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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66화 (66/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66화

우리의 오해는 모두 풀렸지만 그의 상처를 마주할 때면 불에 덴 것처럼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말룸은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우리의 신방을 향해 있었다.

손을 뻗어 말룸의 볼을 감싸 시선이 내게 향하도록 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애정이 떠나 버릴까 봐 독한 연기를 들이마신 것처럼 두려웠다.

“다 정리했어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서요. 로보도 이해해주었어요. 물에 빠진 건 단순한 사고였고…….”

“단순한 사고로 죽을 뻔했잖아요!”

말룸이 잇새로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절박함이었다. 나는 내 심장의 온기가 전해질 때까지 그의 볼을 어루만질 수밖에 없었다.

“정리했으면 뒤돌아보지 말아요. 날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당신은 내 부인이잖아요……. 응?”

말룸이 내 왼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의 질투에 이끌려 덩달아 심장이 조여들었다. 나는 말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벽면에 걸린 창문으로부터 주홍 석양이 몰아쳐 그의 표정을 부각했다.

말룸은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는 나를 앞에 두고도 다른 일에 집중하는 듯했다. 나는 말룸의 위압감에 긴장하며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주시했다.

말룸이 숨기고 있던 것의 정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그의 정장 재킷 주머니에서 어떤 정물이 별처럼 반짝였다.

금반지였다.

장인이 공들여 만든 듯 고풍스러웠고 디자인마저 복잡했다. 중앙에는 모래 알갱이 같은 붉은빛 보석들이 황금 띠를 수놓았다. 별이 부서져 금빛 사막에 내려앉은 듯했다.

나는 설마 싶어 몇 마디 문장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 말룸은 초목에 잠긴 듯 편안하게, 그러나 어딘지 긴장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말룸, 그건…….”

“놀랐어요? 일부러 화난 척했어요. 그런 일로 당신에게 화낼 리 없잖아요. 물론 굉장히 걱정했던 건 맞습니다만…….”

내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나는 안도감과 감동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말룸이 개구쟁이처럼 싹싹하게 미소했다.

“결혼식 날 주었던, 마구잡이로 찍어낸 반지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 마련한 반지예요. 도안도 제가 구상했지요. 마음에 드나요?”

“저는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왜 없어요? 인어와 도망치지 않고 여기 제 앞에 있잖아요. 액세서리 싫어하는 건 알지만, 하고 다니는 거 고려해줘요.”

“당신 건요? 하나뿐이잖아요.”

그가 멋쩍게 미소했다.

“반지에 사용된 보석이 귀한 거라서. 그리고 전 예식 장갑을 자주 착용해서 반지는 거추장스러워요.”

말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는 걸림 없이 들어가 깊이 자리 잡았다.

“그 붉은 보석, 제 심장 결정의 남은 부분이라고 하면…… 당신, 도망갈까요?”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말룸이 무릎을 꿇은 그대로 내 왼 손등에 키스했다. 그가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잔잔하고 고풍스럽게 영근 달을 닮은 미소였다.

“도망칠 리가 없잖아요. 심장이라니, 이 세상의 어떤 보석보다 값지고 소중해요. 절대 못 버려요. 죽을 때까지 빼지 않을 거예요.”

“오필리아……. 결혼해줘서, 사랑을 허락해줘서 고마워요.”

말룸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다시 품에 안았다. 왼손 약지의 반지가 거추장스럽거나 더는 족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연신 속삭였다.

“당신과 이렇게 영혼을 나누는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그렇죠. 호칭을 정리해야지. 이제 당신을 여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요?”

평범한 인간처럼.

“여보, 내 사랑…… 오필리아.”

말룸은 잃어버렸던 감정 조각 하나를 비로소 맞추어 넣은 듯했다.

우리는 서로를 옭아맬 창살을 공 들여 한 가닥씩 만들었다. 나는 감정이 벅차올라 간헐적으로 호흡했다.

말룸이 부르는 여보 소리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는 잠을 자지 못할 테지만 우리는 한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동안 함께할 것이다.

나는 삼림에 묻힌 새끼 스라소니처럼 안도해 부드러운 이불을 끌어안았다.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아 몸이 나른했다.

물에 빠진 다음 날이었는데도 악몽을 꾸지 않았다. 평화가 몸 곳곳에 달라붙어 다리의 고통을 앗아갔다.

깊은 호의가 방패처럼 나를 지켰다. 가슴이 뻑적지근해지며 충만감이 차올랐다. 속에서 무언가 자라 군집을 이루었다.

말룸과는 삶에 서리처럼 내린 무정한 밤들을 함께하고 싶었다.

심장 속 사과가 붉지 않아도 기꺼웠다. 무르익은 것은 금세 땅에 떨어질 테니 절정을 향해 몸집을 불리는 초록색 사과가 품기에 적당했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수더분한 나뭇가지가 장막처럼 쏟아졌다. 홍갈색 가지, 탐스럽게 맺힌 붉은 열매. 능금이었다.

나무가 침대를 칭칭 휘감았다. 가시덤불 안에 갇힌 것 같았다. 손끝에서 작고 탐스러운 흰 꽃이 자꾸 피어올랐다. 감정을 가라앉혀야 하는데 그게 쉽지는 않았다.

말룸도 자꾸만 녹아버리는 심장 때문에 한동안 날 찾지 않았던 걸까? 심장을 결정으로 바꿔 건강이 무너졌을 텐데도 날 사랑하고 싶었을까.

병약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아픈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 내가 걱정 어린 말을 건넬 때마다 육신에 난 흠집을 기쁜 듯 이야기했다.

말룸이 조심스럽게 나를 보듬었다. 우리는 이불 속에 함께 있었다. 남자가 힘 있게 호흡했다. 그의 의식은 저무는 법 없이 온종일 깨어 화창했다. 그 눈부심과는 달리 말룸의 심상 세계는 넓은 대양 안에 열대어 한 마리만 살아 있는 듯 황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영롱히 빛나는 황금 눈동자와 시선이 맞았다. 말룸에게서는 그간 맡았던 시원한 향내가 아닌 사과꽃 내음이 풍겼다. 내게서 옮겨 붙은 냄새였다.

남편의 목소리, 남편의 손길, 남편의 향기……. 사방이 말룸으로 가득했다. 그게 좋아 셔츠 자락에 얼굴을 묻고 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과수원이에요, 말룸. 당신에게 주고 싶어서 제 무의식이 만들어 냈나 봐요.”

그가 작게 몸을 떨었다.

“꼼질대는 게 꼭 고양이 같군요. 당신 종종 잠꼬대도 했어요. 기억나요?”

나는 낯간지러운 소리도 곧잘 받아넘길 수 있게 되었다. 반쯤 몸을 일으키려니 말룸도 덩달아 이불을 치워내곤 몸을 일으켰다. 새벽 내내 나를 관찰했을 사람이었다. 잠꼬대를 했다는데, 이상한 소린 아니었으면 싶었다.

“여보.”

“응.”

“아예 일어날 건가요? 조금 더 자질 않고요.”

반쯤 땅 속에 잠긴 목소리가 관능적이었다. 잊고 있던 여보 소리가 감정을 간지럽혀 얼굴이 홧홧해졌다. 말룸의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낮게 퍼졌다. 나는 이불 밑에서 손가락을 꿈질거렸다.

“숲에 온 것 같아서 자기 아까워요. 그래서 깼나 봐요. ……그, 여보라기보다는 오필리아라고 불러 줘요. 부끄러워서 속이 이상해질 것 같아요.”

“그래요? 저는 좋은데. 일단 알겠어요. 아예 안 쓴다고는 장담 못하겠지만.”

일부러 헛기침을 해 소리를 다듬었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바로 정면에 말룸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매 순간 찬양을 늘어놓았지만 그의 외모는 볼 때마다 새로웠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선망하던 아폴론이 땅에 추락해 빚어진 듯했다. 말룸은 자신이 태양과 어울리지 않다며 내켜 하지 않겠지만, 내게 있어서 그는 다 식어버렸대도 태양은 태양이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말룸과 단둘이 방주를 타고 항해하는 기분이다.

침대에 주저앉은 채 말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차게 가라앉은 손이 어깨를 감싸 나를 지탱했다. 피하지 않고 다가오는 그가 달콤한 디저트처럼 사랑스러웠다.

“지금 체온이 가라앉아서 차가울 겁니다. 다시 뜨거워질 때 안길래요?”

“이불이 따뜻해서 상관없어요.”

“원하는 대로 해요. 다리는 괜찮은지 모르겠군요.”

“괜찮아요. 힘이 들어가지 않거나 감각이 없는 건 매일 똑같았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이 약초 너무 이상해. 부작용 같은 건 없어요? 로보 말로는 인어에게 독이 될 수도 있대요.”

“당신은 인간이니까 괜찮습니다. 부작용이 있는 걸 줄 리 없잖아요, 내 사랑. 인어와 인간을 동일선상에 두면 곤란해요.”

약간의 웃음기와 함께 그가 덧붙였다. 말룸이 다리를 덮어둔 이불을 걷어내곤 환부를 살폈다. 거뭇거뭇한 흔적이 붕대에 가득 얹혔다.

“볼 때마다 제가 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군요. 발등부터 정강이까지 전부 엉망이에요. 이전 같았으면 아라크네에게 명령이라도 했겠지만, 그 녀석 요즘 거처에서 나오지 않으려 해서요. 라딘라티가 봉인된 후 아라크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워졌죠.”

말룸이 침대를 빠져나갔다.

“서신은 계속 보내고 있습니다. 피티아 공작저로 쳐들어가 녀석을 끌어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말미를 주는 겁니다……. 녀석은 날 거스르지 못해요.”

말룸은 자신이 아라크네보다 상위의 존재라는 듯 이야기했다.

그의 비정함을 몰래 엿본 나는 녹지 않는 얼음을 만진 것처럼 숨을 멈췄다. 그는 내가 이런 분위기를 달가워하지 않음을 알았다. 말룸이 봄꽃처럼 부드러운 눈빛으로 내 손등을 매만졌다.

“방은 충분히 구경했나요?”

나는 기꺼이 화제전환에 찬성했다.

“네, 꿈만 같아요……. 고마워요, 말룸. 당신이 방 인테리어를 총괄한 거죠?”

“우리 방이니까요. 전처럼 당신 취향이 아닌 방을 선물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새 방은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였다. 숲에 낡은 궁전의 방 한 쪽을 따로 떼어 붙여둔 것 같았다.

포인세티아의 능력으로 자란 풍성한 수풀이 공간을 옭아맸다. 라벤더와 해바라기 화분이 곳곳을 장식했고, 빈티지 풍의 가구가 흰 공간을 끌어안았다. 창문과 문은 새파란 색으로 칠해 두어 포인트가 제대로 잡혔다. 방을 장식한 가구들은 소박한 멋이 있었지만 말룸이 들여놓은 가구가 값쌀 리 없으니 고가의 골동품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오늘 치 소독을 잊으면 안 되겠죠. 자, 다리 줘봐요.”

말룸이 서랍에서 붕대와 소독약을 꺼냈다. 선반 위에 있던 약초 달인 물을 내게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역겨운 향이 치솟는 약초물을 뜸을 들여 삼키고 오른다리를 내밀었다. 말룸의 길쭉한 손가락이 설탕 공예품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붕대를 풀었다.

“이쪽 보지 말고.”

나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고개를 돌렸다. 아프지 않아도 나를 안쓰럽게 여겨 달라 신음하고 싶었지만 말룸을 고통스럽게 할 걸 알아 그만두었다. 대신 나는 벽면의 담쟁이덩굴이 어떤 모양으로 구부러졌는지 줄기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다 됐어요. 움직이기 괜찮나요?”

“네, 편해요.”

그제야 말룸이 편히 숨을 쉬었다. 하지만 표정에 얹힌 수심은 영 개지 않았다. 화제를 돌릴 게 없을까? 궁리를 하다 침대 바로 옆, 책상 위 놓인 일기장이 눈에 띄었다. 나는 노트를 자리로 가져왔다.

“말룸, 여기 봐요.”

말룸이 검은 노트에 시선을 주었다. 고요히 가라앉은 얼굴이 안경도 잘 어울릴 듯했다. 나는 체셔 고양이처럼 씩 웃으며 그에게 어느 한 부분을 펼쳐 보여주었다.

노트 페이지에 각진 문자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나는 그 글씨를 읽을 수 있지만 말룸은 읽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생소한 글자의 정체를 단번에 작살로 낚아 올렸다.

“이게 한글인가요? 당신의 세계에서 사용했다는 글자. 일정한 규칙성이 보이는군요.”

“그걸 한 번 보고 알아낼 수 있어요?”

말룸이 어깨를 으쓱한다.

“오래 살았으니까요.”

오래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현자처럼 굴 수는 없었다. 여상스러운 태도였지만 어조에서 묘한 자신감이 묻어나 말룸다웠다.

<말룸 관찰 일지>

홑화살괄호 안에 쓰인 문자가 영 작게만 느껴졌다. 그때의 발버둥이 약간은 하찮고 약간은 서러웠다.

“일기장으로 사용하기 전에는 기록용이었어요. 여기 뭐라고 쓰여 있냐면……. ‘말룸 관찰 일지’라고 쓰여 있어요. 7월 자.”

말룸의 입매가 모나졌다.

“이런 것까지 쓰고 있었어요?”

“신랑에게 잡아먹힐 순 없잖아요. 그때만 해도 막다른 길에 몰려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지 말고, 읽어줄 테니까 보고 정정해줘요. 괜찮은 소일거리죠?”

말룸이 골치 아프다는 듯 오른쪽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가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와 내 곁에 주저앉았다. 기분 상해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말룸은 난감해하면서도 미약한 흥미를 보였다.

“‘말룸 관찰 일지. 본 관찰일지는 말룸, 얼굴밖에 볼 게 없는 신랑으로부터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작성함.’”

첫 줄부터 지적이 날아들었다.

“얼굴밖에 볼 게 없다뇨. 거기 수정해줘요. ‘돈도 많고 권력도 있는, 다정하고 좋은 신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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