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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65화 (65/100)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65화

갑판으로 나오자 소란스러움이 일제히 멎었다. 로보가 멋쩍은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임에도 차림새가 나부끼듯 가벼웠다. 선상 난간에 기대어 있던 로보는 겨울바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인어는 감기에 걸리지 않아.”

내 얼굴의 메시지를 읽어냈는지 로보가 먼저 인어의 건강함을 강조했다. 그는 물에 젖은 옷가지와 바다에 빠졌던 휠체어, 그리고 각종 물건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로보의 얼굴에서 미안한 기색이 가시질 않았다. 그가 멋쩍은 듯 수선을 피우며 내게 이런저런 물건들을 보여 주었다.

“다른 녀석들이 바다에 떨어진 걸 이것저것 긁어모았는데 인형은 찾질 못했대. 머리핀도 몇 개 없어졌고. 라기는 내가 잘 교육할게……. 정말 미안.”

“괜찮아요. 반려동물 심술로 물에 빠지는 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말은 그렇게 해도 당분간 물 근처에 가지 못할 듯했다. 나는 아닌 척 배의 난간에서 멀어져 있었는데, 눈치 빠른 로보가 모를 리 없었다.

그가 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시답잖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호기심 어린 표정의 선원들을 멀리 쫓아 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좋을 대로 상상하거든. 험하게 말하지 않으면 듣질 않아.”

한바탕 찬바람이 불었다. 나는 목도리를 코끝까지 끌어올리곤 로보를 바라보았다.

로보가 짧게 잘린 흰 머리칼을 매만졌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그의 손끝에 옅게 분홍 물이 올랐다. 하기야 로보의 성격에 누군가에게 이토록 미안해할 일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상 파티를 준비해 놓으라고 명령해뒀었는데,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지렁이 자식이 날뛸 걸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지만 내 잘못이니까…….”

나는 말룸의 눈에 띄지 않게 등을 치료할 궁리를 하며 대꾸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다들 좋은 분 같아요. 라기도 인상적이었고요.”

“라기는 혼을 내도 돼. 너무 오냐오냐 키웠지. 어쨌든, 장난기가 많아서 그렇지 다들 나쁜 녀석은 아니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말을 잘 따라주거든.”

로보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뒷말의 주인공을 발견하곤 귓가에 속삭였다.

“이스마엘을 제외하고.”

나는 웃음을 질끈 참았다. 그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스마엘은 아직 해군일 적 버릇 못 버렸어. 기억 나? 해군 출신 창잡이와 겨루었던 얘기를 해줬었잖아. 그게 쟤야. 인간이 인어와 겨루다니, 어마어마하다니까.”

어느새 지척에 도착한 이스마엘의 표정이 험했다.

“거기, 선장. 또 무슨 쓸데없는 얘길 하는 거지?”

제대로 마주한 이스마엘은 체격이 무척 좋았다. 짧게 자른 검정 머리칼과 아마조나이트를 연상케 하는 청빛 눈동자가 살짝 그을린 피부와 잘 어울렸다. 강인함이 형상화한 사람 같았다.

나는 아이돌이라도 만난 듯 이스마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왕이면 저렇게 강한 몸에 빙의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몸 찾아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유령 같은 상념이었다.

로보가 이스마엘을 쏘아보며 볼멘소리를 냈다.

“선장이라고 말만 하지 선장 취급은 왜 안 해줘?”

“장난해? 팔자 좋게 잡담은. 귀족에게 해를 입히다니, 감방 가고 싶어?”

이스마엘이 로보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로보가 투덜거렸다.

“이스마엘…… 어차피 발타사르가 영지 정박을 허가해서 우릴 잡아가겠답시고 설치는 놈은 없다고.”

말룸이 로보의 영지 정박을 허가했다고?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닌 척해도 물밑에서 모종의 거래가 오가던 모양이었다.

이스마엘이 로보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잘 나가다 한 번씩 삐끗한단 말이지. 비전하, 선장의 무례를 대신 사과드립니다. 이스마엘 리듀스라고 합니다. 리듀스 백작가의 영애로 있었지요. 말단 해군이었는데, 위에서 승진을 안 시켜줘서 해적질이나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사교계 특유의 인사를 건네었다. 완벽한 귀족 예법이었다.

“승진 방해한 놈들 주머니 터는 맛이 무척 쏠쏠하지 말입니다.”

절도 있는 인사는 예상 밖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순간 얼었다. 렉스 님에게서 배운 예법을 끄집어낼라 쳐도 뜻밖의 실습에 머리가 잘 돌아가질 않았다.

나는 간신히 어설픈 동작을 펼쳐 인사를 받았다. 이스마엘은 내 엉성한 자세에도 업신여기지 않았다.

로보가 이스마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귀족 지갑털이 전문이지. 내가 부선장 하나는 잘 뒀다니까.”

그러자 이스마엘이 아주 질색을 하며 로보에게서 몇 발자국 멀어졌다.

이스마엘은 유쾌한 사람이었다. 멋들어진 웃음이 로보의 미소와 닮았다. 나는 이스마엘을 부선장으로 둔 로보가 문득 부러워졌다.

이스마엘이 경쾌하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어떤 분일까 궁금했습니다. 이 무법자가 매번 떠들어대는 상대였으니까요. 과연, 지금까지 이 녀석이 대시하고 차였던 상대들과는 다르군요. 우아하고, 아름다우십니다.”

어쩐지 입을 틀어막아 감격한 것처럼 행동해야 할 것 같았다. 이스마엘이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선장보다는 제가 전하를 만족시켜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함께 항해를 떠나지 않으시겠습니까?”

귀 끝까지 열이 뻗쳤다……. 만약 이스마엘이 남자였다면 꼼짝없이 분위기에 휘말려 카페로 향했겠지. 이 사람 분명 선수였다.

“이스마엘! 적당히 해.”

로보가 이스마엘의 입을 틀어막을 기세로 끼어들었다. 이스마엘은 악동처럼 미소 지었다.

“멋진 사람이네요…… 이스마엘 씨는.”

“그렇게 고평가하지 말아줘.”

로보가 진땀을 흘렸다. 그는 치부를 부모에게 들킨 아이같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야. 안 들어도 괜찮아.”

“아하. 이제야 알겠다. 선장 차인 거 맞지? 파티 준비를 다시 해야겠군. 참사랑 끝난 거 축하한다. 저번에 내 연애 사업을 방해하더니, 거 참 쌤통이군.”

그러자 로보가 날뛰었다.

“누가 쫑났어. 누구 맘대로 끝나? 아직 안 끝났어. 그리고 에녹스랑 잘 사귀고 있으면서 왜 심술이야? 훼방 받고 싶지 않으면 갑판에서 쪽쪽대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아가씨, 이 녀석은 애인 있어. 너도, 이스마엘. 아가씨는 한 번에 두 사람을 사귀지 않는단 말이지……. 새겨둬.”

“뭘 진지하게 견제하고 있어? 웃기지도 않아.”

이스마엘과 함께 있는 로보는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 저 둘이 오랜 시간 함께 항해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나 참, 해적이란 족속은.”

“그렇게 얘기하면 내가 가벼운 놈 같잖아. 그리고 너도 해적이잖아, 너도! ……난 정말 호감 있는 상대 아니면 말도 안 붙여, 정말이야.”

로보가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에게 보답해 주지 못하니까.

내가 말룸 외의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이 있다면, 피치 못한 상황 때문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내가 로보든 크로노든 마음에 품게 된다 해도 맺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말룸이 상처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어떤 반응을 돌려주어야 할지 몰라 바위처럼 굳었다. 그러자 이스마엘과 로보가 눈치 좋게 화제를 돌렸다.

나는 늑대 해적단이 벌인 소동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가 벗겨진 레시우스 해군 일화에 깔깔대면서도 그들의 자유와 깊은 마음을 부러워했다. 남을 배려하는 천성은 배운다 해도 쉽게 갖출 수 없었다.

로보와 나는 석양이 질 무렵에서야 티포주 성으로 돌아갔다. 케이론 호에서의 체류가 길었던 탓이었다.

중앙 로비에 음산함이 감돌았다. 케이론 호에서 연락을 넣었다는 것이 정말인지 말룸이 팔짱을 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등의 상처가 쑤시는 듯해 말룸의 시선을 피했다. 말룸의 분위기가 더욱 얼어붙었다. 아내의 외도를 추궁하는 남편의 표상이었다.

말룸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침묵이 얼마나 칼날 같은지 알고 있었다. 말룸의 날 선 표정은 오래간만에 접하는 것이었지만 창백한 피부 곳곳에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보와 대면했을 때의 살벌함이 묻어났다.

말룸이 얼어붙은 듯 선 로보를 외면하고 성큼 다가와 내 상태를 살폈다.

“오필리아, 몸 상태는요? 오한이 들진 않나요? 잠이 쏟아진다든가…….”

나는 엉거주춤하게 등을 굽히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는 번쩍 자세를 고쳤다.

말룸은 로보를 아예 무시했다. 로보는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일단 수긍했다. 그는 미안함을 간직하고 있어서인지 말룸에게 모난 말을 하지 못했다.

“응, 조금 추운 걸 제외하면 문제없어요.”

“하지만 물에 빠졌잖아요! 연락을 받고서 얼마나…… 당신은 매번 왜 이렇게 위태로울까요?”

말룸이 끓던 속을 풀어 놓았다. 그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빈틈 하나 보이지 않던 얼굴이 걱정으로 매서워졌다.

내가 또 당신을 걱정하게 만들었구나.

손끝에 전기가 통한 듯 섧게 저렸다. 말룸의 손을 끌어와 잡았다.

“미안해요. 당신을 못 만나는 줄 알고 무서웠어요. 다시 봐서 기뻐요…….”

주문을 외듯 속삭였다. 말룸이 나를 품속으로 깊이 끌어당기며 감정 섞인 숨을 쉬었다.

이제야 온전히 집에 돌아온 기분이다.

몸을 꽉 채우고 있던 긴장이 빠져나갔다. 두려움과 서러움이 끄트머리가 새는 물감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울지는 않았다. 대신 말룸의 단단한 허리를 꼭 끌어안고선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가볍게 기댔다.

그가 내 속을 짐작했는지 머리칼을 쓸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이전에는 어색하고 소름끼치기만 했던 손길이 봄날의 새싹처럼 기꺼웠다.

말룸이 내 아랫입술을 잘게 머금어 투정했다. 요즘 그는 만나기만 하면 행동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우리가 머물 방, 새로 꾸며 두었어요. 자연 속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세련된 느낌. 맞죠?”

“벌써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말룸을 올려다보았다. 나와 눈을 맞추자 말룸은 돌이 되는 마법에서 풀린 사람처럼 비로소 활기가 돌았다. 양 볼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잘 닦인 대리석 바닥만 바라봤다.

“벌써가 아니에요. 저는 발타사르 대공이잖아요. 뭐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말룸이 갈구하듯 내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러더니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나를 안아 올렸다. 인형처럼 훅 들리는 것이, 그의 힘이 얼마나 센지 체감되었다.

말룸의 팔이 등의 상처를 압박했지만 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 사실을 알면 말룸도, 로보도 자책하고 슬퍼할 것이 빤했다.

“우리가 함께 생활할 방은 3층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대회의실을 치워내고 만든 건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책상도, 두 명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넓은 침대도, 테라스도 모두 있어요. 드레스 룸도, 거대한 욕조가 딸린 목욕탕도 있고 샤워 룸도 있죠. 면적이 넓은 방으로 일부러 골랐습니다.”

그가 숲을 누비는 바람처럼 잔잔히 속삭이며 나를 얼렀다.

말룸에게 안겨 층계를 올라가는 도중 로보가 있었던 곳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미 성을 빠져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로보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신경 쓰이나요?”

말룸의 샛노란 눈동자가 정면으로 들이쳤다. 나는 솔직하게 긍정했다. 말룸은 내게 추궁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희게 치장된 고풍스러운 문 앞에 도착한 후 나를 땅에 내려줄 뿐이었다.

“그 인어가 당신에게 많은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 건 인정합니다. 그를 동아줄처럼 생각했겠죠…….”

말룸의 목소리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인어와 함께 내게서 도망치려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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