……. 당신의 씀씀이, 쾌활한 미소, 자유분방하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미래로의 가능성을 가늠하며 영롱히 물결치는 붉은 안광 전부에 당신을 사랑한 가족들의 뜻이 깃들어 있소. 그런 사람들은 어떤 끔찍한 일이 자신을 덮쳐도 무릎을 짚고 일어날 수 있지……. 나와는 영 다른 부류인 것이오.”
“칭찬 고마워. 하지만 나는 육지 황자도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로보는 능청스럽게 결핍 어린 투정을 부드럽게 받아쳤다. 크로노는 로보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유독 로보에게만 심술을 부렸다. 자신이 지니지 못한 무언가를, 로보가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로보는 가족 이야기도 곧잘 했고, 부모님과 큰형, 그리고 할머니를 잃는 사고를 당한 대신 할아버지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훌륭히 장성했다. 그러나 크로노는 그의 가족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와 말룸도 가족사를 주제로 대화하거나 공유하지 않았다. 나는 가족과 관련해 좋은 기억이 없었고, 말룸은 거론할 필요도 없었다. 신목에서 태어났다는 엘로힘은 같은 엘프가 아닌 나무를 부모로 여겼을 테고…….
로보처럼 잘 여문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었다.
우리는 대부분 튀어나온 자수처럼 두드러지는 하자를 끌어안은 상태로 세상을 견디고 있었다.
* * *
끊임없이 요리가 밀어닥쳤다. 신전에서 손님이 온다고 신경 쓴 듯했다. 특이한 것은 코스 요리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요리를 다 내어 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화 내용이 밖으로 유출되면 곤란하다보니 요리를 한 번에 전부 받고 사람을 물리려는 것 같았다.
엘로힘과 렉스 님이 유난히 늦었다. 두 사람은 조슈아 님과 카사블랑카를 마중하러 성 앞에 나가 있었다. 나는 초조하게 그들을 기다렸다.
조슈아 님과 카사블랑카가 성을 내도 할 말이 없었다. 만일 신관님들이 내게 상냥하게 군다면 그들은 지푸라기를 포도주와 빵으로 바꿀 수 있는 성인군자였다.
불안정해진 영혼의 균형을 살필 수 있게 된 것은 기꺼웠다. 그러나 말룸의 성화에 불려온 신관님들이 대신관 살인사건 같은 나름의 사정을 매듭짓지 못했다는 점이 껄끄러웠다.
채 식지 않은 돼지구이가 번드르르한 갈색 껍질이며 맛좋은 속을 과시했다. 정작 자신은 먹지 못하면서 말룸은 요리사 고용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대연회장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여럿 들렸다.
“먼저 먹고 있으라니까 얼마 손대지 않았군.”
엘로힘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청록 찬란한 엘프의 위로 귀여운 눈송이가 총총 얹혔다. 그가 코트와 모자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내고 자리에 앉았다.
세 명의 신관님들이 그와 함께 있었다.
조슈아 님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속지가 강철로 이루어진 기묘한 책을 품에 안고 있었다. 밀빛 머리칼, 연식이 오래된 나무를 닮은 갈색 눈동자는 흰 설원과 섞여 한기를 품고 있는 듯도 싶었다. 광신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하게 절제된 태도였다. 그의 광기는 오직 신과 관련되었을 때에만 두드러졌다.
나는 조슈아 님에게서 신을 박탈했을 때의 미래가 궁금한 한편 두려워졌다. 그가 적을 두고 있는 신전의 전신이 라딘라티를 섬겼던 사이비 교단이라는 것을 신관님께서 알게 된다면…….
“조금 늦었습니다, 오필리아 님. 밖에 눈이 내려 마차가 속도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조슈아 님이 격식 있게 인사했다. 슬쩍 밑으로 시선을 주는 것을 보아 식탁 아래 숨겨진 내 오른다리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괜찮아요,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해요, 조슈아 님.”
나는 급히 대꾸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가 눈치채지 못했으면 싶었다. 언젠가 실토해야 하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말룸은 일이 바빠서 오후에나 시간이 날 것 같대요. 기껏 와주셨는데…….”
“아뇨, 아닙니다. 그자의 얼굴은 보지 않는 게 낫습니다.”
조슈아 님이 그린 듯 웃었다. 그는 크로노의 맞은편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자리를 정리했다. 이런 식사자리가 익숙한 것 같았다.
한편 카사블랑카는 말이 없었다. 소년은 말룸의 둥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회색 벙거지를 깊이 눌러쓴 채 조슈아 님 가까이 자리했다.
모자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소년의 안광을 감췄다. 갈색 피부에 창백한 혐오가 드리워졌다.
조슈아 님이 먼저 나섰다. 카사블랑카를 숨기거나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상황은 렉스 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그자의 정체를 알게 되셨다고요.”
그의 눈동자가 꼭 추궁하는 듯 느껴졌다. 조슈아 님은 웃고 있었지만 나는 그 웃음에서 경멸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